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특사...문재인의 제갈량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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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특사...문재인의 제갈량은 누구인가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7.08.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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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시사인문⑧ ‘대북 특사 파견론’으로 돌아보는 ‘밀사’와 ‘특사’의 역사 / 편집국장 강동수

1.

편집국장 강동수

언론에는 크게 조명되지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취임 100일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대북 특사 파견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던 것.

‘북한이 우리 정부의 회담 제안에 응답하지 않는데 복안이 있느냐, 취임 직후 미·중·일 등에 특사를 보낸 것처럼 북한에도 특사를 파견할 의향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문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대화 여건이 갖춰지고 그 속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가는데, 북핵 문제 해결하는데 도움 된다고 판단한다면 그때는 북한에 특사를 보내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운영 성과를 국민에게 직접 알리는 '대국민 보고대회'가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모습(사진: 청와대 제공).

하지만 이런 단서도 달았다. “대화 여건이 갖춰져야 하고 대화가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는 담보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북한이 추가적 도발을 멈춰야만 대화의 분위기 조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남북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 제안 등에 호응하지 않는 마당에 대북 특사 파견 제안까지 거절하면 문 대통령의 체면도 손상되고 정부의 부담이 더 커진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길이 막히면 돌아서 가는 법. 특사가 됐든, 밀사가 됐든 남북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건 말할 나위가 없다. 글쎄, 전쟁 중이라도 적들과의 비선 대화는 늘 있어온 게 아닌가. 공식 특사를 교환하는 게 현 단계로선 어렵다면, 밀사(密使) 형식으로 제3국에서 만나 물밑 대화부터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다.

 

2.

특사(特使)라면 영어로 ‘special envoy’ 쯤 될 것이고, 밀사(密使)라면 ‘secret envoy’ 쯤으로 번역하면 될 듯싶다. 특사가 공식적이라면, 밀사는 뭔가 비공식적이고 비장한 느낌을 준다.

옛날 중국에선 공식적인 사절을 ‘사(使)’라고 했고, 밀사는 ‘행인(行人)’이라고 불렀다고.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유세객(遊說客)이었던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 같은 이들이 ‘행인’에 해당하는 셈이다. 전국 말기, 강대한 진(秦)에 대항하려면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초(楚), 연(燕) 등 6국이 연합해야 한다는 합종설(合縱說)을 내놓은 사람이 소진이라면, 진에게 잘 보여 진과 동맹을 맺는 게 낫다는 연횡(連橫)을 주장한 이가 장의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일. 두 사람 다 세 치 혀(三寸舌) 하나로 중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재상 자리를 꿰찬 사람이다. 장의가 젊은 시절 초나라 재상인 소양(昭陽)의 식객 노릇을 하다 보석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죽지 않을 만큼 매를 흠씬 맞았겠다. 그 아내가 “변변치 않은 글줄이나 읽고서 유세 따위를 다니니 그 꼴이 되지 않았소” 하고 바가지를 긁자 장의는 입을 벌려 “내 혀가 아직 남아 있소?” 하고 물었다. 아내가 그렇다고 하자 장의가 웃으며 하는 말 “그러면 됐소!”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둔 특사는 뭐니 뭐니 해도 제갈량(諸葛亮)이겠다. 초야에 은거하다 유비의 간청을 받고 출사했던 제갈량은 의탁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던 유비에게 근거지를 마련해 주려고 했다. 그의 복안은 조조의 위협을 받고 있던 동오(東吳) 손권의 힘을 빌려 연합작전으로 조조를 쳐서 형주 등을 빼앗자는 것.

