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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나온 왕이 오랑캐에게 아홉 번 절한 까닭강동수의 자투리 시사인문⑭ 다시 따져보는 병자호란과 오늘의 동북아 정세 /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1.

"칸은 구층 단 위에서 기다렸다. 황색 일산이 강바람에 펄럭였다. 칸은 남향으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끌려온 빈궁과 대군과 사녀들이 칠층 단 서쪽에 꿇어앉았고, 구층 단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에 청의 왕자와 군장들이 깃발을 세우고 도열했다. 철갑무사들이 방진으로 단을 외호했고, 꽃단장에 머리를 틀어 올린 조선 기녀 이백 명이 단 아래서 악기를 펼쳤다. (…)조선왕은 청병의 푸른 군복을 입고 칸이 보낸 호마 위에 올라 있었다. (…)조선 왕이 말에서 내렸다. 조선 왕은 구층 단 위의 황색 일산을 향해 읍했다. (…)청의 사령이 목청을 빼어 길게 소리쳤다.

-일 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추었다.(…)

-이 배요!

조선 왕이 다시 절을 올렸다. (…)칸이 조선 왕을 가까이 불렀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삼전도비(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소설가 김훈이 쓴 <남한산성>의 한 구절이다.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찢는 장면. ‘삼궤구고두례’는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 했던 여진족의 예법이다. 요즘 들어 이 장면이 새삼스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같은 제목의 영화가 추석 극장가에 내걸렸기 때문일 터다. 지금으로부터 380년 전, 1637년 1월 30일 서울 송파구의 삼전도(三田渡)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

삼전도의 치욕을 말하려면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이 임진왜란의 참화를 추슬러 가던 1623년, 인조반정 세력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권좌에서 쫓아냈다. 그들은 ‘광해군이 어지럽힌 정사(亂政)을 바로 잡겠다’는 걸 명분으로 내걸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적폐청산’ 같은 것이겠다. 그들이 주장한 난정은 크게 세 가지. 첫째, 광해군이 모후(선조가 1602년에 재혼한 인목왕후)를 폐하고 아우(이복동생 영창대군)를 죽임으로써 패륜을 자행했다. 둘째,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셋째, 오랑캐 후금(後金·청의 전신)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했다.

당대 성리학자들의 시각으로는 어머니를 폐하고 아우를 죽인 것도 큰 죄목이었지만, 오랑캐 후금을 섬기고 아버지의 나라 명을 배신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패륜행위였던 것. 반 광해군파들은 바로 그 대목을 내세워 왕을 내쫒았다. 글쎄,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대형 성조기를 들고 거리 집회에 나선 사람들이나 ‘전술핵’을 배치해 달라며 미국으로 건너간 어느 당의 국회의원들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광해군이 폐위되기 전, 동북아시아는 엄청난 격변에 놓여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자국으로 물러난 다음 판도 재편을 위한 봉건 영주들의 피 튀기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중국 대륙에서도 왕조 교체의 대회전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다. 이 틈을 이용해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스스로 칸(왕)이라 칭했다. 그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명에 전쟁을 포고했다.

다급해진 명이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으라는 것. 광해군은 고심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의 요구를 거절하자니 ‘대국의 은혜’를 배신한다는 경향 사대부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고, 파병을 하자니 불 일어나듯 하는 후금에 보복당할 것이어서 진퇴양난에 빠졌던 것.

광해군은 고심 끝에 묘책을 내놓았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000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했다. 실제로 전투에서 명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가운데 조선군도 후금 군에게 포위된다.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을 하고는 조선은 억지로 출병했을 뿐 후금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뜻이 있음이 아니란 것을 알린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 정책을 폈던 것.

광해군의 ‘양다리 정책’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재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당파 싸움에 찌든 당대의 조선 성리학자들의 눈엔 광해군의 행위야말로 얄팍하기 짝이 없는 ‘잔꾀’로 보였다. 그들의 눈엔 하늘같은 명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에 복속한 짐승 같은 행위로 보였던 것. 그 사건이 광해군을 몰아내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 됐던 거다.

