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범 칼럼] 6․25 전몰장병의 귀환, 카투사와 ‘당나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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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 6․25 전몰장병의 귀환, 카투사와 ‘당나라 군대’
  • CIVIC뉴스 칼럼니스트 차용범
  • 승인 2023.08.21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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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전몰장병 유해 7위(位)가 미국에서 고국으로 귀환했다. 1950년 12월 북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고(故) 최임락 일병 등이다. 최 일병은 전쟁 초기 부산에서 자원입대, 미 육군에 배속받은 한국군이다.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미군 동료들의 유해와 함께 미국 국립묘지에 머물다 귀환했다. 한국군이 미군에 배속받아 전투에 참전했다? 그렇다. 그는 ‘카투사’였다.

최근 미국에서 귀환한 국군 전사자 유해가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 수송기 시그너스(KC-330)에서 내려지고 있다(사진: 대통령실).
최근 미국에서 귀환한 국군 전사자 유해가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 수송기 시그너스(KC-330)에서 내려지고 있다(사진: 대통령실).

카투사(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KATUSA). ‘미국 육군에 배속된 한국군’, 곧 주한미군에 파견 근무하는 한국군이다. 미국의 세계 파병사 중 해당 국가 병사가 미군 지휘체계에서 근무하는 예는 더는 없다. 미군에서 한·미 연합 임무를 수행하는 한국군, 카투사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다. 6‧25전쟁과 함께 출범, 숱한 전장에서 미군과 생사를 함께한 한미 혈맹(血盟)의 상징이다.

우리는 왜 그들을 기억하는가. 8월 15일은 카투사 출범 73주년이다. 휴전 70주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계기로 그들을 기억해야 할 바도 적지 않다. 6‧25전쟁기 징집당한 카투사 43,660명 중 11,365명이 전사했다. 미국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에는 그 전쟁의 전몰 미군과 카투사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부산 UN기념공원에도 유엔군과 함께, 카투사 전몰자가 영면하고 있다.

카투사는 현역 입영 대상자의 선호도가 높다. 미군 체제의 합리적 운영방식에, 더러 ‘편한 군대’라는 인식도 있기 때문이다. 그 카투사가 ‘당나라 군대’(군기가 엉망인 막장 군대) 정도로 폄하 당한 적이 있다. 2020년 9월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휴가 미복귀 의혹’ 사건 때다. 카투사는 휴가 및 외출․외박을 ‘마음대로’ 간다, 카투사 행정은 그 휴가 기록조차 없을 만큼 엉성하다…. 그 의혹은 3년 만에, 검찰의 재수사를 받고 있다.

카투사는 체계와 규율이 없는, 그저 그런 '당나라 군대'가 아니다. 카투사라고 해서 그저 편한 군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소속 부대와 병과, 보직에 따라 한국 육군보다 더 험한 훈련과 일상을 감내하는 예도 적지 않다. 군대가 편하다 한들 얼마나 편할 것인가. 군대는 원래 통제사회인 것을. 이 글은 6‧25 전몰 카투사의 귀환과 권력자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 재수사를 계기로, 카투사의 존재와 명예를 새삼 살피는 한 예비역의 변론(辯論)일 수 있다.


1. 카투사 제도가 출범한 것은 1950년 8월 15일, 6‧25전쟁 발발 50일 만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의 구두 합의에 따른 것이다. 지금도 미 육군규정(AR) 제600-2조는 카투사의 지위(동등 대우)와 복지 관련 사항을 명시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법에 따르는 설치-운영 근거는 없다.

카투사는 미군의 우수한 무기 및 전투력과 한국군의 지리‧풍습‧언어적 지식을 조화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탄생했다. 1950년 8월 16일 장병 313명을 카투사로 징집, 일본에서 훈련을 시행했다. 8월 24일까지 카투사 8,625명을 미 2사단, 7사단, 24사단, 25사단 등에 배치했다. 카투사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부터다.

카투사는 6‧25전쟁 발발 50일 만에 출범,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 뒤 인천상륙작전부터 전쟁에 참전했다(사진; 위키백과).
카투사는 6‧25전쟁 발발 50일 만에 출범,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 뒤 인천상륙작전부터 전쟁에 참전했다(사진; 위키백과).

