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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무질서하고 열악한 군대의 추억, 그리고 학업과 군복무 병행의 아슬아슬했던 기억들[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 장원호 박사
  • 미주리대학교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11.1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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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부터 추운 날씨의 8주 논산 훈련소 교육 훈련은 힘들었지만, 모두 대학생들로 된 소대이고 보니 마치 훈련 캠프 온 듯이 재미도 있었습니다. 당시 훈련소 면회장은 훈련소에서 2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가족이 면회를 온 사람은 가족이 못 오는 동료들을 불러내었고, 또 면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많은 음식을 부대로 가지고 돌아 와서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은 항상 파티였습니다.

훈련병들은 밤이면 불침번을 서야 하는데 추운 겨울이고 보니 돌아가면서 석탄 난로를 잘 피우는 임무가 함께 주어져 있었습니다. 만약 불을 꺼트리면 큰 난리가 났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가 즐거웠던 훈련소 시절이어서, 나는 군을 마친 후에도 그 근처를 지날 때 한두 번 논산훈련소를 일부러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2013년 육군 훈련병들의 모습. 1950년대의 군복, 군화, 무기 등은 이런 모습과는 전혀 달르게 열악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논산 훈련소 교육을 마친 후, 일반 군인들은 특수학교나 보충대로 배치되고, 우리 학보병은 훈련소 졸업과 동시에 소속이 정해져서 바로 기차를 타고 용산-청량리 역을 거쳐서 경기도 연천 역으로 갔습니다.

전방으로 가는 군용열차는 대개는 논산을 밤늦게 출발하여 서울 용산 역에는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철도 교통이 전혀 막히지 않던 때인데도 군 이동은 대략 밤에 했나 봅니다. 용산 역에 내린 군인들은 인원을 확인한 후 각자 해산해서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 때 다시 청량리 역으로 집결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1월 하순, 각 대학이 방학 기간이어서 친구들은 지방 자기 집으로 내려 가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이 없었지만, 나는 숭인동 장경숙 누나 집으로 가서 우선 돈을 빌려 가지고 동대문 시장으로 가서 군복을 사서 갈아 입었습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군인들을 전방으로 보낼 때 우리에게 입혀 보낸 군복은 전혀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방한화도 맞지 않았고, 중공군이나 입었던 누비옷을 군복이라고 입혀 보냈기 때문에, 동대문 시장에서 자기 몸에 맞는 군복으로 바꾸어 입는 것이 당시에는 상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난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나라 사정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듯합니다. 비록 계급장도 없고 소속 부대 표시도 없는 군복이었지만, 그래도 몸에는 맞는 군복을 사서 입고 나는 서울시내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찾을 사람도 마땅이 없었지만, 몸이 고단해서 나는 다시 숭인동 장경숙 누나 댁으로 돌아와 낮잠을 자고 청량리역 집합 장소로 일찌감치 갔습니다.

나는 8사단 10연대 소속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우리와 함께 간 사람은 채왕근, 박해용, 유필조, 그리고 강신옥이었습니다.  훈련소에 있을 때 고시에 합격한 강신옥은 사단에 근무했고, 글씨 잘 쓰는 유필조는 사단 인사부에, 그리고 박해용, 채왕근과 함께 나는 10연대로 갔습니다.

나는 10연대 1대대로 가서 대대본부 작전교육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채왕근은 연대 인사계에서 휴가증 담당 계원이 되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박해용은 군특무대에 근무하여 비교적 편한 군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정확히 지형을 알 수 없지만, 1959년 초 8사단 10연대는 남방 경계선 밑의 487, 488 고지를 담당해서 마령산에 주둔한 인민군 37 사단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한탄강 언덕 옆에 자리 잡은 우리 대대본부는 8사단 중 교육 연대여서 전방 초소 근무는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힘든 교육을 수시로 받아야 했습니다.

