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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4.19를 군에서 겪고, 국토개발 요원에 선발되어 울진에서 공무원의 첫 발을 내딛다[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 장원호 박사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11.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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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가 주동이 되어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가져온 4․18 고대 시위가 일어 났을 때, 나는 10연대에 있었으며, 제대를 3주 정도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3․15 자유당 부정 선거를 전방에서 치룬 나는 그 선거가 얼마나 엉터리였던가를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군에서 아무 말도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 부대 장병 중 실제 투표를 한 사람은 10%도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행정 요원들이 대신 찍어서 만든 투표였습니다. 우리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분노하고 있었는데, 4․18 시위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더욱 놀란 것은 육본 직할 군단인 6군단 소속 8사단은 4․18 학생 데모 진압부대로 지정되어 서울로 가는 병력으로 차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 같은 학보는 차출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특히 제대를 앞둔 나는 이미 열외가 된 상태였습니다.

4월 혁명(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4․18 고대 시위의 주역이 모두 정치과 나의 동료들이었고, 나는 당시 이 사실을 주위에 자랑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4․18, 4․19가 지난 후, 이승만 박사가 하야하는 등 정세가 급변할 때, 나는 조용히 부대에서 한 달을 더 보내고 만 18개월의 군 복무기간을 채운 5월 11일 드디어 제대증을 받아 들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민주화가 된 당시에는 4․18의 주역인 내 친구들이나 정치과 교수들의 흥분이 제대로 가라앉지 않은 상태라 강의가 제대로 될 리 없었고, 나는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4학년 1학기를 보냈습니다. 1960년 6월부터 가정 형편이 더 어려워져서 서울 생활은 더욱 힙들었습니다.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한 원흥이의 학비와 나의 마지막 학기 학비가 너무나 부담스러워 아버지과 상의한 끝에 할아버지가 마련한 평촌 땅 4000평을 팔기로 했습니다. 그 괴로운 마음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대학의 첫 학년을 제외하고 전방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군복무 중에 학업을 이어갔던 나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해 사실 지식을 많이 쌓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4․19 데모 이후의 각종 이익 단체에 끌려 다닌 장면 정권은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이만갑 선생 외 몇 명이 오랫동안 주장한 '국토개발'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국토개발 사업은 자유당 때부터 준비한 계획이었는데, 장면 정권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 해에 졸업하는 대학생 3000명을 국토개발 요원으로 모집하여 정식 중앙 공무원으로 채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이 시험치고 취업할 기업이 거의 없었습니다. 불과 몇 개 은행이 행원을 모집하고 몇 개 신문사가 기자를 선발하는 게 고작일 때여서, 국토개발 요원 모집은 나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3000명이나 모집하니 합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는 정외과를 나왔으니 외무 부분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외교관이 되려면 별도로 외무고시에 합격해야 하는 절차를 따로 거쳐야했기 때문에, 외무부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국토개발복을 입고 출정식을 하는 국토개발 요원들을 '한국의 뉴후론티어'라고 호칭한 신문 기사(사진: 경향신문 뉴스 라이브러리 1961년 2월 27일자 캡처).

