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프리힐리아나의 작은 우물에서 마주한 역사의 슬픈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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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프리힐리아나의 작은 우물에서 마주한 역사의 슬픈 흔적
  • 편집국장 송문석
  • 승인 2024.03.25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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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 고향 스페인 말라가(Malaga). 말라가에서 71km 거리에 프리힐리아나(Frigiliana)란 작고 예쁜 마을이 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험준한 산 중턱에 하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스페인의 산토리니’라고 부르는 곳이다.

말라가를 찾는 여행객 중 시간이 있으면 ‘유럽의 발코니’라는 네르하(Nerja)와 함께 들르는 프리힐리아나. 여행객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온통 하얀색의 집, 그리고 그 하얀색의 집에 빨강 노랑 초록 등 다양한 색으로 알록달록 색칠한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탄성을 지른다. 하지만 프리힐리아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행객의 감탄 뒤엔 고통스러운 과거사가 저 밑바닥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음을 알게 된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 프리힐리아나는 산 중턱에 자리잡은 하얀 집들로 유명하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 프리힐리아나는 산 중턱에 자리잡은 중세시대 무어인들의 거주지였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고통의 과거사는 사실 프리힐리아나 마을만이 아니라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반도 전역에서 벌어졌다. 이베리아반도는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711년 이슬람 세력이 코르도바에 왕국을 세운 뒤, 기독교 세력의 레콘키스타(국토탈환운동)로 1492년 그라나다에서 철수할 때까지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 특히 13세기 초 레콘키스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부터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은 각자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절멸을 외치는 피의 살육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지배 권력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바뀔 때마다 개종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죽음으로 수호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전쟁은 기독교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게 원상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이슬람 왕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북아프리카로 퇴각했지만,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무어인(이베리아반도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은 당장 생활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떠나지 못하고 남은 무어인들은 지배권력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바뀐 세상에서 우선 목숨부터 부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개종하거나 숨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작은 마을 프리힐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말라가 등지에 살던 무어인들은 기독교 세력이 밀려오자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프리힐리아나는 그렇게 생긴 마을이다. 그렇다고 기독교 세력이 이곳을 피해갈 리 없었다. 골목길에 붙어 있는 타일벽화에는 이곳까지 밀려 들어온 기독교 군사들에게 무어인들이 저항하다 죽고, 살해당하고, 스스로 성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모습을 그려놓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서로를 뱀처럼 쳐다보고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칼과 돌과 몽둥이가 해결책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도이건 이슬람교도이건 고통스럽고 힘들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프리힐리아나 골목길에서 만난 작은 우물은 그 해답을 보여준다. 각자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당시 상황을 고통스러워했으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직시했는지를 우물은 보여주었다. 가정집 욕조 크기의 우물 위에 수도꼭지가 세 개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각 수도꼭지 위에 붙어 있는 세 개의 타일들. 왼쪽은 유대교의 별, 가운데는 기독교의 십자가, 오른쪽은 이슬람교의 초승달과 별.

스페인의 작은 마을 프리힐리아나의 골목을 걷다 발견한 우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상징물이 나란히 벽에 붙어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스페인의 작은 마을 프리힐리아나의 골목을 걷다 발견한 우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상징물이 나란히 벽에 붙어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을 놓고 벌였을 끝없는 종교 간 갈등과 마을 사람 사이의 물싸움 끝에 프리힐리아나 주민들은 결국 같이 우물물을 마시기로 했던 것이다. 700년 이슬람 지배, 그리고 레콘키스타 기간을 거치며 쌓인 서로 간 증오와 보복을 벗어날 유일한 해결책은 관용과 화해 뿐임을 이들은 깨달았다. 우물은 뒤에 가축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때 이들은 석조 물통을 놓아 세 개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온 물을 한 곳에 모아서 소와 양에게 먹였다.

이베리아반도에 대한 이슬람의 오랜 지배와 기독교의 국토 회복 이후 찬란한 이슬람 문화재가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 온 것에 대해 누구는 기독교의 관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누구는 비록 적이었지만 상대방 문화재에 대한 깊은 존중과 존경의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스페인 내 이슬람 문화를 상징하는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탑(La Giralda)과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이 그대로 보존돼있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관용이 흘러넘쳐서 그랬다거나 특별히 문화재에 대한 보존 의지가 높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당시 이슬람 건축 문화의 수준이 기독교의 그것보다 높았고, 전쟁에서 이긴 승자의 여유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피와 광기로 얼룩진 전쟁 속에서 보존된 유형 문화재의 가치 못지않게 관심이 가는 것은 프리힐리아나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역사의 광기 한가운데에서 죽고 다치고 쫒겨다니며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다. 그라나다의 화려한 알함브라 궁전과 다로(Daro)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산 언덕에 형성된 무어인들의 주거지 알바이신(Albaycin)도 그런 곳이다.

레콘키스타로 그라나다에서 패배해 북아프리카로 쫒겨간 마지막 무어 왕 보압딜이 “그라나다를 잃는 것보다 알함브라를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은 더 슬프다”고 했다던가.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500년이 지난 지금도 알함브라는 여전히 아름답다.

왕과 왕족, 귀족들이 휘황찬란한 알함브라 궁전을 버리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갈 때 건너편 알바이신에 살았던 무어인 서민들은 프리힐리아나 무어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들에게 북아프리카는 오래전 조상의 땅일 뿐 자신들의 고향은 이미 아니었다. 대대로 살아온 알바이신이 오히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눌러앉아 버티는 길을 택했다. 이후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헤아릴 수도 없이 넘나들며 모진 생명을 이어왔을 것이다. 더구나 알바이신 주민들은 레콘키스타로 그라나다가 함락될 때까지 이슬람 편에서 서서 기독교 세력에 저항해 흰 벽과 골목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할 만큼 싸웠다고 한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기독교 지배세력 입장에서 보면 알바이신은 용서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알바이신
스페인 그라나다 알바이신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 미구엘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바로 아래 알바이신 지구가, 건너편엔 알함브라 궁전이, 그 너머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알바이신은 지금도 이슬람의 냄새가 짙게 밴 곳이다. 여전히 그들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살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들과 섞여 하나가 됐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하면 살아가고 있다. 골목길 모퉁이에선 오늘도 이슬람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이슬람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며, 이슬람 목욕탕도 있다.

프리힐리아나와 알바이신의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먼지처럼 이리저리 휩쓸려갔을 인간들을 생각한다. 종교를 앞세운 전쟁과 갈등이 여전히 지구상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과 광기를 보면서 역사에 진보는 있는가를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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