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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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비우기
  • 편집위원 장동범
  • 승인 2016.01.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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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1월은 사람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복 많이 받아라”에서 건강과 행운, 취업과 승진, 합격, 심지어 “부자 되세요”까지, 오가는 덕담은 다양하지만 모두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의례적인 인사말인 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복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으며 건강과 행운, 부(富)는 원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고, 취업과 승진, 합격 같은 것은 항상 치열한 경쟁을 요구한다. 그걸 알면서도 왜 해가 바뀌는 시점에 사람들은 으레 듣기 좋은 인사말들을 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월은 욕망의 밝고 어두운 두 얼굴인 야누스의 계절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노인들이 많이 산다. 그런데 환절기마다 산책하던 노인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게 되면서 어김없이 쓰레기 분리수거장에는 멀쩡한 자개장과 고급 가죽소파가 폐기물로 나뒹군다. 문학전집류를 비롯해 아직 볼만한 서책들이 재활용 종이로 비를 맞고 있고, 심지어는 고인의 것일 법한 사진 앨범들도 통째로 버린 것이 눈에 띈다. 나는 사람이 죽고 남긴 유물들이 바로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는 현상에 대해 허탈감 못지않게 앞선 세대들이 살아생전 가졌던 물질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본다.

얼마 전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글 <버리고 갈 것만 남겨 홀가분하다>가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주위에 정년을 했거나 퇴직을 앞둔 친구나 지인들이 공통으로 하는 고민이 있다. 자녀들이 결혼해 떨어져나가면 부부가 서로 얼굴만 마주 보고 살게 되는데, 수입은 빤하니 자연 사는 집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줄인 집으로 이사 갈 때 제일 고민이 구닥다리 살림살이를 없애야 하는데 애물단지 1호가 가구라는 것이다. 게 중엔 앞서 예를 든 자개장의 경우 돈을 주고 버려야 하고, 다음 목록이 대학 교수를 지냈던 지인들의 경우 책이다. 젊은 시절 보수동 헌책방을 뒤져 귀하게 구입했던 책들이 이젠 먼지만 뒤집어쓰고 책장에 꽂혀 있지만, 기증할 곳도 마땅치 않고,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게 난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인이 평소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여 키우거나 모은 난이나 수석, 다기, 서화, 골동품의 경우, 그 가치를 모르는 유족들에게는 처치 곤란으로 사후에도 원망듣기 일쑤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라는 산문집에서 키우던 난 때문에 마음 쓴 일화를 소개하며 지인에게 난을 주고나자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 동 모퉁이 잔디밭에는 언제부터인가 누가 내다심은 소사나무 분재가 고스란히 잘 자라고 있다. 나는 ‘자연으로 돌아간’ 그 소사나무 분재를 볼 때마다 여간 기특한 생각이 들지 않아 지나갈 때마다 한 번 더 눈길을 준다. 10년도 더 전에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난들을 농장 뜨락 자연으로 돌려보낸 한 기자 선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 갖지 않는 것을 말하고, 소유도 최소한으로 줄여 마음 씀씀이를 그 만큼 아끼라는 의미다. 그러면 왜 뭔가 갖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라는 것일까? 불가에서는 이를 두고 인간을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세 가지 독(毒) 중 으뜸인 탐심(貪心) 때문이라고 한다. 물질에 대한 이 같은 욕망은 가지려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집착하게 만들고, 또 갖게 되면 손 안에 든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느라 마음마저 빼앗겨 결국 자신이 소유한 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대승경전인 <금강경> 첫 장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붓다 재세 때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당시 인도 코살라국 수도였던 사위성 밖 기원정사에 머물던 붓다는 1,250명의 제자들과 함께 성안으로 하루 한 차례 탁발에 나서 차례차례 줄지어 들어가 먹을거리를 구걸한 뒤 숲으로 돌아와 나눠먹고는 입었던 누더기 겉옷을 벗어놓고 발을 씻은 뒤 다시 명상에 들었다. 생각해보라. 왕좌를 팽개치고 출가해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과 하루 한 끼 식사에 가진 것이라곤 밥그릇과 누더기 옷 한 벌이 전부인 붓다의 무소유 정신을... 당시 인도 사회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들의 청정한 생활을 높이 사 탁발에 나선 수행자들에게 다투어 음식을 제공했고,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동남아 등 남방불교국가에서 아직도 남아 있다. 또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선가에서는 일찍이 직계 제자에게 무소유의 상징인 스승의 옷과 밥그릇(의발)을 물러줌으로써 진정한 깨침에서 오는 행복의 법맥을 잇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인들의 음식에 대한 탐심은 어떤가? 동물은 자기 새끼라도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양보하는 법이 없지만, 일단 자기 배가 부르면 남은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가? 자신이 비록 배가 고프더라도 자식이나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양보도 하지만, 또 상당수는 배 불리 먹고 음식이 남아 버릴지언정 배고픈 사람들을 외면하기도 한다. 전자를 우리는 적선(積善)이라 부르고 후자를 동물(축생)보다 못한 지옥이나 아귀, 아수라 등 삼악도(三惡道)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북한이 대기근 사태가 났을 때 이를 외면한 남쪽에서는 해마다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느라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이는가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는 문제다.