대대본부 G-3 작전 교육계에는 조 중위라는 분이 작전 장교였고, 그 밑에 중사 한 사람, 그리고 사병 2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내가 미 1군단에서 나오는 작전 계획서 영문을 번역해서 처리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미군 문서를 취급한다고 해서 나는 2급 비밀 취급인가를 받았고, 영문 서류만 오면 모두 내 담당이었습니다. 미 1군단에서 지휘 감독하는 교육 계획과 수시로 나타나는 KMAG 미고문단 교육 검열이 있을 때마다, 부대에서는 나를 영어 통역으로 내세웠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해서 대학생 군인이라고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부대의 분위기는 대개 시기하는 마음이 강해서 눈치 속에서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1959년 자유당 말기 군대는 엉망이었습니다. 전방에 근무하는 사병들은 중학교 다닌 사람도 드물었고 집안이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좀 똑똑하고 집안이 괜찮은 사병들은 후방부대로 빠져 나갔고, 이곳까지 온 장교들도 별로 배경이 없는 보병학교 출신이라 육사출신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부식으로 동태나 돼지고기가 나오도록 되어 있는데, 군 생활 내내 동태는 구경도 못했고, 돼지고기조차 비계만 몇 개 둥둥 뜨는 소금국으로 배식되었습니다. 주보(酒保, 군 매점을 과거에는 일본식 용어인 주보라 했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대본부에 근무하다보니 우리의 주보 음식 값은 월급의 수십 배가 들어서 매월 집에 가서 주보 값을 가져 오라고 휴가를 줄 정도였습니다. 

1등병 월급은 200원 가량으로 '아리랑' 담배 하나를 사면 몇 푼 남는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조금씩 떼면 큰 돈이 되는지 상부에서 떼는 돈이 많아서 사병인 우리는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후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각 부대마다 많은 병사들을 휴가 보내서 필요한 물자나 돈을 구해오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휴가 간 병사들이 많아서 군대 내 쌀이 남아 간부들이 횡령하는 등의 비리가 성행했습니다. 아무튼 그덕에 나는 서울 출장 휴가를 많이 가게됐습니다.

군의 후생사업의 문제를 보도한 1960년의 신문 기사(사진: 동아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청량리 역으로 가는 기차를 연천이나 전곡 역에서 타면, 헌병들이 졸병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대 부근에 고려대학교 교복을 갖다 놓고 휴가 때는 그 교복을 입고 책을 옆에 끼고 가면 헌병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런 휴가 제도가 있는 것을 알고 3학년 1학기 등록을 했고, 틈만 있으면 서울에 나가서 강의도 듣고 시험도 치르면서 군에 있으면서 3학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부대에서는 오히려 휴가가기를 권장했지만, FTX 같은 무슨 훈련 명령이 떨어지면 휴가가 정지되기 때문에 시험기간에 이런 일이 있으면 참으로 낭패스러웠습니다. 그럭저럭 이런 생활을 4학년 초까지 계속했습니다. 1960년 4월에 제대를 하고 나머지 학기를 마친 나는 1961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해서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대학과 군복무를 동시에 마친 몇 명 중 하나가 됐습니다. 

1959년의 6군단 소속 부대들은 남방경계선을 따라 콘크리트 진지 구축 작업에 사병들이 많이 동원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지 작업을 나가면 나무를 자르게 되는데 서울로 이 장작을 실어 내어 부대 지휘관들은 제법 재미를 보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1959년 봄 한탄강변에 있는 대대본부 숙소는 노란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펴서 우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야산과 강을 지겹도록 관상할 수 있었습니다. 일과가 일찍 끝나 당시 보급관으로 있던 고모 중위와 기타를 들고 강 언덕에 앉아서 에탄올인지 메탄올인지 모르는 알콜에 색소를 탄 '백마 위스키(원래 일제시대에 영국산 White Horse Whisky를 백마 위스키라 불f렀는데, 해방 후에는 이의 유사품이 백마 위스키란 이름으로 유통되었다고 함)'를 마시며 젊은 사람들의 고민을 끝 없이 나눈 적도 있었습니다. 

1959년 12월 초, 기말 시험을 보러 서울에 나온 나는 시험을 마치자마자 바로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군복을 입고 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군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있다고 해서 서울의 헌병들이 총동원되어 학교를 조사를 했는데, 나는 피할 수 없이 붙들려 필동에 있는 헌병본부로 가게 됐습니다. 다행이도 나는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있던 박충훈 소장의 도움으로 풀려나서 다시 부대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군 복무 중 마지막으로 치른 시험이었고, 4학년 1학기 시험부터는 제대하고 칠 수 있어서 어렵게 군복무와 학업을 병행하던 시절을 끝내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게 됐습니다. 

미주리대학교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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