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탕 삼아 '한국다움' 찾는 게 우리 시대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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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탕 삼아 '한국다움' 찾는 게 우리 시대의 과제"
  • 취재기자 이원영
  • 승인 2016.06.1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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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대가인 서울대 송기호 교수의 ‘우리역사읽기’ 시리즈 완간 기념 인터뷰

발해사 연구자로 유명한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가 조선시대 선조들의 생활사를 다룬 역저(力著) ‘우리 역사 읽기’ 시리즈의 제7권 <강 넘고 바다 건너>를 내며 10여년 만에 완간했다. 50대를 바친 조선 생활사 연구서 일곱 권 완간이라는 과업을 끝낸 송기호(60) 교수를 <시빅뉴스>가 전화로 인터뷰했다. 발해사 연구의 개척자이자 대표 연구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그로부터 조선시대 생활사로 연구의 중심을 옮기게 된 까닭을 들었다. 그리고 역사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고 진정한 ‘한국다움’을 추적해온 그의 탐구 정신을 더듬었다.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송 교수는 1988년 8월부터 현재까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학부 시절부터 만주에 터전을 두었던 발해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대학원과 교수 시절 대부분을 발해사 연구에 전념했다. 그후 최근 10여 년간은 연구의 테마를 바꿔 조선시대 생활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 송기호 교수가 중국 요령성 관전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뒤로는 압록강이 흐른다(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한국인의 생활사를 통한 ‘우리 역사 읽기’
‘우리 역사 읽기’는 <이 땅에 태어나서>, <시집 가고 장가 가고>, <말 타고 종 부리고>, <과거 보고 벼슬하고>, <임금 되고 신하 되고>, <농사짓고 장사하고> 등의 제목으로, 한국인의 삶을 미시사적 관점에서 탐구한 생활 역사서다. 구중궁궐의 왕조 중심 정치사가 아니라, 탄생, 장례, 결혼, 의식주, 신분제도, 관리 되기, 생업, 농업 등의 우리 선조들의 하루하루 일상 생활이 연구의 중심이 됐다. ‘우리 역사 읽기’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강 넘고 바다 건너>를 통해 국가 위상과 외교를 주제로 강대국 사이에서 조선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다루면서 그의 기나긴 생활사 장정(長征)이 대단원을 맞았다. 

생활사 연구를 시작하며 자료를 수집하는 데만 18년이 걸렸고, 본격적으로 이 시리즈를 집필하기 시작한 건 11년 전이다. 그는 “20대부터 40대까지는 발해사를, 그리고 50대를 생활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보냈다. 10여 년간의 일을 마무리했다는 점, 그리고 오래 전부터 쓰고 싶어 했던 책을 장기간에 걸쳐 완성한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밝혔다.

생활사 서적의 집필은 그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가 정말 재미 없었다. 젊어서부터 ‘재미있는 역사책을 언젠간 쓰리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때는 일반 논문 쓰기에 바빠 미뤄야만 했다. 나이가 드니 내가 하고 싶었던 이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정년 전에 꼭 이루기 위해 생활사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중·고등학교 국사책을 보면 재미가 없고, 국사는 외우는 과목으로 전락했다. 다른 방식으로 역사책을 서술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기존의 역사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역사를 추구하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일반 독자들이 접하는 역사서는 역사학자들이 역사 자료를 보고 해석해 글로 쓴 것이다. 그러면 사료 자체가 아닌 역사학자들의 눈을 통해서 역사를 보게 되는데, 그것보다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사료에 이렇게 나온다’며 사료 자체를 보여주는 데 생활사 집필의 목적을 두었다. 독자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서 과거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쓰게 된 책”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발해사 연구’의 개척자
송 교수는 생활사 이전에 발해사를 30여 년 가까이 연구해 온 사람이다.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흔치 않다. 고대사는 연구에 제약이 커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발해사를 연구하려면 기본적으로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능통해야 한다. 국내에는 사료가 적어 중국, 러시아, 일본의 고고학 자료와 문학 자료들을 폭넓게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원에서 발해사 연구를 하겠다고 온 제자들도 결국 고구려사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어려운 고고학 공부는 물론이고 발해사 연구는 학부시절부터 어학을 준비해야 될 만큼 어렵다 보니 많이들 포기한다. 결국 제자 중에서 발해사 연구자를 키워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뿐만이 아니다. 발해의 영토가 북한과 중국, 러시아 일대에 걸쳐져 있어 연구에 필수적인 해당 국가의 지원이나 협조를 받는 데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발해사 연구를 위해 중국을 자주 찾았던 송 교수는 발해 유적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발을 묶는 중국 당국의 눈을 피해 몰래 답사를 가곤 했다는 후일담을 들려줬다.

“내가 발해사 연구를 시작한 게 1970년대다. 1970~80년대만 해도 공산권(중국과 러시아) 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 전이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의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당시에 시작해낸 것이다. 외교 관계도 없던 나라에 가서 현지의 유적을 밟고 직접 눈으로 구경한 일은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고 역사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일조했다.”

