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여사가 있었다면? ‘신입사관 구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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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여사가 있었다면? ‘신입사관 구해령’
  • 부산시 부산진구 정희정
  • 승인 2019.12.2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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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신입사관 구해령 포스터(사진: MBC 신입사관 구해령 홈페이지).
MBC 신입사관 구해령 포스터(사진: MBC).

조선시대에 여자 사관, 여사가 있었다면? 실제 중종 14년 4월 22일 동지사 김안국이 여사를 두어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중종은 이를 거절했다. 사관 위에는 오직 하늘만이 있다고 전해질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사관은 오직 남자들에게만 허락된 직책이었다. 그날 중종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올해 9월 막을 내린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은 제목 그대로 여사 별시를 치르고 예문관 권지가 된 해령의 이야기를 그렸다.

조선 최초의 여사 해령은 양반집 규수로 태어났지만 신부수업을 박차고 나와 혼인을 거부하고 제 발로 궁으로 들어가 여사가 된다.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연애 소설에는 관심조차 없는 조선시대의 보기 드문 여성이다. 한편 그 시대 최고의 연애소설 작가 매화가 바로 여사 해령이 궁 안에서 마주해야 하는 이림 도원대군이다. 얼핏 보면 해령과 이림의 시시콜콜한 로맨스 드라마로 보이지만 드라마 속 사건들은 국가적 재난, 임금의 실정 등 시의적절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우두종법 시행이다. 어명을 받고 역병이 돈다는 평안도에 위무사로 나선 이림과 해령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 마주한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해령은 이림에게 우두종서를 건네며 우두법을 시행하자고 했지만 서양 의술은 믿을 수 없다며 거부한다. 하지만 결국 고민 끝에 사람의 목숨을 하늘에 맡기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한 이림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직접 우두법을 접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민봉교가 해령에게 한 말 때문이다. 민봉교는 해령이 우두종서를 전해주어 이림의 판단을 바꾼 행동에 대해 “사관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듣는 사람이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넌 네 입맛대로 역사를 쓰는 소설가에 불과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저 우두종법이 시행되어 다행이라고 판단한 나에게 사관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다시 한번 그 무게를 깨닫게 해준 대사였다.

20년 전 폐주 희영군 이겸이 죽고 이림이 태어나던 경오년, 현왕 함영군 이태와 좌의정 민익평이 역모를 일으켰다. 이 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림은 함영군 이태의 즉위 20년 연회에서 자신이 희영군 이겸의 아들임을 밝혔고 해령은 이 사실을 사책에 빠짐없이 모두 기록했다. 분노한 이태가 사필을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저를 베어도 사필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게 진실의 힘입니다”라고 말하며 사관들은 목소리를 높였고 그들의 힘을 보여주었다.

신입사관 구해령의 엔딩은 그동안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차별화된 엔딩이었다. 해령은 사관으로서 도리를 지켜나가며 행복을 느끼고 이림은 궁에서 나와 작가로서 새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해령과 이림은 둘만의 행복한 연애를 즐기면서도 혼인은 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이를 ‘조선판 자유연애’라고 이야기하며 최상의 결말을 보여준 조선판 커리어 우먼 로맨스라고 말했다.

*편집자주: 위 글은 독자투고입니다. 글의 내용 일부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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