어쨌거나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고 인조를 왕위에 올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존명사대·향명배청이란 사대주의 이데올로기가 골수에 박혀 있었다. 그들은 신흥강국 청을 적대시하고 야만의 무리라 능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625년 인조를 책봉하기 위해 온 명나라 사신들의 행패에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16만 냥의 은을 챙겨간 그들 때문에 재정이 초토화돼 일본 침략을 막기 위한 수군(水軍) 배치까지 중단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였다고.

그리고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에서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는 “청의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해선 안 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 세력 틈바구니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은 따로 있었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 교서를 가져가던 금군 전령이 청의 사신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겼던 것.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국가의 기강이 이처럼 엉망이었던 거다.

남한산성 남문(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리고 그해 12월 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조차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열흘 만인 12월 14일. 그야말로 저항 한 번 없는 무풍지대를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 뒤늦게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조정이 청군에게 길을 막혀 남한산성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그리고 그 이후의 비극도 굳이 되뇔 필요는 없겠다.

 

3.

‘병자호란’의 비극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했던 것일까.

1636년(병자년) 12월 9일 황제 홍타이지가 이끄는 14만의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넘고,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46일 만에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은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기득권 집착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 세력은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에 너무나 둔감했다. 그들은 명의 쇠퇴와 일본·여진 등 신흥 강자들이 등장한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급변에 너무나 무지했다. 서인 세력은 그런 변화에 나름대로 기민하게 대처하던 광해군을 내쫓고 망해 가는 늙은 제국 명에 나라의 운명을 통째로 내맡겼다. 글쎄, 조선 지배세력이 정세 급변을 오히려 역이용해 힘을 키울 수 있었는데도 비극을 자초한 것을 기득권 집착과 그로 인한 ‘전략적 사고의 부재’ 탓이 아닐까.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지 않으려면 모진 놈을 제압할 만한 힘을 갖든지, 그게 안 되면 모진 놈을 잘 구슬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오랑캐를 받드는 게 정 자존심 상하면 나라의 힘을 키우든지, 그게 아니면 청의 부상을 현실로 인정하고 화해 전략을 쓰든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입으로만 오랑캐와의 전쟁 불사를 외치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열흘 만에 도성을 빼앗긴 왕과 신하들은 지금 생각해도 딱하기 짝이 없다.

문득, ‘천안함 사건’이 떠오른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임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 평화전략을 전면 페기하고 대결 구도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북한 같은 ‘모진 놈들’과의 평화 공존을 거부했으면 국방에라도 힘써야 했다. 몰래 숨어들어 군함을 어뢰로 습격하고 도망간 북한의 소위야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우리 군 지휘관이란 사람들은 또 무언가. 군이란 적의 기습공격에도 대비를 해야 하는 집단이 아닌가. 수많은 젊은 생령이 수장됐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2010년 4월 24일 천안함 함수 인양 작업(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나라 지키라고 국민들이 귀한 자식들을 그들의 손에 맡기고 세금 내 월급 주지 않았던가. 북한에 뒤통수를 맞고서도 대통령의 대북 비난 회견에 배석했던 그들의 표정엔 아무런 부끄러움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 그들의 군복 깃에 매달린 세 개, 네 개짜리 별들을 지켜보던 나는 속절없이 죽어간 젊은 군인들에게 부끄러웠고, 화가 났다. 글쎄, 왜 부끄러움은 그 ‘똥별’들의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이어야만 했던가. 그 대통령에 그 군인들이다.

4.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돌구멍 같은 남한산성’에서 절체절명의 상황에 갇혀있으면서도 청에 항복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허황한 입씨름만 벌였던 당대 관료들의 자화상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청에 대한 항복국서를 하급 관료에 떠넘긴 고관대작들, 그 국서를 쓰기 싫어 아픈 체, 미친 체 하다 매를 맞고 죽어나가는 중화주의에 찌든 선비들……. 그리고 그 와중에 갈팡질팡하는 무능한 임금…….