카투사는 한국 육군에서만 파견한다. 카투사의 인사권과 급여 등은 한국군에서 관리한다. 징계‧처벌 또한 한국군의 권한이다. 미군과 카투사의 동등 처우는 중요한 조건이다. 카투사의 모병은 한국 병무청이 위임받아 시행한다. 카투사 정원은? 한때는 10,000명으로 제한하려는 한국군과 28,000명으로 확대하려는 미군의 신경전이 있기도 했다. 작전환경 변화에 따라 축소를 거듭, 내년(2024년도) 모집인원은 1,762명이다.

미군과 카투사는 ‘동등 처우’ 규정에 따라, 같은 군복·장비·숙식에, 같은 근무를 수행하는 한미혈맹의 상징이다.한다. 카투사가 미군 및 카투사 장병의 헌병근무 태세를 점검하며 근무조를 지휘하고 있다(사진: 글쓴이).
미군과 카투사는 ‘동등 처우’ 규정에 따라, 같은 군복·장비·숙식에, 같은 근무를 수행하는 한미혈맹의 상징이다. 카투사가 미군 및 카투사 장병의 헌병근무 태세를 점검하며 근무조를 지휘하고 있다(사진: 글쓴이).

카투사에 대한 미군의 평가는, 아주 좋다. 미 합참의장-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은 자서전 ‘나의 미국 여행’에서 “한국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을 때가 군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며 “카투사는 내가 지휘한 군인 중 가장 훌륭한 군인에 속한다”고 했다. 주한 미군과 카투사, 한미연합사 소속으로 근무한 한미 장병은 주한미군전우회(KDVA, 회장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를 결성, 한미동맹 강화 차원의 활동을 펴고 있다.


2. 지난 7월 귀환한 유해 7구는 6·25전쟁 때 미군이 수습하거나, 이후 미군이 발굴, 또는 북한이 발굴하여 미국으로 보낸 유해 등이다. 미국은 하와이의 태평양 국립묘지에 안장했던 6·25 전사자 무명용사 묘역을 다시 확인, 국군 전사자를 가려냈다. 최임락 일병, 그는 1950년 8월 입대, 카투사로 전장을 누비다 그해 12월 12일 그 전쟁 최악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귀환, 전사 73년 만이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미국 합동 전쟁포로․실종자 확인사령부(JPAC)의 모토다. 사령부 소속 대원과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원은 오늘도 그 모토 아래, 옛 전장 곳곳에서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부대가 휘장에 새긴 문구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 전몰자의 유해 찾기에서 신원 확인까지, 미국이 쏟는 의지와 열정을 보면, 그들은 국가‧사회를 위한 헌신, 특히 ‘군인’을 존경하며 스스로 강해지는 나라다.

미 JPAC 장병들이 부대의 모토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를 새긴 깃발 아래 전몰장병 발굴작업에 한창이다(구글이미지).
미 JPAC 장병들이 부대의 모토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를 새긴 깃발 아래 전몰장병 발굴작업에 한창이다(구글이미지).

사례 하나. 미 국방부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국(DPAA)은 2015년 6월 하와이 국립묘지에서 신원 미상의 유해 더미 46곳을 파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때 침몰한 군함 오클라호마함 승조원의 유골더미다. DPAA는 최신 유전자 감식기법으로 유족들의 DNA를 일일이 대조,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오클라호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DPAA는 6년 동안 전사자 396명의 신원을 찾아 귀향시켰지만, 33명은 끝내 가족을 찾지 못했다. 해군은 2021년 12월 7일, ‘최종 실종자’ 33인을 본토에서 호놀룰루 국립묘지로 다시 옮겨 안장했다. 80년을 기다리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장병들의 ‘슬픈 귀환’이다. 카투사 최임락 일병 역시 전몰자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는 DPAA의 노력 끝에 귀환했다.


3.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휴가 미복귀 의혹’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의혹, 정치권에서 “병역문제=국민의 역린”이라고 말할 만큼의 ‘불공정’ 문제, 검찰수사 역시 편파수사 의혹까지 일 만큼의 ‘정의’ 문제로 들끓었던 사례다. 특히 사안을 둘러싼 정파적 대립이었던가, 추미애 혹은 그 아들을 감싸려는 의도에서, 카투사의 명예며 군의 체계를 폄헤하는 글들은, 너절했다.

글쓴이는 당시, 논란을 짚은 글을 정리한 적이 있다. ‘카투사, 그저 그런 '당나라군대' 아니다!; 추미애 아들 ‘특혜병가’ 의혹에 붙여‘라는 제목이다. 카투사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의 ‘진실찾기’에 촉구한 글이다.