그런가 하면, 얕은 꾀로 정국을 어지럽히고 제 몸까지 망친 밀사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明)-왜(倭)의 종전 협상을 중재했던 명의 낭인 출신 심유경(沈惟敬)이 대표적. 전쟁이 결말을 보지 못하고 질질 끌자 명과 왜가 조선을 배제한 채 협상에 나섰다. 신기삼영유격장군(神機三英遊擊將軍)이란 대외직명을 달고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만나 협상을 했던 그는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사기극을 벌인다.동오의 조정은 조조에게 굴복하자는 파와 맞서 싸우자는 파가 격론을 벌였는데 특사로 간 제갈량은 손권을 격동시켜 조조와 맞서 싸우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워낙 유명한 장면이므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제갈량은 “니들은 군사도 없이 남의 손으로 코 풀려는 게 아니냐”는 동오의 신하들과 잇단 논쟁을 벌여 현하지변(懸河之辯)으로 콧대를 꺾었다. 그리고는 결정타를 날린다. 조조가 동오를 멸한 다음, 주군인 손권의 아내와 동오의 실력자 주유의 아내인 이교(二喬)를 첩으로 데리고 살려고 한다고 전했던 것. 다분히 마타도어였지만 이에 분노한 손권은 조조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이후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조조의 군사를 적벽대전에서 대파했고 목숨만 겨우 살려 도망간 조조에게서 제갈량이 형주와 익주를 빼앗아 후일 유비가 촉한(蜀漢)을 세울 기틀을 세웠다는 대목은 <삼국지연의> 중에서도 압권이다.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된다면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겠다고 한다“는 가짜 보고를 하는 한편, 일본의 요구 조건인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을 삼는다’는 등의 내용을 본국에 보고도 않고 멋대로 수락한다. 결국 조작이 들통 나고 전쟁이 재발하자 황제를 속인 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현대에 들어와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밀사는 미국의 헨리 키신저일 터. 닉슨 정권의 소진, 장의라 할 그는 1971년 11월 중국에 밀행해 미·중 정상회담을 성공시켰다. 월남 전쟁 종전에도 막후 교섭에 나서 1973년 베트남 휴전협정을 성공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물론 베트남과의 휴전협정은 깨지고 결국 미국은 베트남에서 쫓겨났지만.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어쨌거나 키신저를 매개로 한 미-중의 수교 협상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1971년 7월 16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특별 성명을 통해 자신의 방중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발표했다. 까맣게 몰랐던 소련은 경악했다. 그 협상을 위해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베트남과의 종전 협상을 한다며 파리로 향하던 중 돌연 종적을 감췄다가 이틀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틀 간 그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를 만나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라는 세계사의 큰 전기를 만드는 데 합의했던 것.

 

3.

우리 역사에도 특사나 밀사로 적국에 파견된 사람이 많다. 고구려와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던 신라 눌지왕의 두 동생 미사흔과 복호를 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된 박제상이 대표적이다. 일본에 잡혀 갖은 악형을 당하면서도 충절을 지키다 죽은 건 잘 알려진 이야기. 서기 903년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단신 적진에 뛰어들어 담판한 서희도 빠트릴 수 없다. 고구려 옛 땅을 내놓으라는 적장 소손녕(蕭遜寧)의 억지를 세치 혀로 조목조목 깨트려 맨손으로 되돌려 보냈다. 고려시대의 ‘키신저’인 셈이다.

하지만 밀사로 갔다가 혼쭐난 사람도 있다.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다. 왕이 되기 전 백제 의자왕이 대야주(지금의 합천)을 침공해 딸과 사위를 죽이고 40성을 빼앗았을 때다. 복수를 맹세한 김춘추가 동맹을 맺으러 고구려로 잠입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그를 잡아 가두고 신라의 땅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김춘추가 연개소문의 총신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었더니 선도해가 구토담(龜兎談), 다시 말해 ‘별주부전’ 이야기를 해줬다. 무릎을 친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자신을 풀어주면 신라로 돌아가 땅을 베어 주겠노라 거짓말을 했던 것. 풀려나자마자 그는 용궁에서 풀려난 토끼마냥 다리야 날 살리라고 신라로 도망쳤다.

