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문지기 잃은 기자사회... 언론개혁을 위한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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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문지기 잃은 기자사회... 언론개혁을 위한 고언
  • 박창희 논설주간
  • 승인 2022.04.1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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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손석희, '장면들' '앵커브리핑' 펴내 위기 진단
저널리즘 정신 회복이 해결책... '좋은 편향'은 키워야
기자들, '기레기 조롱'에 심각한 트라우마...개혁 없이는 공멸

요즘 손석희를 읽고 있다. JTBC 뉴스룸에서 앵커브리핑을 했던 그 손석희 말이다. 현재 JTBC 순회특파원으로 뛰는 그는 지난해 11월 ‘장면들’(창비)을 낸 데 이어, 최근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1, 2권(역사비평사)을 발간했다. ‘장면들’은 격변기 언론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온 그의 철학과 고민을 담은 에세이집이고, ‘앵커브리핑’은 JTBC 뉴스 말미에 그가 행한 앵커브리핑 284편을 담았다. 그의 앵커브리핑은 뉴스의 인문학적 확장, 재미에 의미를 더한 에디토리얼(editorial, 논설)이란 평가를 받았다.

뉴스의 인문학적 확장, 앵커브리핑 

책이 술술 잘 읽힌다. 영향력있는 언론인의 유창한 입담이 유려한 글로 전환되어 문장이 활어 같다. 손석희는 명망가다. 그는 ‘시사인(IN)’이 벌인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조사에서 2007년 이래 계속 1위를 유지해왔다. 정치권의 영입 시도에 대해 그는 '언론인으로 남겠다'며 선을 긋는다. 조금 뜨면 보따리 싸서 정치권에 탑승하는 언론인들과 사뭇 다르다. 
그런 행동이 손석희의 주가를 올리고 신뢰를 키우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의 책에 관심이 쏠린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손석희의 책을 거칠게 요약하면, 저널리즘의 정신(본령)을 찾자는 것과, 합리적 시민사회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혼란스런 한국언론이 가야할 길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언론인 손석희가 쓴 '장면들'(창비) 표지.
언론인 손석희가 쓴 '장면들'(창비) 표지.

책에는 몇가지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문지기론’ ‘어젠다 키핑’ ‘포스트-트루스’ ‘자기 확증편향’ ‘기레기’ '언론개혁' 따위다. 하나 하나가 묵직하고 예민한 주제지만, 정작 언론계에서는 ‘그런가보다’ 여기는 분위기다. 위기의 언론이 위기를 체감하지 못한다고 할까.

먼저 문지기론. 언론학을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문지기론’이다. 미디어가 정보를 선택하되, 그 선택의 기준은 기자 개인, 미디어라는 조직, 더 나아가 사회 자체가 정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이 여전히 통할까? 모를 일이다. 세상은 둘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져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미디어 종사자들도 정파성과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언론의 문지기가 안스러워 보이는 이유다.

다음은 '어젠다 키핑'이다. 미디어가 의제 설정(어젠다 세팅)에 그치지 않고 어젠다를 꾸준히 지켜냄으로써 선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믿음. JTBC가 1년 가까이 ‘세월호 참사’를 아젠다로 유지한 게 대표적 사례다. 독하고 끈질긴 언론의 모습이긴 하나, 그것 역시 일회성 시도에 그친 감이 있다. 한국언론의 난맥상이다.

KNN 100년 캠페인 '물...' 돋보이는 어젠더 키핑

‘어젠다 키핑’의 훌륭한 사례로는 지역방송인 KNN에서 벌이는 ‘100년 연속 환경캠페인: 물의 생명입니다’를 꼽을 수 있다. 지역민방에서 100년 대계를 설정한 기세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일찍이 언론계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도랑살리기, 환경마라톤, 해외 탐사, ‘물의 기억’ 등 영상물 제작 등 성과도 내고 있다. 한국언론의 즉흥성, 일회성, 냄비 근성을 불식시키는 사례라 하겠다. 다만 '정말 100년을 끌고 갈까?'하는 세간의 의구심은 털어내야 할 과제다. 

KNN의 100년 연속 환경캠페인 '물은 생명입니다' 초기 화면(KNN 홈페이지 캡처).
KNN의 100년 연속 환경캠페인 '물은 생명입니다' 초기 화면(KNN 홈페이지 캡처).

‘포스트-트루스(post-truth)’는 우리말로 ‘탈진실’ 정도로 번역된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객관적 진실이 감정과 개인의 신념에 호소하는 것에 비해 공중 의견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지 않은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영국의 브렉시트(EU탈퇴), 트럼프(전 미국대통령) 현상이 보여주듯, 진실과 허언이 뒤섞인 상실의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게 한국사회에서도 꿈틀거리고 한동안 혼란을 야기할 조짐이다. 여기에 언론이 부화뇌동 한다면 혼란은 가중될 것이다.

'좋은 편향'으로 정직한 보도를  

미디어의 파편화, 진실의 개인화, 그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한 자기확증편향, 단독기사 남발, 비슷한 기사의 홍수, 포털의 상업주의.... 이는 언론의 위기를 말하는 징후나 개념들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은 민주사회의 적이다. 일부 언론은 ‘편향’을 감춘 채 ‘확증’을 확산시킨다. 편향은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이해와 얽혀 있다. 어쩌면 무편향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얘기일 수 있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라는 책에서 ‘좋은 편향’을 언급한다.

“이슬람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한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사람들에게 대놓고 어떤 선전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쓰는 말과 이미지, 이야기의 구조가 어느 순간 특정한 반응으로 사람들을 이끌게 된다. 뉴스가 ‘우리는 단지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는 당신이 이런 쪽으로, 아니면 저런 쪽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게 정직하다. 괜히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고.”

좋은 편향. 그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좋은 편향’을 위해선 무엇보다 ‘좋은 의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떠받힐 합리적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기자 10명 8명 "기레기 심리적 트라우마 겪어"

그리고 기레기라는 말.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기분 나빠 하고 가슴 아파 하는 단어. 언제부터인가 기자가 혐오 대상이 돼 버린 현실. 한국기자협회·한국여기자협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직기자 10명 중 8명은 기사로 인해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그것 때문에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한다. 기자사회가 사실상 무너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기레기의 순위를 매기고 신상을 터는 ‘마이기레기닷컴’이란 웹사이트도 등장했다. 이에 시달린 기자가 마이기레기닷컴 운영진을 고소한 사건도 있었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레기로 인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건 기자나 독자나 마찬가지다. 모두의 문제건만 누구도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위기의 언론, 기자사회의 위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손석희는 ‘저널리즘의 정신, 본령 회복’을 해결책으로 든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그가 강조하는 뉴스보도의 기준은 사실(팩트), 공정, 균형, 품위 4가지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하거나 삐긋하면 보도는 일그러진다. ‘품위(품격)’가 특히 중요하다. 품위는 도덕성을 먹고 자란다. 보수지, 진보지, 중도지 가릴 것 없이 사실과 균형에 바탕한 품위를 갖출 때 신뢰가 살아난다. 신뢰를 떠받히는 언덕은 합리적 시민사회다. 진보든 보수든 합리성을 잃는 순간 괴물이 되고 기레기로 전락한다.

신뢰 자본이 바닥 난 한국언론이 살길은 뻔한 얘기지만 개혁뿐이다. 셀프 치료를 할 것인지, 외과 수술을 맡길 것인지는 언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바라건대, 영향력 있는 레거시 보수언론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을 선도 했으면 한다. 무릎 꿇고 기도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일어서야 할 때 일어서지 않으면 무릎이 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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