결국 그 결과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야 했지 않았던가. 주화파 최명길은 그때 붙잡혀간 사람을 당시 조선 인구의 10% 가까운 50만 명으로 추산했다. 형조참의 나만갑이 남긴 <병자록>은 철수하는 청군이 조선인 남녀를 수백 명 단위로 줄을 세워 감시인들을 붙여 청의 수도 선양(심양)으로 끌고 갔는데, 행렬이 온종일 이어졌다고 썼다. 심지어 병자호란 38년 후인 1675년까지도 청의 노예 생활을 견디다 못해 압록강까지 탈출해 왔으나 고향을 눈앞에 두고 조선 관리들에게 붙잡혀 선양 주인집으로 강제 송환당한 사람도 있었다. 제 고향 찾은 백성을 붙잡아 적국의 노예로 되 보내는 나라가 과연 나라라 할 수 있을까. 여성들은 ‘실절’(절개를 지키지 못함)했다 하여 고향에 되돌아 와서도 버림받았다. ‘환향녀(還鄕女)’에서 변한 ‘화냥년’의 슬픈 어원이다.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하는 왕을 향해 백성들은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다시 물어보자. 패전의 책임은 왜 임금과 신료들의 것이 아니고 백성의 것인가. 왜 임금은 치욕적으로 굴복하고서도 왕위를 지켰는데, 수십 만의 백성들만 적국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해야 했던가. 내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지만, 조선 왕조가 그때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더라면, 그 때의 아픔을 혁명의 에너지로 쏟아 부을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근대화에 뒤쳐져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또 다른 가혹한 운명의 먹잇감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5.

다시 이야기를 지금으로 돌려 보자. 병자호란 당시의 동북아 국제 정세를 지금과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얼핏 봐도 비슷하다. 명과 청의 공방전은 미국과 중국의 동북아 패권 쟁탈전과 방불하다. 이리 같은 일본도 여전하다. 게다가 승냥이 같은 북한도 있다.

‘사드’를 배치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미국, 그것에 펄펄 뛰는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우리의 자화상은 명과 청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뇌했던 400년 전 광해군의 처지와 흡사하지 않은가. 동북아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를 자국의 ‘미사일 방어(MD) 체제’에 편입시키고 있는 미국에 우리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지켜주는 대가로 많은 걸 요구하고 있지 않나. 신형 무기를 사라, 한미 FTA를 개정하자는 등등. 임진왜란 때 도와줬으니 은혜를 갚으라던 명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지금도 우리 사회는 ‘주전론’과 ‘주화론’이 맞부딪치고 있다. 미국의 라인에 서서 대북 강경론을 외치는 사람과 대북 협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대북 강경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전술핵을 들여와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전쟁불사론’까지 외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그 피해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서울에서만 2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란 추측도 있다. 글쎄, 안보를 빙자한 이런 정파 싸움에 왜 국민이 불안에 떨어야 하나.

지금처럼 엄중한 시대에 인조의 길을 걸을 것인가, 광해군의 길을 걸을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제3의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인가.

글쎄, 장기적으로 보면 세계 유일 강대국 미국과 G2로 부상한 중국, 경제 대국 일본, 그리고 생존을 위해 핵 공갈을 하는 북한에 둘러싸인 우리나라가 경제력과 군사력, 문화적 힘에서 주변 열강이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도록 힘써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당면한 북핵 문제가 발등의 불이다. 그걸 해결하려면 우선 외교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김상헌의 자존심, 최명길의 현실 전략을 고루 살린 대책이 나와야 할 터이다. 그러자면 지혜를 키워야 할 일. 때로는 결단도 필요하다. 문재인 정권의 지혜와 결단이 절실한 시점이거니와 일부 야당과 보수 세력도 마찬가지. 무모한 강경론으로 사사건건 정부의 발목을 잡는 자해 행위는 그쳐야 할 일이다.

"운명은 순순히 응하는 자에게는 길을 안내하고, 저항하는 자는 질질 끌고 간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다. 세네카는 이렇게도 말했다. "운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약한 것이다. 내가 약하면 운명은 그 만큼 무거워진다."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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