고종의 헤이그 밀사 3인. 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밀사란 말이 익숙해진 건 이른바 ‘헤이그 밀사’ 사건 때문일 터다. 고종황제가 1907년 7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로 일본 몰래 특사로 파견해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하려한 외교 활동 말이다.

 

4.

어쨌거나 남한의 역대 정권과 북한 사이에도 밀사가 숱하게 오갔다. 남북관계에 경천동지할만한 대변화도, 남북관계가 꽉 막혔을 때도 남북은 밀사를 주고받으며 숨통을 틔운 적이 많았다.

6·25 이후 최초의 밀사는 북이 남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해프닝은 비극으로 끝난다. 밀사가 간첩으로 몰려 비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거다. 박정희가 1961년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자 김일성이 먼저 움직였다. 밀사 황태성(黃泰成)을 비밀리에 서울로 잠입시킨 것. 190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황태성은 일제 강점기부터 좌익 운동을 했는데, 박정희가 어려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친형 박상희와는 절친한 친구였다. 박정희도 형의 친구인 황태성을 형보다 더 따랐다고 한다. 황태성은 박상희와 함께 ‘대구 10.1폭동’이라고도 하고, ‘대구 10월 항쟁’이라고도 하는 좌익 궐기의 핵심에서 활동했는데, 박상희는 당시 진압 경찰에 죽음을 당했고 황태성은 이후 월북했던 터다. 황태성은 북한 정권의 무역성 부상과 함께 노동당 중앙위원까지 지냈다.

박정희 역시 형의 영향으로 해방 이후 군문에 있으면서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적발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특무사령관 김창룡의 구명으로 군내 남로당 인맥을 죄다 수사기관에 불고 살아남았던 전력이 있었다. 그런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니 북한의 김일성이 뭔가 말이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해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황태성을 밀사로 보낸 거다.

이런 저런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황태성이 내려왔다는 보고를 받고 몹시 당혹해 했다고 한다. 미 CIA도 황태성이 서울에 잠입한 것을 파악했다고도 한다.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죽은 박상희의 사위인 김종필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김종필의 지시에 따라 황태성은 체포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황태성은 간첩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겨져 총살형에 처해졌다. 속전속결.

박정희로선 미국과 야당으로부터 ‘좌익 전력’을 의심받고 있을 때였던 만큼 황태성을 만났다간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거다. 그렇다고, 내각 부상까지 한 고위직에다 형의 친구였지 않은가. 김일성의 밀명을 받아 온 ‘밀사’를 간첩 혐의를 씌워 불문곡직 사형시킨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았다. ‘황태성 간첩 사건’의 전모는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남북한의 두 번째 밀사 교환은 1972년 5월 2일이었다. 이번엔 박정희가 선수를 쳤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평양에 보낸 것. 박정희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 나오면서 미국에 안보를 절대적으로 기대던 한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1971년 2월 미군의 주력 부대인 7사단 병력 2만 명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안보 위기가 현실이 됐다. 무리한 3선 개헌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야당의 공세가 거세진 때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이후락은 양복 주머니에 청산가리 캡슐을 지니고 평양으로 간다. 황태성 사건도 있었던 터라 만약 북한이 구금이라도 하면 자살하려던 것이었다고. 이후락은 후일 김일성과 만났을 때 김일성이 손을 내밀었을 때 손비닥에 붙은 청산가리 캡슐이 붙어 떨어지지 않아 바지 주머니에 손바닥을 비벼 캡슐을 떼 내고 김일성과 악수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어쨌든, 이후락은 남북관계 정상화에 대한 박정희의 복안을 김일성에게 전달했고 김일성이 이를 수락했다. 북한에선 박성철 제2부수상이 극비리에 서울로 와 5월 29일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그리고 나온 것이 ‘7·4 공동성명’이다. 남북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 간섭 없이 평화적으로 실현한다’ , ‘쌍방은 긴장 상태 완화, 군사적 충돌을 방지한다’ ,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등등에 합의했다. 이후락과 김영주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고, 남북적십자회담도 열렸다.