최근 일본에서는 베이비 붐 세대를 중심으로 물건에 대한 집착을 끊고, 버리고, 떠난다는 뜻의 ‘단샤리(斷捨離)’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 일본 작가는 물건을 줄였을 뿐인데 12가지 변화가 생겼다며 예를 들면 쇼핑하지 않으니 시간이 생기고, 소유물을 두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등 단순하게 사는 장점들을 나열하고 있다. 일본의 이 같은 물질에 대한 절제 분위기는 17세기 겐신(源信) 스님의 “족하면 가난할지라도 부자이고, 부자일지라도 탐욕스러우면 가난한 사람이다”라는 글에서도 보듯 청빈한 삶에 대한 그들의 오랜 성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우리도 공자의 안빈낙도 중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 베고 누어도 즐거운” 마음을 기리는 조선의 청빈한 선비정신이 있었다. 또 얼마 전까지 귀에 익숙한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다 쓰기)운동도 단순한 소비 절약 차원에서는 바람직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 할인매장의 넘쳐나는 값싼 제품들 앞에 혼이 빠진 소비자들의 충동구매와 대량 소비풍조는 이러한 소비절약 운동을 무색하게 하고 다시 ‘소비가 미덕’인 사회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 세상에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왜 사냐고 묻는다면 아마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왜 불행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 왜 한국은 자살률이 높을까? 대학 취업준비생들은 취직을 못해서, 직장을 가진 사람은 월급이 적거나 언제 잘릴지 불안해서, 장사하는 사람은 돈벌이가 시원찮아서, 청춘 남녀는 애인을 못 만들어서, 늦게 결혼한 부부는 애기를 못 가져서, 노부부는 생활비 걱정으로, 혼자 사는 노인들은 몸이 아프거나 고독해서... 찾아보면 불행한 사람만큼 많은 불행한 사연들이 있다. 다음 등식을 한번 살펴보자.

행복지수=권력, 명예, 재화/욕망×100

위의 등식을 놓고 보면 당신의 행복지수는 얼마일까? 나눠야 할 욕망의 대상은 우리가 흔히 추구하는 극히 세속적인 행복의 조건들로, 바라는 만큼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이미 불행의 씨를 안고 있다. 더구나 권력을 쥐고, 명예와 재물까지 바란다면 그야 말로 '욕심이 대적'일 것이고, 성사되기 어렵지만 설사 이뤄진다 해도 언젠가 지탄받게 되고 그러한 욕망이 용인되는 사회나 국가는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도 불행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해 행복은 마음에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겐신 스님 말처럼 아무리 풍족한 생활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하고 불행하다. 따라서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권력이나 명예나 재물에 대한 욕망을 줄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금욕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탐욕이고, 탐심은 바로 마음에서 비롯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류의 스승들은 이 마음을 잘 다스릴 것을 주문한다.

마찬가지로 <장자>에서는 ‘심재’(心齋) 즉 마음을 굶기라고 말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인 이 마음 굶기기는 사람 없는 ‘빈 배’(虛舟)와 부딪쳤을 때는 마음이 비게 돼 다툼이 없는 예를 들고 있다. 그리하여 빈 배처럼 마음이 텅 빈 상태를 “저 빈 것을 보라/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행복은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사람 사는 세상, 심재 편)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一切唯心造)일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 세상이 지옥일 수 있고, 극락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먹기보다 더 쉽게 다가오는 말이 또 있다. 바로 ‘마음 비우기’ 이다. 말 그대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곳에 행복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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