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주 ‘막말 종결자’와 최 부자집 ‘노블리스 오블리제’
상태바
이언주 ‘막말 종결자’와 최 부자집 ‘노블리스 오블리제’
  • 논설주간 강성보
  • 승인 2017.07.11 17: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논설주간 강성보
논설주간 강성보

공중파 방송이 공정성을 잃었다는 세간의 인식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뉴스를 주로 종편을 통해 소비한다. 한 유력 정치인은 종편의 편집 방향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종편을 ‘종일 편파 방송’의 준말이라 힐난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반대다. jtvc, MBN, 채널A, TV조선 모두 조중동, 매경 등 보수신문에 뿌리를 둔 종합 편성 방송임에도 비(非)보수적 편집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촛불혁명의 막을 열었고 박근혜 정권 퇴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러가지 특종 기사도 대부분 이들 종편에서 나왔다.

내가 사는 동네의 종편 채널은 15, 16, 18, 19번이다. 시간이 나면 주로 TV 앞에 앉아 리모콘으로 이 채널들을 서핑하면서 뉴스나 시사 해설, 토론 프로를 본다. 이 종편들 중간에 위치한 17번 tvN은 서핑 도중 어쩔 수 없이 거쳐지나가는 예능 채널이다. 예능은 그다지 큰 흥미가 없지만 때때로 이 채널에는 시선을 잡아끄는 프로가 있다. 최근 새로 론칭된 <알쓸신잡>이 그중 하나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준말이란다. 작가 유시민, 과학자 정재승, 작곡가 유희열,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소설가 김영하 등이 지방을 함께 여행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잡지식을 ‘썰’로 풀어내는 수다 한마당이다. 필자 역시 평소 ‘돈 안되는 잡지식’ 수집 취미를 갖고 있는 터라 별일 없는 한 금요일 저녁에는 tvN에 채널을 고정한다.

얼마전 이 <알쓸신잡> 경주 편에서 경주 최씨 중시조 최진립(崔震立*1568~1636)장군이 소개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25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동생 최계종과 함께 경주 일대에 침입한 왜군을 화공으로 물리쳤고, 몇 년 뒤 정유재란에서는 권율 장군을 도와 서생포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또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는 환갑을 훨씬 넘긴 노령이었지만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포위당해 고초를 겪고 있는데 늙은 신하가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라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솔하의 하인들 몇몇을 이끌고 출정, 그해 12월 27일 지금의 용인 인근 험천 전투에서 청나라 철기군의 화살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알쓸신잡> 수다를 통해 유시민 작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에 참전한 몇 안 되는 장수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최진립 장군 스토리가 주목을 끈 것은 그의 열혈 애국적 활약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철저한 신분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최 장군과 그의 후손들이 보통 사람들, 노비에게까지 드러낸 따뜻한 인간애 얘기가 담겨져 있어서였다.

유시민 작가에 따르면, 최 장군은 용인 험천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 여정을 같이 한 노비 ‘옥동’과 ‘기별’에게 “너희는 떠나라. 난 여기서 싸우다 죽을 터이니 가족들에게 그렇게 알려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비들은 “주인이 충신의 길을 가는데 어찌 충노가 그 뒤를 따르지 않겠는가”라며 함께 전사했다.

얘기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은 '충노불망비'를 세워 옥동과 기별의 충정을 기리고 매년 최 장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이들 충노들에 대한 추모제를 별도로 지내고 다들 엎드려 절한다고 한다. 지난 35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들 노비에 대한 제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찌 양반이 종놈들 영전에 머리를 숙이냐”는 주변의 힐난을 무릅쓰고 고집스럽게 지켜온 최 부자집 가문의 인도주의 전통. 이것이 방송을 보면서 ‘심쿵’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국민의 당 이언주 의원의 막말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는 형국이다. 기자와 전화 인터뷰에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를 “그냥 밥하는 아줌마”, “나쁜 사람들”, “미친 놈들”이라 몰아부쳐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지난해 한 교육부 고위 공무원의 “국민은 개돼지” 발언과 맞먹는 ‘막말 종결자’이다. 그의 사고 구조 속에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비천한 아줌마’일 뿐이다. 함께 공동체를 운영해나갈 파트너가 아닌 것이다. 그는 아마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계급의식에 젖어 있을 지도 모른다. 노비에게도 경의를 표할 줄 아는 경주 최씨 최 부자집의 인도주의 전통은 그에게 콧방귀의 대상일 뿐이다.

최진립 장군이 중흥한 경주 최씨 정무공파(貞武公派) 가문은 경주 사람들이 어디 외출할 때 반드시 그 집안 땅을 밟고 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른바 최 부자집이다. 조선시대 왕족을 제외하면 아마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가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오늘날 일부 재벌이나 갑질 졸부들처럼 돈만 아는 부자들이 아니었다.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당한 투자와 기술 개발, 적정한 이윤을 추구해가며 돈을 벌었고, 가난한 자를 위한 구휼 사업도 남다르게 했다.

최 부자집 가훈 중 유명한 것 몇가지를 추려보면-.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 없게하라.” 이 가훈에 따라 최 부자집은 흉년이 들면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나눠줬다.

“만석 이상 하지 마라.” 소작료를 만석으로 고정, 과다한 부의 축적을 경계했다. 이 지침에 따라 최 부자집 땅이 늘면 늘수록 소작료가 낮아져 소작인들은 최 부자집 토지가 확대되는 것을 환영했다.

“흉년에 땅을 사지마라.” 흉년이 들면 소작인들이 땅문서를 잡혀 곡식을 빌어먹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소작인들은 노비로 전락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웃이 편해야 내가 편하다는 조선시대 선비, 양반의 공동선(共同善) 의식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최 부자집 며느리는 시집온 뒤 3년 동안은 무명 옷만 입을 수 있다고 한다. 만석군 며느리도 보통 사람의 고단한 삶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하도 많이 덧대고 기워 입어서 3년 며느리 치마 한 벌을 솥에 넣어 삶으면 서말치 가마솥이 가득할 정도였다”는 전언도 남아있다.

최진립 장군의 정신을 본받아 최 부자집 후손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의무)를 몸으로 실천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은 것을 한탄한 나머지 11대 최 부자 최현식과 그의 아들 최현은 매일 서울이 있는 북쪽을 행해 곡을 했으며 최준은 백산 안희제와 손을 잡고 상해 임시정부에 일제 몰래 자금을 댔다. 최준의 두 동생 최염과 최완도 독립 운동을 벌였으며 1920년 상해 임정 수립에 직접 참가한 최완은 35세 나이로 일제의 고문을 받아 순국하기도 했다.

해방 후 최 부자집은 남겨진 전 재산을 털어 영남대학의 전신 대구대학을 설립해 육영사업에 몰두했으나 박정희 군사 쿠데타 직후 군사 정권에 소유권을 빼앗긴다. 영남대학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한 축으로, 지금도 여러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으며 소유권을 둘러싼 진통도 계속되고 있다.

1970년 87세 나이로 별세한 최 부자집 장손 최준은 “해방됐으니 일경 감시도 없고, 전재산 희사했으니 도둑들 일도 없다. 대문을 활짝 열어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또 그의 후손은 “만석꾼이란 말 보다 연금 25만 원을 받는 독립 유공자 후손임이 자랑스럽다”고 피력한 바 있다.

조금만 힘이 있고 가진 게 있으면 자기보다 약하고 조금 덜 가진 사람에게 마구잡이 갑질을 해대는 요즘 세대-. 자신의 생명과 가진 모든 것을 나라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바쳤던 최부자집 가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유난히 빛을 발하는 오늘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