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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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
  • 편집위원 장동범
  • 승인 2015.07.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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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정성 다해서 통일/통일을 이루자/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찾는데 통일/통일이여 어서 오라/통일이여 오라.

친일 행적 논란이 일었던 안석주 작사의 동요 <우리의 소원> 전문이다.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의 풍금(오르간) 반주에 맞춰 급우들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면서 까닭 없이 콧등이 찡하고 목매 더 힘껏 목청을 돋운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가사는 “이 정성 다해서”를 “이 목숨 다 바쳐”로, “통일을 이루자”를 “통일이여 오라”로 불렀다. 뒤에 가사를 바꾼 것은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막연히 통일을 기다리는 “~오라”의 수동적인 자세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띈 “정성 다해서…통일을 이루자”는 능동형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한다.

뜬금없이 초등학교 시절 불렀던 동요 가사를 소개하는 것은 올해로 한반도가 일제 강점기로부터 벗어나 독립한 지 70년이자, 남과 북이 갈라선 지 70년이 되지만 통일은 여전히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 안팎으로 엄청난 희생이 따랐고,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 고향땅을 끝내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실향민이 늘어나는데도 통일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은 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의 처지가 너무 안타깝고 한심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민족적) 소원’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과연 “꿈에도 소원은 통일”은 무슨 의미로 다가갈까? 통일은 그냥 ‘대박’이라는 얄팍하고 알량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개인이나 국가나 목표가 분명할 때 내부로부터 축적한 에너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국가적 아젠다(agenda)에 호응해 민주주의를 상당 기간 유보하면서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오로지 경제개발에 쏟아 부은 결과 오늘날 세계가 괄목할 발전을 이룩했다. 단군 이래 우리가 언제 이처럼 잘 먹고 잘 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도 잠시, 국민들 사이에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빈부격차와 부(富)의 세습과 편중현상이 심해지면서 양극화로 인한 사회 갈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충고는 순진한 생각일 뿐 대학 문을 나서는 순간 반듯한 직장과 결혼, 자식,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이른바 ‘사포세대’가 되고 마는 현실에서 희망이라는 말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남북통일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통일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0년 전 40.9%에 비해 절반 가까운 21%로 줄었다고 한다(리서치앤리서치 5월 15~16일 조사). 국민들의 이 같은 무관심은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지만 청년실업 증가와 통일비용 부담에 대한 우려, 그리고 통일을 꺼리는 기득권층과 보수언론들의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청년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통일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긍정적인 반응이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북한의 자원과 인력과 결합해 엄청난 경제적 시너지효과를 만들 주역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고학력 젊은 인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독일이 통일된 지 6년 쯤 지난 1996년 무렵, 전에 다니던 회사가 잘 나갈 때 공로연수로 독일 라인 강을 따라 여행하던 중 하이델베르크의 오래 된 통나무 맥주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술집 서브로 두 가지 일을 하는 ‘엘리자벳’이라는 아가씨가 주거니 받거니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는 우리 일행을 보고 말했다. “자기는 유니세프 회원으로 굶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 돕기 회비를 내고 있는데 같은 민족인 너희 남한 사람은 ‘북한 대기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론 경제학 공부를 위해 독일에 유학 온 가이드의 통역이었지만 좌중은 순간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고, 동족의 문제에 무관심했던 죄책감에 그 뚱뚱한 아가씨 이름을 20년 가까이 지난 여태 기억하고 있다. 술집을 파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가 곁들이는 말 또한 의미심장했다. 자신의 전공 분야와 관련해 독일 사람들의 생각은 한국이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는 것이 신기하고, 남북한 통일은 늦어질수록 통일비용은 그만큼 더 든다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 한 사람의 연간 소득이 남한 사람과 일정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드는 통일비용과 관련해 최근 ‘통일편익’이란 용어가 눈에 띈다. 사람들이 경제적 관점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문제인 만큼 우리의 통일비용에 대해 알아보니 독일 통일비용과 비교해 2조 달러 이상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남북한이 그 동안 과도하게 지출했던 국방비 등 분단비용이 크게 줄어들고,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북한의 지하자원과 노동력을 만나 연 11.25%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등 통일비용에서 분단비용을 뺀 통일편익은 앞으로 20년간 6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단순한 수치 비교에 따른 통일의 이점보다 눈에 띄는 부분은 한스 울리히 자이트 전 주한 독일대사의 말이다. 그는 지난 해 한 세미나에서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기만 하면 북한을 대상으로 남한기업들의 대규모 기술·인프라 투자가 이뤄져 25년 걸린 통일독일보다 훨씬 빠른 15~20년 안에 통일을 성공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전망을 바탕으로 한다면 통일은 경제적인 면에서 남과 북 모두를 살리는 ‘미래의 희망’이다.

