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호 박사의 그리운 대한민국] 남한산성 북문과 수어장대에 올라 병자호란 때 문약했던 조선을 반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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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호 박사의 그리운 대한민국] 남한산성 북문과 수어장대에 올라 병자호란 때 문약했던 조선을 반성하다
  • 장원호
  • 승인 2020.08.1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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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이 보여준 조선의 문약함에 분노를 느끼며
남한산성 북문과 수어장대 등산길을 걸으며 병자호란의 수모를 생각하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망루 앞에서 선 필자(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남한산성 수어장대 망루 앞에서 선 필자(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서울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남한산성> 영화를 보면서 이번 한국 여행 중에는 남한산성을 꼭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18년 4월 8일 일요일에 동생 원식이 차로 원흥이와 함께 드디어 남한산성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머물던 분당이나 수원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우리 역사 유적을 이제야 처음 간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나는 나의 조국을 너무 몰랐다고 혼자 싱겁게 웃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산성이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이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됐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간 항전했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백제의 첫수도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 인조와 숙종 때 옛성 주위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 날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됐다는 기록이 있다.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서 산책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서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이제 남한산성은 청량산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코스는 크게 다섯가지로 나뉘지만 구간구간 샛길이 많아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적당한 코스를 선택해 걸을 수 있다. 우리는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북문에 이르는 2.8km 구간을 걸었다. 이 길은 약 9000보 정도의 등산로로 수어장대 등 잘 보존된 각종 건물과 성문을 보면서 걸으니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많은 방문객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도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길이어서, 가족이 함께 등산로 주변에 있는 피크닉 자리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화재 위험으로 취사를 못하도록 되어 있어서 비교적 주변이 깨끗했다.

남한산성에는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골프장에서 보는 개량종 소나무보다 정겹게 느껴졌다. 등산을 시작하자 바로 보이는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 상사창동(上司倉洞)으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지방에서 배로 옮긴 세곡(조세로 걷은 곡식)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인 북문(전승문) 앞에선 필자(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인 북문(전승문) 앞에선 필자(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꽃샘추위인지 날씨가 춥고 바람까지 불어 우리 일행은 걸음을 재촉하여 이 산성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수어장대로 갔다. 이 산성의 대표 건물인 수어장대는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했으며, 주위를 난간으로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다. 한쪽에는 계단이 있어서 2층을 오를 수 있으며, 2층 주위는 문이 있어 열고 닫게 되어 있다. 지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붕 형태인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남한산성의 주요 건물 중 하나인 수어장대. 망루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남한산성의 주요 건물 중 하나인 수어장대. 망루 역할을 했다고 한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수어장대에서 조금 내려오니 등산길 왼쪽에 행궁이 있다. 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었다. 남한산성의 행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9년부터 한국토지공사 박물관에 의해서 시행됐다고 한다. 2007년까지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신라시대 대형 건물터가 발견됐다. 지금도 발굴과 내부 수리가 진행되고 있어서 일반인은 못 들어간다. 우리는 행궁을 멀리서 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주차장 옆에 한옥으로 잘 지은 아라리오 식당으로 갔다.

그 식당은 오리고기를 양념에 무친 주물럭을 철판에 구워주는 메뉴로 유명한 집이었다. 우리는 그 식당에서 오리고기 주물럭으로 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나왔다. 밖에는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니 하루가 종일 걸린 등산여행이었다.

돌아 오는 길, 차 속에서 다시 <남한산성> 영회를 생각하면서 우리 역사를 떠올렸다. 조선 왕조는 무인 이성계가 세운 나라였다. 3대 태종 이방원을 마지막으로 역대 왕들은 하나도 무인이 없었다. 오히려 왕이나 왕 주변 신하들은 중국문화인 어려운 한문과 유교에 억메인 문약한 왕조였다.

인조가 그렇게 추악한 수모를 당하고 나서도, 조선은 무인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 판도를 만들지 못했다. 병자호란을 겪은 다음, 조선이 무인을 중용하고 무력을 키웠다면, 연속되는 왜구의 침략에 그렇게 참혹하게 나라가 망하는 화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교로 이룩한 조선왕조 문화는 세종대왕의 한글 등 세계 문화사에 내 놓을 만한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세계의 실용적 문화나 산업을 일찍부터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서구에 문호를 먼저 개방하고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 일본에 나라를 넘겨준 사실을 생각하면 분노가 터져서 못 견디겠다. 남한산성에는 우리의 가슴 속에 맺친 한의 그림자가 보인다.

가을에는 남한산성 문화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2018년 문화제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지 4주년을 경축하는 자리였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가을에는 남한산성 문화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2018년 문화제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지 4주년을 경축하는 자리였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그해 가을, 물 맑고 공기 좋은 팔당호 청정지역 광주시 남한산성에서는 제23회 광주 남한산성 문화제가 10월 12일에서 10월 14일까지 3일간 열렸다. 특히 2018년은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4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나는 남한산성 문화제를 보고 싶어서 2018년 4월에 이어 이곳을 다시 찾았다. 먼젓번 갈 때는 동생이 모는 차로 갔는데, 축제 기간에는 차가 몰린다는 말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갔다. 잠실 역에서 8호선을 타고 산성역에 내려 축제장으로 가는 9번 버스를 타니 금방이었다. 조선시대 관복을 입고 단상에 오른 광주시장이 주관하는 이 축제에서 조선시대 의상을 입고 악기와 북을 치는 의장대를 비롯하여 온갖 연예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젊은이들을 위한 춤과 노래가 이어져서 우리 일행은 등산로로 가서 3km 정도를 걸은 후 전에 갔던 식당에 다시 가서 막걸리와 오리구이를 푸짐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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