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고려대 정외과 입학, 모의국회 활동, 그리고 정치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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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고려대 정외과 입학, 모의국회 활동, 그리고 정치인의 꿈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10.29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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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 장원호 박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를 지망한 데는 두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나는 고등학교 때 대학 입시 공부를 차근차근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암기식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객관식 시험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생각을 요하는 주관식 시험에 자신이 있었고, 당시 고대의 입학 시험이 모두 주관식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나는 학자가 되기보다는 공부하여 정치 일선에 나가 고향에서 국회의원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니, 장래 국회의원이나 정치를 하려면 고려대학교 정외과가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 입학시험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나는 크게 놀랐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전교 수험생 중 차석 합격이었고, 물론 정외과에서는 수석이었습니다. 당시 수석 입학은 상대 입학생이었고, 3등은 법과대학생이었습니다. 등록하러 가니, 전체 수석, 차석 합격자, 각 단과 대학 수석 합격자 사진과 함께 우리들 프로필이 실린 고대신문이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인기 있는 유명 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려대학교 본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개학하자마자, 많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대 정외과에 입학한 K 군을 알게 되었고, K 군과 나는 우리 학년 서울지역과 충청지역 입학생을 대표하는 학생회 간사에 출마했습니다. 고대 정외과 학생회 간사는 매 학년 2명씩인데, 많은 입학자가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치열하게 두 자리를 놓고 싸우는 가운데, 서울과 충청도 지역이 단합함으로써 결국은 K 군과 내가 간사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우리 둘은 우리 학년을 대표하여 선배들도 만나고 교수님들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즐거운 학생회 행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많은 여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몇 명은 고향의 후배도 있었고, 친구 여동생들도 있어서 때로는 열띤 편지를 주고 받고, 더러는 같이 극장이나 음악 감상실을 다녔습니다. 그 중 같은 과에 들어온 C 양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과 80명 입학생 중 숙명여고를 나온 L 양과 C 양이 있었고, 창덕여고를 나온 K 양이 있었습니다. 이들 세 명은 학생회 학년 간사인 나에게 부탁하는 일이 몇 개 있어서 나와 세 명 모두는 아주 친한 사이었지만, 그중에서도 C 양과 나는 학생들이 모두 스윗하트(sweetheart: 한국의 CC를 영어로는 스윗하트라 함)라고 놀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대학 시절 중 가장 낭만적인 1학년 1학기는 모든 일을 C 양과 함께 하면서 보냈으며 겨울 방학에 시골에 내려 가서도 쉬지 않고 서로는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지금 무슨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문학을 전공하려고 했다는 그녀가 물감으로 꽃을 그린 종이쓴 시적인 편지는 지금도 감동적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고향의 아버지 정미소는 독점이었던 호시절이 가고 아무나 정미소를 차릴 수 있는 경쟁 체제가 되자 그렇게 재미를 못 보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동생 원흥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에 나는 원흥이를 서울 소재 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원흥이가 결국 서울로 진학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두 이들의 서울 학비를 조달하는 데 부담을 갖게되었습니다. 원흥이는 음성중학을 졸업할 때 워낙 성적이 뛰어나서 처음에 나는 서울의 경기고에 시험을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서울과 음성 지역의 실력을 비교하기가 어려워서, 나는 최종적으로 동생에게 경복고등학교를 추천했고, 동생은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경복에 입학했습니다. 동생과 나는 그 후 경기고에 입학원서를 안낸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어떤 선택이 더 좋았을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는 지금도 이야기하곤 합니다.

대학교 초년생으로 C 양과 매일 몰려다니던 시절, 나는 정외과의 연중 가장 큰 행사인 모의국회 행사에 1학년 간사로서 준비위원이 되었습니다. 비록 제일 막내로 심부름을 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나는 나중에 정계의 거물이 된이철승 의원 등 선배들을 만나서 비록 말석이었지만 술자리를 같이 하는 등 우쭐한 기분으로 매일을 보냈습니다.

하바드 대학의 모의국회 모습(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지금은 뜯어서 새로 짓겠다고 논의 중인 강당에서 열린 모의국회는 '아남민국'의 국회로서 아남국과 미국의 행정 협정 인준을 토론하는 의안을 다루었습니다. 고대 학생들은 여당 국회의원이 되고 타 대학에서 온 대표들이 야당 국회의원이 되어 열띤 질의와 토론을 거쳐 의결하는 방식으로 모의국회가 진행됐습니다. 나는 1학년으로서 여당 부총무로 임명되어 질의 종결 동의를 발의하는 짧은 대목을 받아 연단에 올라가 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모의국회 활동에 흥미를 느꼈고 그래서 국회의원을 꿈꾸기도 했는데, 왜 지금 나는 정치인이 되지 못했을까 하는 미련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1957년 모의국회는 또 다른 인연을 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당시 이 행사를 통해서 이대 정외과 3학년인 장경숙을 만난 것입니다. 족보를 훑어보니 나와 같은 항렬이어서 경상도 경산이 고향인 장경숙의 집을 아주 가까운 가족처럼 드나들면서, 나는 그 가족들과 친하게 지냈다. 친누나가 없기도 했지만, 나를 친동생처럼 가까이 아껴 주는 누나가 고마웠습니다. 그 집안 부모와 바로 밑의 동생으로 고2였던 화자(지금은 이름을 바꾸고 모 대학의 가정대학장을 지냈습니다)는 나를 친오빠처럼 대해주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미국 유학을 간 사이에 늘 가까이 지내던 이 가정과 나는 연락이 소원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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