필자는 운 좋게도 백두산을 두 번이나 갔다 왔다. 한 번은 중국과 수교하기 전 홍콩에서 심양, 연길을 경유하는 북파 코스로, 또 한 번은 압록강을 따라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서파 코스로 백두산에 올라 선명한 천지를 보면서 다시 기회가 온다면 북한 쪽으로 해서 중국의 장백산이 아닌 우리의 백두산을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첫 번째 백두산을 찾았을 때는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다물’(고토 회복)이란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두 번째 방문길에는 허물어져 가는 고구려의 옛 성터와 무덤과 함께 깜깜한 북한의 국경도시, 그리고 북녘의 벌거숭이산들이 눈에 한없이 밟혔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의 산하를 갈라놓고 황폐하게 만드는가?

한반도의 분단은 내부적인 요인보다 외부적인 요인이 더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미국과 옛 소련의 냉전체제에서 비롯한 한국전쟁은 결국 ‘분할통치’(divide and rule)라는 국제정치 역학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러 4대 강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역설적으로 자국의 이익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이들 나라는 어쩌면 남북한 통일을 진정 원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여기에다 정작 당사자인 남과 북은 서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하면서 통일을 위해 진지하게 대화하는 자리를 마다한지 오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북한의 세습정권은 체제옹호를 위해 핵무기개발이라는 위험한 곡예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14년 동안 중원을 떠돌며 ‘화이부동’(和而不同) 담론을 펼치지만 끝내 어느 나라도 자신의 정치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 노(魯)나라로 돌아가 여생을 교육에 받친다. 그의 ‘화동담론’의 핵심은 “전쟁을 통한 병합을 반대하고 큰 나라 작은 나라, 강한 나라 약한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라고 신영복 선생은 해석한다. 공자의 정치적 이상은 2,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담론을 남북한 통일문제에 대입시켜보면 어느 한쪽을 무력 또는 강제로 통합시켜 같게 하는 것(同)이 아니라, 교류협력을 통해 평화를 먼저 정착(和)시킨 뒤 하나의 정치체제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전제는 교류협력을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쓴 <나의 소원>(1947년 6월)에서 “나의 소원은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나눠질 것을 우려한 백범은 신탁통치와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1948년 38선을 넘어 평양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하자 돌아와 남북 공동정부 수립을 ‘3,000만 동포에게 울면서’ 촉구한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백범은 다음 해에 국군장교 총탄에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자주 독립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백범의 이러한 족적과 관련해 최근 남북 평화통일 행사의 하나로 압록강 주변을 둘러본 한 원로시인은 “통일은 발로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서 통일과 같은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후기 산업사회)의 한 현상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대학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속한 나라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해결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유분방함을 상징하는 ‘디지털 노마드’(디지털 유목민)로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디지털 기기만 있으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두렵지 않은 디지털 유목민이야 말로 폐쇄된 북한 사회가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살아가야 할 통일 대한민국의 영토는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자 약속의 땅이다.

다시 여행 이야기. 얼마 전 일본 홋카이도지방을 여행하면서 안 일이다. 나의 청년기에 가장 가슴 설레게 했던 "Boys, be ambitious!"(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명언은 윌리암 클라크 선생이 미국 어느 학교에서 한 말이 아니라 지금 삿포로 대학의 전신인 농업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임기를 마치고 물러가면서 한 고별 연설이었다. 그의 교육을 받은 수많은 학생들은 뒤에 일본 근대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여 눈앞에 보장된 직장이 없다고 좌절하거나 자식 낳기도 두려워 결혼도 포기하는 한국의 은둔형 젊은이들에게 묻는다.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다 바쳐 통일”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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