*사건의 팩트는 단순하다. 휴가사병이 귀대시간까지 귀대하지 않았다⇨당직사병이 휴가사병에게 전화를 걸어 귀대를 요구했다. 휴가사병은 휴가 연장을 요구했고, 당직사병은 ‘연장 불가’ 대답했다⇨추미애의 보좌관이 부대에 전화를 걸어 ‘휴가 연장’을 문의(요청)했다⇨당직사병이 휴가사병을 미복귀(탈영) 처리하려 할 때, 상급부대 대위가 찾아와 “탈영 아닌 휴가로 처리하라“고 했다….

*의혹을 둘러싼 국민적 관심은 크다. 특히 이 나라의 ‘공정’과 ‘정의’를 다루는 법무장관 관련 일탈 의혹 아닌가. 사안을 보는 시각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추미애 아들 서 일병의 총 23일 휴가 중 병가 19일간의 근거 기록·자료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 야당 주장이 있다. 권력의 개입으로 병역의 형평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사안을 그저 ‘행정절차상 오류·누락’ 정도로 보는 주장(국방장관 등)이 있다. 이 주장과 관련, “추미애·정경두 두 장관의 해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직설적 반박도 있다. “군의 행정업무 체계가 얼마나 철저한데 그런 얘길 하느냐:는, 서 일병 근무부대 지원대장 출신 중령의 공개적 반박이다.

*‘카투사 예비역’과 언론의 침전도 치열하다. ‘어느 카투사 예비역의 고백’, 한 전역자의 페북 글에 바탕한 기사다. 그 예비역은 기억했다, “선임병장 시절 인사계를 보았다. 카투사는 미군에 편입된 한국군이기 때문에, 인사계 한 명이 카투사의 휴가·승진 등의 사무를 본다. 그래서 그 기록이나 절차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4. 글쓴이는 카투사로 복무했다. 논산훈련소 차출 사례다. 부대에서 미군 편제상 ‘작전하사관’ 직책을 수행했다. 미군 지휘체계 속에서 카투사의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보직이다. “어느 카투사 예비역의 고백…’ 기사를 읽고, 나름의 항변을 할 수 있는 이유다. 카투사의 진급·휴가며 보직 부여를 입안·집행하는 일, 글쓴이는 그 일을 장기간 '고정 보직'으로 맡았다.

이 일(휴가 업무)에 기록이나 절차가 남아 있을 리 없다? 아니, 복무 중인 사병에게 보직-진급-휴가는 얼마나 중요한가? 그 인사 업무에 절차나 기록이 없다? 글쓴이가 한 예비역의 기억에 ‘당나라 군대’냐고 묻는 이유, 이 부분이다. 카투사, 그 군대가 그렇게 ‘군기가 취약한 오합지졸’이란 말인가? 확실히 말한다,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고-.

진급이나 휴가는 그저, 근거 없이 시행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하지 않나. 진급·휴가는 자체 규정에 따라 기안, 한국 육군의 인사명령을 따라 시행한다. 카투사는 ‘한국 육군’ 아닌가. 휴가를 갔다가 휴가 연장을 꿈꾸거나, 휴가 연장을 위해 '빽'을 동원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휴가 관련서류를 보존하지 않는다? 그건, 무슨 말인지 짐작도 못할 일이고.


그 ‘휴가 특혜’ 의혹은 검찰의 재수사 결과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카투사가 정녕 ‘당나라 군대’인지 역시, 수사 결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란 어차피 전쟁에 대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특수집단이다. 엄정한 군기는 기본이고, 명령·복종 체제도 확실해야 한다. 할 말은 뚜렷하다. 어떤 목적으로든, 군대의 존재이유를 의심하게 하는, 군인의 존재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그런 악습은 떨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6·25전쟁이 멈춘 지 70년,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은 때론 화해 분위기에 젖기도 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지대다. 휴전 이후 남북은 판문점 도끼 만행, 서해교전, 천안함 폭침 등으로 충돌, 그 과정에서 한국군 4.268명과 미군 92명 등 모두 4,360명이 전사했다. 그 날카로운 대치 상황에서, 카투사 역시 오늘도 한미 연합방위 업무에 바쁘다. 군은 기개와 자존심, 사기(士氣)를 먹고 산다고들 한다. 카투사도 늘 기개와 자존심을 지탱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미군 및 한국군 8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다(사진: 위키백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미군 및 한국군 8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다(사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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