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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과 ‘강철비’, 남북대화가 못마땅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고교 1학년 도덕 과목 첫 수업 때였다. 선생님이 생뚱맞은 숙제를 내주었다. “다음 시간까지 교과서 1쪽부터 끝까지 왼쪽 여백에는 반공, 오른쪽엔 방첩이라고 써오도록. 반드시 빨간 색 볼펜으로.”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불만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집에서 ‘반공 방첩’ 쓰기 숙제를 하려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아까운 시간에 이게 무슨 짓이지?” 하고 푸념을 하는 순간 ‘반짝’ 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고무 지우개로 도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곧장 실행에 옮겼다. 칼로 ‘반공’ ‘방첩’이라는 글을 각각 새겼다. 그리곤 인주를 묻혀 교과서를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반공’과 ‘방첩’을 찍어댔다. 눈 깜짝할 새 숙제를 해치웠다. 그 다음 윤리 시간. 숙제 검사 시간 내내 퇴짜를 맞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통과했던 것 같다.

고교 신입생 사고의 틀 속에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유치한 그 숙제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써먹던 강력한 지배 논리였다. 간첩 신고 표어도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표어는 "저기 가는 저 나그네, 간첩인가 다시 보자"였다. 심지어 이런 표어도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도 알고 보니 간첩", "간첩 잡는 아빠 되고 신고하는 엄마 되자." 이 가운데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웬만한 국민들이 다 아는 표어로 남아 있다.

묘하게도 지난 주말, 영화 <1987>과 <강철비>를 잇따라 관람하면서 고교 시절의 ‘반공 방첩’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1987>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조명한다.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모조리 ‘용공분자’로 몰아가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권력의 끝없는 탐욕은 억압을 낳았고, 억압은 강압 수사에 의한 억울한 투옥과 죽음을 불렀다. 권력의 위선을 시민의 힘으로 발가벗긴 역사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1987>은 군부 집권 세력이 분단의 비극을 한낱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빅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이 벌어진 남영동 대공분실 추모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87년 6월 항쟁 때,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 살인 진상 규명과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힘을 모을 때였다.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가까운 광화문 거리로 나가 행진하는 대학생들에게 박수를 치며 함께 구호도 외치곤 했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가세한 시민항쟁이었다. 그리던 어느 날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영화 <1987> 언론시사회가 작년 12월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 용산점에서 열린 가운데 배우 박희순과 김윤석, 하정우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사진: 더 팩트 제공).

그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남북간 핵전쟁 시나리오를 담은 영화 <강철비>는 변함없이 ‘분단의 비극’을 일깨워 준다. 영화는 쿠데타가 발생한 북한에서 권력 1호를 데리고 남한으로 피신한 정예 요원 엄철우(정우성)가 남한의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그렸다.

흥미로운 점은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강철비> 관람을 추천했다는 대목이다. 영화 속에 북한의 핵 절반을 남한으로 옮긴다는 내용이 한국당이 주장해온 ‘전술핵 재배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영화평은 관람자의 자유인 만큼 설사 그것이 아전인수 격이라 해도 문제 삼을 게 없을 터이다.

어쨌거나 영화 속 엄철우와 곽철우의 대사가 눈길을 끌었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 받는다”는 대목이다. <1987>에서 시민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국민들의 ‘고통’이 30년 후 <강철비> 에서 재연되는 장면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적어도 지배 계층에 속한다는 상당수 사람들은 ‘분단이 오래 지속될수록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강철비>의 상영과 함께 모처럼 남북관계가 해빙 무드로 접어든 것도 공교롭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9일 남북 고위급 회담이 판문점에 열린다. 하지만 여전히 보수 야당은 ‘안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남북대화를 경계한다. ‘분단 논리’에 갇힌 냉전식 사고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탓이다.

배우 정우성(왼쪽)과 곽도원이 작년 12월 11일 오후 서울 CGV 용산점에서 열린 영화 <강철비> 언론시사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 더 팩트 제공).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는 얼마 전 평창올림픽 기간에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미(對美) 제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유 대표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제안을 수락하자 “올림픽이 끝난 뒤 언제부터 한미훈련을 재개할지 밝히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남북대화를 100% 지지한다고 거듭 천명했다. 물론 트럼프가 유 대표의 발언을 의식해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남북대화를 우려하는 국내의 목소리에 응답한 셈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말은 믿지 않아도 미국 대통령의 말이라면 토 하나 달지 않고 수긍하는 풍토도 분단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남북대화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분단과 긴장에 따르는 비용에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핵과 미사일 도발을 일삼는 북한과 대화를 하다니 제 정신인가” 하고 외칠 따름이다. ‘안보’ 깃발에 환호하는 사람들은 분단을 적절히 이용한다. 그러면서 미국 없는 안보는 감히 상상도 못한다. 자주국방은 백과사전에서나 찾을 일이다. <1987>과 <강철비>는 ‘분단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더는 이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편집위원 이처문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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