송 교수는 발해사 연구를 스스로 개척해 왔다. 가야사 연구자로 ‘김가야’라고 불리는 김태식 홍익대 교수처럼 송 교수도 ‘송발해’라고 불리며 발해 전공학자로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그의 발해 연구서로는 1993년 <발해를 찾아>, 1995년 <발해 정치사 연구>, 1999년 <발해를 다시 본다>, 2011년 <발해 문화사 연구> 등이 있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나라로는 러시아, 중국, 일본, 북한, 한국이 있다. 발해가 한·중·러 영토에 걸쳐 자리 잡고 있었던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각국 사학계의 연구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송 교수는 “발해사를 러시아는 러시아 역사로, 중국은 중국 역사로, 북한과 한국, 일본은 고구려 유민의 역사로 본다. ‘발해의 주축을 이룬 것이 말갈족이냐 고구려인이냐’는 논쟁이 가장 뜨겁다. 모두 한 쪽만 보며 발해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는 말갈족과 고구려인 두 종족이 결합된 국가로, 중간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일본 오키나와 성 앞에 선 송기호 교수(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
그는 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에 ‘발해’를 연구 대상으로 선택했을까. 그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생활 신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답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해 공부를 하면서, 발해사가 우리나라 역사라고 배웠는데, 국내에서 연구자를 찾기 어려웠다. 당시 동양사 입장에서 발해사를 연구해 온 학자가 국내에 단 1명 있었지만, 한국사 입장에서 발해사를 연구한 학자가 국내에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며 국사학을 선택한 것도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 1975년 예비고사(현재의 수능에 해당)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던 그는 당연히 법대나 의대로 진학하리라는 주변의 예상과 달리, 국사학과를 선택해 매스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의 속사정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외국으로 유학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국내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한국사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한국사를 전공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껴왔기 때문이라는 게 더 솔직한 대답일 듯하다. 그는 “고향인 대전 지역에서 어린 시절부터 송시열 선생 유허지 등 유적을 많이 보면서 자란 영향도 있다. 신문에서 역사 이야기가 나오면 그 기사를 스크랩해서 모을 정도로 중고등학생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는 ‘한다발’이라는 동아리에서 토론 활동을 했다. '아름다운 인간사회'를 지향하는 한다발 모임에서 인문학적 토론을 통해 나는 '참다운 정'과 '참다운 의지'라는 인간의 덕목을 배우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법대나 의대에 가는 건 문제가 있다. 나는 다른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인문과학 중에서 좋아하는 국사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대학 시절 그는 문학하는 친구들과 함께 ‘미상불(未嘗不)’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역사철학서와 역사서를 읽었다. 그는 “이때부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그 답을 지금도 찾을 순 없다. ‘과연 역사는 무슨 의미일까’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역사가 무엇인지를 아마 평생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어떤 식으로 연구해야 할 것인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을 항상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 발해사 연구를 전공으로 택한 것과 생활사 책을 쓰게 된 것도 다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 충북 보은군에 자리한 신라시대의 삼년산성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송기호 교수(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이고, 그가 생각하는 역사가의 책임은 무엇일까? 그는 “‘우리 역사는 훌륭하다’는 민족주의 역사학에 물든 교육 방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들은 21세기에는 극복해야 하는 이념의 역사에 불과하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측면도 있는데, 역사가는 사료에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가를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과거의 역사 자료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도 잘 기록해서 남겨야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은 돈을 버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자는 어떻게 보면 명예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사회 저변에서 조용히 연구에 매진하는 인문학자, 그리고 역사학자는 과거 우리의 뿌리를 찾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역사학 연구는 해방 이후 체계가 잡히기 시작해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서양에선 19세기부터 역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진행돼 왔지만, 한국은 연구 기간이 짧고, 다양한 연구도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 논문들은 일반 대중에게는 읽히지 않는다. 그만큼 역사가 대중들과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역사를 다양하게 보는 시각부터 먼저 정립돼야 한다. 역사가들은 다양한 서술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역사의 의미에서 찾는 ‘한국다움’
그는 21세기에서 역사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가 어려워 나라가 못살 때 우리는 넓은 영토를 누렸던 고구려 역사를 자랑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런 때는 우리가 과거의 영광으로 정신적 위안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역사는 그 시대 조상들이 주변국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왔는지 그 지혜를 보여주는 창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는 데 급급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국제시대의 일환으로, 문화 면에서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이제 우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을 외국에서 보여줄 때 무엇을 가지고 소개할 것인가를 논하자면, 현재로서는 특징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일본을 예로 들자면, 사무라이와 닌자, 그리고 스시가 바로 떠오른다. 한국의 K-POP과 대중문화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한국은 한국적인 생명력이 담긴 가치를 찾아야 한다. 외국 박물관에 있는 한국실에는 중구난방으로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걸 본 사람들에게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까? 이것은 국가 전략의 문제다. 우리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국다움을 모색해야 한다.”

 

▲ 송기호 교수가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모습(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정년까지 4년 반...지난 삶을 회고하며
송기호 교수는 역사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며 “정년을 4년 반 앞두고 있다. 수십 년, 원없이 역사 연구를 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측면에서 연구 성과를 이뤘다는 점과 시간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앞으로 그는 한국 온돌사 관련 책 1권을 내고, 그 다음에 발해사로 다시 돌아가 그간의 발해사 연구를 집대성한 논문과 개설서를 내는 것으로 정년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는 만주를 지배했던 발해 왕국의 연구 부재가 웅장한 만주 벌판에서의 한국의 뿌리를 허약하고 허전한 것으로 우리 민족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발해 연구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조상들의 일상적인 삶을 생활사로 정리한 뒤 다시 발해로 돌아 왔다. 발해사와 조선생활사를 아우른 그의 연구의 궤적은 우리 역사에서 한국다움을 찾게 되는 초석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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