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언론학자로 이끈 인생의 터닝포인트, 고대신문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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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언론학자로 이끈 인생의 터닝포인트, 고대신문 수습기자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11.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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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 장원호 박사

1958년 초는 자유당 말기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정계의 선배들을 만나면서 마치 장래의 정치인처럼 우쭐대는 K 군과 나는 선거운동을 돕기 위하여 강원도 평창군으로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원정을 갔습니다. 우리가 도울 국회의원 후보자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분으로 무소속 출마자였는데, 바로 같은 과 L 양의 형부였습니다. 우리는 그 멀고도 먼 대관령 밑으로 포장도 되지 않은 2차선 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하루 종일 타고 그 곳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로 선거 연설문 작성, 그리고 연설 방법 등을 자문했습니다. 대접 잘 받고 10일 동안 놀다 온 셈이었습니다. 후한 여비도 받았고, 강원도 강냉이 엿을 선물로 받아 서울로 가져와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먹은 기억이 기금도 생생합니다. 

평창읍에서 머무르는 동안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 곳 병원에 있는 미모의 간호원을 우리 둘이 경쟁적으로 괴롭힌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고시공부하러 왔는데 잠이 너무 많이 오니 카페인을 좀 얻자는 핑계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녀는 고려대 교복을 입은(당시는 대학생도 교복을 입었다) 서울 대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우리는 일이 끝나자마자 그곳을 떠나야 했기에 우리들의 만남은 너무 쉽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고대 재학 중 내 커리어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고대신문 견습 기자 시험에 합격한 것이었습니다. 2학년 초에 시작하는 교내 신문 견습기자는 버스표 몇 장 받는 보수에다 다른 곳으로 가서 청탁 원고를 받아 오라는 심부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기사 한 번 써 볼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대신문(사진: 고대신문 홈페이지 캡처)

당시 고대신문은 조선일보에서 인쇄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고대신문 주간이신 고 오주환 선생님 지휘 하에 조선일보 근처에 정해놓은 사무실에서 조선일보 인쇄공장을 왔다 갔다 하며 신문교정 보는 일을 학생 기자들 모두가 했습니다. 원래 찬찬한 성격이 아닌 나는 교정 보았다고 제출하면 못 잡은 것이 너무 많아서 오주환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도 들었고 나중에는 아예 나에게는 교정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밤늦게 신문이 나오면 광화문 근처 음식점으로 몰려가서 저녁과 함께 술을 얼큰하게 마시게 되었는데, 쫄병인 나는 술보다는 기름진 음식에 마음이 더 있어서 금요일이 되기를 기다리기까지 했습니다. 수습이 떨어질 무렵, 나는 군에 입대하게 되어 고대신문 기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못내 아쉽습니다.

나는 한때 고시공부를 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절에 들어 간 적도 있었지만, 같이 간 친구들과 절에서 닭 잡아먹는 일을 더 재미 있게 생각하는 통에, 고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간다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학의 전공으로 학부의 정치학보다는 ‘저널리즘(언론)’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쏠렸습니다. 그런 결정에는 이 고대신문 수습기자 4개월이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오주환 선생은 고대 신문사 주간으로 있으면서 ‘신문학 개론’을 강의하셨습니다. 그 분은 내가 미국에 올 무렵인 1965년에 고대에 신방과를 창설하고 후에는 국회의원까지 하셨는데, 별로 가깝게 모시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이인 나에게 언론의 맛을 보여준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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