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장수 가야', 역동적 지역사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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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장수 가야', 역동적 지역사 만들기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4.03.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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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서쪽의 전라도 지역 가야고분 '고대사 한축'
장수군, 홍보관과 전시관 건립, 세계유산 추가 등재 추진
부산 복천동고분은 가야문화 품고도 등재 무관심

부산에서 전북 장수까지는 차로 3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다. 새벽밥 먹고 출발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여행이 묘한 설렘을 준다. ‘장수 가야’, 낯선 가야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장수는 흔히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으로 통하는 전북의 오지 여행지 중 한 곳이다. 한자로 ‘長水’라 쓰는데, 백두대간을 품은 물 좋은 고장이니 '오래 산다'(장수)는 뜻으로 풀어도 될 것 같다. 

장수는 요즘 '레드(Red) 마케팅'으로 바쁘다. 장수 한우, 사과, 오미자, 토마토 등 붉은 색 지역특산물을 맛깔나게 버무린 지역축제도 열고 있다. 인구가 2만 2000여 명으로 소멸위기 지자체로 꼽히는 장수의 살아남기 자구책이다. 그런데 장수에 ‘레드’보다 더 뜨거운 ‘가야 바람’이 불고 있다. 장수에 웬 가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서 보니 예삿바람이 아니었다.

전북 장수군의 삼봉리 가야고분군 전경이다. '가야왕이 잠들다'는 홍보판이 인상적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전북 장수군의 삼봉리 가야고분군 전경이다. '가야왕이 잠들다'는 홍보판이 인상적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때는 서기 5~6세기, 후기가야의 맹주 대가야가 마침내 남원 운봉고원을 지나 백두대간을 넘는다. 이 시기 장수 일원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가야색·가야계가 뚜렷하다. 대표적인 곳이 장수 동촌리 고분군이다. 장수읍 마봉산(724m) 산줄기에 지름 20~30m 내외의 중대형 고총 등 83기가 분포하는데, 연구결과 5세기 초엽부터 6세기 초엽 약 100년에 걸쳐 형성된 가야세력의 수장층 고분으로 드러났다. 이곳은 2016년 전북 기념물로 지정된데 이어 3년 후 사적으로 승격됐다.

2015년 발굴조사에서는 가야계 고분 최초로 징(釘)이 박힌 편자가 출토되었다. 주변 고분에서도 둥근고리자루칼, 은제 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그동안 대가야와 소가야의 수장층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쇠로 만든 말 편자는 장수의 가야 세력이 철의 생산과 가공에 필요한 고도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장수 가야의 성장 배경은 철이다. 장수군에 산재한 제철유적은 확인된 것만 70곳이 넘는다. 엄청난 밀집도다. 장계면 명덕리의 대적골 제철 유적은 길이가 2㎞에 이르고 채석장, 제련로, 단야로, 가마, 건물터 등을 갖추고 있었다. 

장수가 내세우는 또 다른 유적은 고대 봉화다. 지금까지 발견된 장수가야의 봉화는 120여 개소. 이들을 지도상에서 선으로 연결한 결과 8개의 봉화로가 복원되었다. 봉화로가 모두 교차하는 곳은 장수의 장계분지. 학자들은 장수로 진출한 가야 세력이 백제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제철유적을 지키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봉화 시스템을 운영한 것으로 본다.

장수 가야의 흔적은 이밖에도 노하리, 삼고리, 삼봉리, 장계리 등에서도 확인됐다. 삼봉리 고분이 자리한 국도변에는 ‘가야왕이 잠들다’라고 적힌 대형 홍보판이 서 있었다.

장수 가야문화 홍보관에 걸린 전북 동부지역 가야유적 분포 지도(사진: 박창희 기자).
장수 가야문화 홍보관에 걸린 전북 동부지역 가야유적 분포 지도. 가야 유적이 매우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사진: 박창희 기자).

장수 가야를 이끈 가야왕은 과연 누구였을까? 미심쩍긴 하지만 8세기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장수 가야의 국명을 ‘반파(伴跛)’라 지칭하면서 백제와 다투는 과정에서 ‘봉수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반파를 대가야로 보는 것이 정설이어서 이 대목은 논란이 따른다. 어쨌거나 남원과 장수 등지의 ‘가야 실존’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학계에선 이들 지역을 대가야 연맹체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각 소국이 자율성과 독자성을 보이고 있어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다.

2019년 10월 장수군은 전북 최로로 가야문화 홍보관을 개관했다. 홍보관에는 장수 가야의 유적 분포, 주요 유물의 사진과 특징, 봉화 루트 등이 짜임새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홍보관에 붙은 ‘1500년전 ICT왕국/장수 가야를 만나다’는 문구도 인상적이었다.

홍보관에서 만난 조국현 문화관광해설사는 지역사 지킴이로서 자부심이 충만했다. 동촌리 고분군을 안내한 그는 “최근 장수군에서 동촌리를 동가야로 이름을 바꾸었다”면서 “장수 가야는 역동적 지역사이자 타오르는 문화관광 아이콘”이라고 설명했다.

장수군은 2023년 9월 장계리에도 ‘장수역사전시관’을 열어 장수 가야를 대외에 홍보하고 있다. 장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인근 남원의 유곡리 두락리 가야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이 됐으니, 다음은 장수 가야 고분이 세계유산으로 추가 등재될 차례라고. 민관이 합심해 '장수 가야'를 이슈화 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장수군의 역동적 '가야 사랑'을 보면서 부산의 복천고분군이 떠올랐다. 부산은 확실한 가야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계유산 등재에 무관심하다. 복천동 일대 재개발사업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세계유산이 중요한지, 재개발사업이 중요한지 장수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봤으면 좋겠다. 작은 장수군의 가야사 챙기기 사업을 부산이 배우자고 주문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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