하지만 7.4남북공동선언이 나온 지 석 달 후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종신 독재의 문을 열었다. 남북회담을 자신의 독재의 발판으로 삼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끊임없이 나온 이유다. 김일성도 그해 12월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면서 1인 장기 집권의 틀을 완성했다. 결국 그 때의 남북 대화는 박정희-김일성의 장기 집권을 위한 ‘적대적 공생관계’의 다른 형식이 아니었느냐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7·4공동성명’은 그 이후 남북관계 설정의 표준이 되었고, 그 정신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전두환의 대북 밀사는 장세동-박철언 라인이 맡았다. 박철언은 노태우 전 대통령 때인 1988년에도 평양을 방문했다. 1989년 박철언이 노태우의 밀사로 평양에 체재했을 때 임수경이 밀입북해서 평양으로 들어왔다.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진 남한의 두 사람이 동시에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는 거다. 김영삼 정권 때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994년 평양을 방문해 남북 정상회담을 갖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김일성 주석에게 전달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날짜까지 정해진 상태에서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사진:구글 무료 이미지).

김대중 정권 때는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이 밀사 겸 특사 노릇을 맡아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성사시키는 데 한몫했다. 박지원 당시 문화부장관이 베이징에서 북한 인사를 만나 다리 노릇을 했다고도 한다. 노무현 정권 때는 김만복, 정동영 씨등이 활약했다. 남북 밀사의 만남은 이명박 정권 때도 있었다. 임태희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싱가포르에서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비밀리에 만나 정상회담을 교섭하기도 했다. 결국 결렬되긴 했지만. 그렇게 보면, 남북의 밀사 교환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셈이다.

 

5.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지금처럼 남북한 관계가 꽉 막힌 상태라면 나는 개인적으로 남북이 서로 허심탄회하게 만나서 서로의 입장을 털어놓고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단계에서 공식적인 회담이나 특사 교환이 부담이 된다면, 베이징이건, 어디건 제3국에서 책임 있는 양 당사자 대표가 비밀리에 만나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거다. 서로 간에 만난다는 사실을 비공개로 한다면 만나는 게 큰 부담이 되지도 않을 거고, 설사 합의가 안 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일부 남북 전문가들도 대북 특사의 파견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정부 당국자끼리 만나는 게 정 부담스럽다면 남북 사정에 정통한 민간인 전문가를 메신저로 내세워서 안 될 일도 없다.

다만, 문재인 정부가 명심해야 할 일은 있다. 현 단계에서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목을 매고 있지 않다는 것. 북한이 지금 핵실험을 하고 ICBM을 펑펑 쏘는 건 미국과 한 건 하려는 게 목적이다. 미국과 협상을 거쳐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체제 보장, 경제 지원 등을 패키지로 받아내려는 거다. 미국과의 협상이 성사된다면, 한국은 절로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고, 그 때 한꺼번에 청구서를 내겠다는 게 북한의 심산일 거다. 지금 북한 경제도 ‘고난의 행군’ 때와는 달리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어 남한에게 급하게 손 벌릴 일도 없다고 한다.

북한이 만약 지금 단계에서 남북대화에 응한다면, 그건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합의한 ‘6·15 선언’ 과 ‘10·4 선언’의 이행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일 거다. 전에 했던 약속부터 지켜라, 그래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특사가 됐던, 밀사가 됐건 문재인 정부는 뭔가 북한의 구미를 끌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가야 할 테지만, 그 역시 함부로 끌러 보이기는 쉽지 않을 거다.

어차피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받아내려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겠다. 줄 건 주더라도 손익 계산은 꼼꼼히 해야 할 거다. 꽉 막힌 남북 경색 국면을 타개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이제부터 ‘신의 지혜’가 필요하다. 글쎄,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고, 닉슨에겐 키신저가 있었다면, 문재인에겐 과연 누가 있을까. 자못 궁금한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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