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푸라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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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푸라민’의 추억
  • 편집위원 장동범
  • 승인 2015.09.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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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손발은 날씨가 추워지면 늘 트고 갈라져 심하면 피가 삐죽삐죽 나기도 했다. 땀이 잘 나지 않는 마른 피부에다 시내 식당에서 일을 거들어주고 남은 음식물(잔반)을 양동이에 이고 비탈길을 걸어오시느라 손발이 거칠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가져온 잔반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돼지먹이였다. 이 잔반은 바로 돼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산 돼지에게 상극인 새우젓갈이나 못 먹는 헝겊, 나무 조각 등을 골라내고 연탄불에 데워 먹였다. 그러다가 키우는 돼지가 재래종 흑돼지에서 새끼를 많이 낳고 살집이 큰 외래종 ‘요크셔’ 암컷으로 바뀌고부터는 어머니가 가져오는 잔반으로 감당이 되지 않아 소주공장에서 술을 만들고 남은 주정 찌꺼기인 ‘아래기’를 사다가 겨와 섞어 먹이기 시작했다. 술기가 남은 사료를 먹은 돼지는 먹고 나면 술에 취해 자고, 깨면 또 먹고 해서 자연 살이 찌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이렇게 돼지를 키운 이유는 도시 노동자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4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기에 힘이 부쳐 입학금이나 등록금 등 목돈이 들거나 급하게 큰 돈이 필요할 때 키우던 돼지를 팔아 충당할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마산 변두리의 마당 넓은 우리 집은 돌담벼락에 함석지붕을 이고 돈사를 널찍하게 지어 어미돼지가 편하게 새끼를 낳고 살도 찌우도록 자리도 깨끗한 짚으로 자주 갈아주는 등 ‘동물복지’에도 신경을 각별하게 썼다. 하지만 먹이를 공급하는 일이 예사로 힘든 것이 아니어서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짐자전거로 잔반과 아래기를 실어 날라야 했다. 고등학교 때는 아침 일찍 두 말 들이 드럼통에 아래기를 싣고 와선 바로 학교에 가느라 겨울에도 교복이 땀에 흠뻑 젖기도 했다.

그렇게 철이 들 무렵 고생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연히 소염진통제인 ‘안티푸라민’ 한 통을 약국에서 사 드렸다. 멘톨의 알싸한 향도 특이했지만 간호사 얼굴과 버들상표의 동그란 초록색 캔에 든 연고는 손발과 입술이 트고 갈라진 데 뿐 아니라 무릎 관절도 안 좋은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흡족한 선물이어서 다 쓰고 바닥 모퉁이에 남은 것마저 성냥개비로 싹싹 긁어 남김없이 썼다. 그 뒤로 이 연고는 우리 집 가정상비약으로 자리 잡아 온 가족이 벌레에 물렸거나 부딪혀 멍들거나 상처 난 데 다투어 썼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입시를 앞둔 나는 새벽녘 눈꺼풀이 무거울 때마다 졸음방지용으로 눈언저리에 발라 잠을 쫓았고 감기 기운이 있으면 코밑에 바르기조차 했다.

글 도입부부터 너무 빙 둘러 특정 약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오늘날 대량 소비시대에 살면서 저마다 쓴지 오래거나 애용품에 대한 감회 하나 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어서이다. 특히 이 약에 대한 남다른 소회는 제품 자체에서 비롯해 약을 만든 회사와 창업주의 경영 철학과 관련이 있다. 내가 새삼 이 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 때였다. 당시 새로 창당한 정당의 문국현 후보는 노동자와 기업, 국민과 국가가 모두 다 잘 될 수 있는 ‘윈윈 전략’을 자신이 일했던 회사의 성공 사례로 소개해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90년대 들어 외국기업들이 잇따라 한국시장에 진출하며 경쟁이 심해져 시장 점유율 80%였던 유한킴벌리는 점유율이 20%까지 떨어지며 노동자 절반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물론 노사관계도 초긴장 국면의 연속이었다. 회사가 경영이 어려우면 대부분 구조조정 등을 통해 사람을 잘라내는 것이 다반사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대량 해고대신 낡은 생산 라인을 감축하고 인력을 4조 2교대, 즉 두 조가 하루 12시간씩 나흘 일하고, 나머지 두 조는 그 나흘을 쉬는 방식으로 일을 나누도록 했다. 그렇게 쉬는 조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재충전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산업재해는 줄고, 품질은 높아졌으며, 신제품 개발 속도는 빨라졌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회사의 위기 타개책에 조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진 지식 노동자로 바뀌면서 시장 점유율을 60%까지 회복하며 1조원 매출기업으로 성장해 100조원 매출의 세계적 거대기업을 이기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문국현은 또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90년대 초 독일의 ‘일자리 나누기’를 예로 들며 우리 기업도 경영위기가 왔을 때 노동자를 해고하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이고 줄어든 임금의 일정액을 국가가 실업수당대신 보전해주면 제조업 분야에서만 적어도 300만 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세계 최장인 우리의 연간 노동시간을 30% 정도만 줄여 일자리를 나누면 그만큼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국현의 이러한 경영관은 유한의 창업주로부터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유일한 박사(1895~1971)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깨인 아버지 때문에 9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유일한은 원래 이름이 ‘일형’이었지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료 직원이 발음하기 어려워 ‘일한’으로 자꾸 부르자 한국을 절대 잊지 말자는 다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학을 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유일한은 미주지역 한인단체들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자립 등 민족자본 형성이 시급함을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사업자금을 마련한 31세 되던 1926년, 헐벗고 굶주린 조국을 위해 기업을 일궈 보답하자는 의미에서 자기 이름에서 따온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버들을 로고로 사용했다. 이 로고는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조직한 서재필이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라”는 뜻에서 만들어 선물한 것이라 한다.