1960년 추운 겨울, 나는 12월 초에 국토개발 요원 시험을 치렀습니다. 예상한 대로 합격이 되어 '국토개발복'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며칠 간의 교육을 마친 뒤, 우리는 전국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교육이 끝날 무렵, 자치위원회 같은 것이 구성되었는데, 나는 제3부장을 맡아서 대 언론관계 홍보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국토개발 사업은 주로 미개발 지역의 국토 개발 조사 사업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교육이 끝나자 우리들 대부분은 강원도 근무에 제일 많이 할당되었고, 나는 지금은 경상북도가 되었지만 당시는 강원도였던 울진군으로 배치된 10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울진군까지 1월 중순까지 가서 군청에 신고해야 한다고 해서 국토개발복이라는 유니폼과 모자를 쓰고 평생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강원도 울진으로 떠났습니다. 교통시설이 발달되지 못했던 때여서 청량리에서 중앙선을 타고 영주로 갔고, 다시 영주에서 삼척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 탔는데, 이 기차가 운행하는 방법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기차가 사람을 태우면 무거워서 태백산맥을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높은 산 밑에 이르면 손님은 전부 내려서 걸어 올라가고, 기차는 체인으로 끌어 올려서 산을 넘었습니다.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우리나라에서도 실제 연출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삼척에서는 다시 버스로 갈아 타고 비포장 도로의 먼지를 뽀얗게 쓰면서 달려서 겨우 울진읍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울진읍에서 만난 국토개발 요원 일행 중에는 대부분이 나보다 연상이었지만 재미있는 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연대 정외과를 나온 친구 고경배와 내가 군청 소재지에 남았고, 조달청 고급 관리를 한 민 형과 고대 선배인 이 형이 근남면에, 그리고 다른 분들이 평해 북면 등으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그 당시 군에서 제일 필요했던 사방사업과 조림사업을 도왔으며, 나중에 '새마을 사업'으로 발전한 지역사회 개발에 대한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면 소재지 한 가운데 있는 울진 여관에 장기투숙을 했습니다. 매일 저녁 시간 있을 때마다 동네 사랑방에 다니면서 이곳 지역사회 개발 문제, 노름, 술 등 퇴폐풍조의 개선 문제, 그리고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시사 해설 등을 설명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당시 울진군 온정면 백암리에 있는 온정 온천(당시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개발 계획, 그리고 울진과 영주를 연결하는 도로 계획 등을 만들어 중앙에 보고는 등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커다란 관광호텔 등 관광 명소로 된 백암 온천은 오래 전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도로가 없어서 고관대작이나 지프차로 간신히 그곳에 가서 자연에 둘러싸인 온천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울진 면장은 민선 면장으로서 울진 장 씨의 어른이었습니다. 나는 장 씨 종파 중 울진 장씨가 있는 것을 처음 알았지만, 그는 인동이 본관인 나를 종 씨라고 자주 집으로 불러서 여관 생활에 지친 우리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일은 그 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울진 읍내에 오래 된 양복점이 하나 있었는데, 자녀들을 모두 서울로 유학보낸 그 곳 명문가였습니다. 연대를 다닌 큰 아들은 나와 함께 울진에서 일하고 있는 고경배의 친구였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부터 그 친구는 울진에 가면 자기 집을 찾아가라고 해서 나와 고경배는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그 집에는 J라는 바로 밑의 여동생이 숙명여대를 나와 집에 와서 집안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J와 나는 처음부터 가까워졌고, 특히 J의 어머니가 극성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를 대접해서, 나는 그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내가 방문할 때마다, 그 어머니는 매실주부터 많은 음식에 이르기까지 융숭하게 나를 대접했습니다. K 형은 틈만 있으면 계속 그 집에 나 대신 전화를 걸어서 놀러 간다고 연락을 취하곤 했습니다.

3월 봄이 오면, 동해안의 울진 앞바다, 특히 근남면 산포리 앞 백사장은 날이 추워 수영은 할 수 없어도 경치가 매우 좋았습니다다. 당시 이곳은 석류 동굴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그 외의 가볼 만한 근처 명소들을 J 양의 안내로 즐겁게 돌아 다녔습니다. 나는 대학과 군대를 마친 지 얼마 안되는 20대 총각이니 아직 결혼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울진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만큼 정이 가는 친구였습니다.

꿈같은 3개월은 너무 빨리 가서 그 곳 일을 마치고 돌아 갈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울진 근무가 끝나갈 무렵, 나는 서울에 불려 가서 당시 한국일보 사장이었던 장기영 씨와 단독 인터뷰를 해서 쓴 글이 한국일보 전면 기사로 나는 바람에 지역사회 개발 사업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었는지 농림부로 최종 발령이 났습니다.

농림부에서는 나에게 우선 지방 근무를 하라고 해서 대구 동촌에 있었던 경상북도 농사원(농촌진흥청의 전신)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대구 발령 소식을 울진에서 들은 나는 J 양이 사는 울진은 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어서 우리의 우정을 계속하자고 약속하고는 울진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전화 한 번 했을 뿐 지금까지 서로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사정이 그렇게 된 데는 아마도 전화하기가 힘든 당시 환경도 있었고, 또 버스로는 하루종일을 가야 하는 먼 곳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새로 시작한 나의 공무원 생활이 몹시 바빴던 사정이 제일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J 양은 세상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고 날뛰는 천진난만한 총각에 큰 기대를 걸기가 어려웠던지 딴 곳으로 출가를 했다고 후에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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