유한양행은 처음에는 주로 약을 수입해 팔았지만 1933년 국내 제조 의약품 1호로 소염진통제인 안티푸라민을 개발해 팔기 시작하면서 최근 이 제품 하나만도 연간 매출 100억 원의 대표적인 토종 장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장해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정확한 용도와, 약을 개발하고 제조한 사람을 실명으로 밝혀 신뢰를 꾸준하게 쌓아나간 결과였다. 나아가 이 회사는 1936년 1주에 50원씩 모두 1만 주의 주식을 발행해 자본금 50만 원의 주식회사로 바꾸면서 직원 77명 가운데 창업주를 포함해 24명을 주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사원 지주제를 시행한다. 기업의 이익을 오너 일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과 주주들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50~60년대를 지나면서 정경유착이 관례적으로 이뤄지던 시절, 유일한은 정치자금을 일체 제공하지 않아 여러 차례 세무사찰을 받았으나 너무 성실하게 장부를 정리하고 세금을 납부해 오히려 표창까지 받았다.

유일한 박사의 대표적인 일화는 국내 최초로 전문 경영인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1969년 사장 자리를 떠나면서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고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더구나 세상을 떠나면서는 손녀의 학교 등록금을 제외한 재산 전액을 재단에 기부했다. 자식들에게 “대학까지 공부시켜주었으니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기부한 재산은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50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로부터 등록금을 유산으로 받은 손녀는 그 등록금의 반만 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했으며, 부전자전으로 딸도 20년 뒤 전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다소 장황하지만 유한양행 창업주의 일대기와 그의 업적, 그리고 관련 기업의 사례와 최근 우리나라 경제 현실 등을 비교해봤다. 필자는 경제와 관련해 문외한이지만 작금의 우리나라 경제 현실과 소위 재벌이라고 부르는 한국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경영 형태, 부의 세습, 탈세, 양극화, 고용 없는 성장 문제 등을 유일한이 남겨놓고 간 몇몇 사례들과 대비해보면 정말 생각할 바가 많다.

우선 가장 최근에 불거진 ‘롯데 형제들의 난’부터 살펴보자. 껌 하나로 시작해 재계 5위에 오른 롯데 그룹은 소유와 경영에서 순환 출자라는 난수표의 소유구조 때문에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가장 많이 드는 지배구조이다. 게다가 명예회장은 우리말이 서툰 두 아들에게 경영권 위임을 놓고 말 한 마디에 승계 구조가 달라지는 노탐(老貪)의 황제경영이라는 구태를 연출하며 롯데가 진정 한국기업인지, 일본 기업인지 정체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또 재계 1위이자 세계 일류기업을 지향한다는 삼성은 어떤가? 북한의 3대 세습을 빼다 박은 우리 재벌들의 세습 체제를 대표하는 삼성은 창업주 자식들 간 상속을 둘러싼 법정 분쟁까지 일삼다가 얼마 전 장남은 고인이 되고 그 아들은 아직 감옥에 있으며, 그와 다투던 동생은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다. 자신의 재산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도 모르는 재벌의 2세, 3세 상속자들을 항간에서는 부러워 하지만 탐욕은 끝없이 이어지며 또 다른 우스개 퀴즈도 떠돈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본인은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고, 여동생 한 명은 자살했고, 또 다른 여동생 한 명은 이혼 소송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 이야기다.

현대가 형제들의 다툼인 ‘왕자들의 난’은 벌써 아득하고, 아들이 맞고 들어오자 분을 못 사귄 그 아버지가 대신 패준 한화 총수의 이야기라든지, 매 값을 주고 야구 방망이를 휘둔 어느 재벌의 조직폭력배에 준하는 행태는 최근 영화 소재로도 국민들에게 충분히 어필했다. 또 두산그룹 형제들의 다툼 등 한국의 대표적인 10대 재벌가만 놓고 보아도 경영권과 재산 상속을 놓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우리의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SK 회장 형제의 거액 횡령사건이나 ‘땅콩 회항‘으로 대외적으로 망신살을 뻗힌 대한항공 젊은 부사장의 ’갑질 논란‘ 등등...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서 이윤의 사회 환원은 기업인 개인의 도덕적 가치관에 따른 딴 나라 이야기로 치고, 정치권의 경제정의 실천과 경제민주화는 구두선(口頭禪)으로 남기자. 그러나 일정한 수준의 고용 유지와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정경분리, 성실 납세 등은 기업 고유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이다.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그룹 상호간 순환 출자를 통해 경영권을 세습한다든지, 정치자금 제공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쇠고랑을 차는 기업인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이 세금을 원천 징수당하는 데 비해 상당수 대기업들이 이름도 낯선 해외 섬나라에 종이에만 있는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세금을 회피하는 짓은 땀 흘려 성실하게 사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애국자들을 허탈하게 한다. 또 대기업이 노동자들이 땀 흘려 벌어들인 이익 잉여금을 재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는 현실도 한심하다.

나는 가끔 관절이 안 좋거나 모기에 물리면 예의 소염진통제를 바르며 오래 전에 만병통치약처럼 온가족이 즐겨 사용했던 시절, 그 약을 만든 한 기업인과 오늘에도 여전히 본보기가 되는 그 기업인의 경영 철학을 되새기며,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천국 가기 더 어려운 부자’라는 이 땅의 존재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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