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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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 편집위원 장동범
  • 승인 2015.05.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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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는 세계에서 오직 한 곳밖에 없는 관광 명소가 있다. 바로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이다. 1955년 유엔총회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16개 참전국 전몰장병들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이곳을 영구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3만여㎡(4만여 평)의 드넓은 터에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462기의 무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터키를 비롯해 11개국에 모두 2,300기의 전몰장병 유해가 안치돼 있는 묘역과, 기념관, 추모관, 위령탑 등 각종 상징물이 잘 다듬은 수목들과 어울려, 이곳은 묘지라기보다 차라리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원을 연상하게 한다.

필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과 인근 수목원, 평화공원을 아울러 산책도 하고 벤치에 앉아 쉬면서 이역만리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했다가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젊은이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특히 3만 3,000명이 넘는 미군 전사자를 포함해 4만여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 추모명비를 보노라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유족들이 겪었을 슬픔과 함께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참혹한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라도 막아야 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유엔기념공원은 너무나 잘 관리되고 정돈된 ‘혼령들의 집’(유택幽宅)이기에 이들의 죽음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전쟁터에서 귀중한 목숨을 잃었지만 죽은 자에 대한 예우와 철저한 사후 관리를 통해 이곳을 찾는 유족들과 참전국에 대해 자부심까지 심어주기 때문이다.

사람의 죽음에는 병들거나 나이가 들어 자연히 숨을 멈추는 자연사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그리고 교통사고나 전쟁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목숨이 끊어지는 돌연사가 있다. 갑작스런 죽음 중에 특히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될 경우 본인뿐 아니라 유족들에게 애통하기 짝이 없는 한을 남긴다. 때문에 전사의 경우, 국가가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명과 함께 합당한 보상이 이뤄질 때 국민의 애국심을 요구할 수 있다. 또 죽음에 의문이 드는 경우, 국가는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과 책임 여부를 분명하게 가려줄 의무가 있다. 그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경찰국가로써의 1차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 해 4월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TV 생중계를 통해 온 국민이, 아니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대한민국의 현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그 동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는 힐난을 들었던 공권력은 서서히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있던 304명의 승객들을 끝내 구조하지 못했다. 또 사고가 난 지 1년 넘도록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유족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대정부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또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도 ‘트라우마,’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 한다. <시빅뉴스> 보도에 따르면, 생존학생의 한 학부모는 인터뷰에서 “아이들은 가장 추억이 많아야 할 고교 생활을 통째로 잃었다. 같이 뛰놀던 친한 친구들을 다 잃었다. 아이의 원래 꿈은 해경이었다. 근데 해경은 단 한 친구도 구조해 주지 않았다. 요즘 아이가 ‘공부는 해서 뭘 하나, 나는 꿈이 없다’고 말한다. 생존자 부모님들은 공부하라는 소리는 못한다. 그저 내 옆에서 숨 쉬고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2015년 4월 11일자 기사).  또 다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국가적 재앙이 일어나면 죽은 자와 실종자 유족 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과 그 가족까지 모두 한 굴레에서 비극이 비극으로 이어지고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있을 만큼 세월이 지나면서 무뎌지는 성질이기도 하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가장 큰 슬픔은 자식 앞세우는 것이다. 오죽하면 죽은 자식은 부모 가슴에 묻는다 하겠는가. 어떤 위로의 말도 자식 잃은 부모의 참척(慘慽)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없다. 내가 아는 부부는 몇 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27세 외동아들을 잃었다. 대학 재학 중, 군 복무를 마친 아들이 제대 선물로 통학용 오토바이를 하도 사달라고 해 사줬는데, 그만 사고를 당하자 한동안 충격과 고통 속에 헤어나질 못했다. 종교를 통해 어느 정도 안정된 뒤 그 부부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래도 아들이 27년 동안 자신들 곁에 있어주어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불행 중에도 그나마 자식과 산 나날을 위로로 삼은 것이다.

나는 10여 년 전, 아이들 진로문제 등으로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던 아내의 제안으로 경북 안동의 어느 절에 하루 밤 묵은 적이 있었다. 저녁 공양 후 주지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불교 공부를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불교는 공부해서 아는 학문이 아니라 생노병사의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그 후 불교 관련 책들을 몇 권 뒤적이며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 즉 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괴로움의 정체와 원인,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과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어렴풋이 터득하면서 그 스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나면 끝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치는 상식이지만 산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찬 숙명이어서 불교에서도 죽음의 문제를 항상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붓다(깨달은 이)가 인도 사위성 기원정사에 있을 때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찾아와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붓다는 그 여인을 가만히 보더니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을 얻어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성안에 들어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던 이 여인은 결국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단 한 군데도 없고,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견도) 불법에 귀의했다. 이처럼 죽음의 수용문제는 결국 살아남은 사람의 몫이다. 때문에 타당한 죽음은 유족들이 빨리 잊어주어야 죽은 이도 편히 제 갈 길을 갈 수 있다. 문제는 억울한 죽음이다. 억울한 죽음에 대해 적절한 해명이 없으면 죽은 자나 유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한이 맺힌다. 밀양지방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랑의 전설’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랑이 귀신이 되어서도 새로 부임하는 사또에게 원한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바닷가에서 죽 살아온 나는 해마다 봄철에는 배를 타고 섬 지방을 여행한다. 동백꽃을 보거나 낚시를 좋아하는 서울 친구와 1년에 한두 번 섬에서 만나기 위해서이다. 몇 주 전에는 통영 가오치항에서 카페리로 사량도에 건너갔다. 다도해의 뱃길은 비교적 물결이 잔잔한 편이지만 이날은 배가 항구를 벗어나자 거센 바람과 함께 풍랑이 높게 일면서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순간 울컥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찌푸린 날씨 탓에 검푸른 바다 색깔이 어떤 이미지와 겹쳤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읽었던 엔도 슈사쿠(1923~1996)의 소설 <깊은 강>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이 소설가는 대표작 <침묵>과 앞의 소설 2권을 무덤에 넣어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
-침묵의 비(碑)

신영복 선생은 그가 즐겨 쓰는 붓글씨 문체의 <함께 맞는 비>에서 “비를 맞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는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말한다. 관계의 완전한 회복은 상대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하는 일에서 출발함을 뜻한다. “세월호를 꼭 돈을 많이 들여 인양해야 하나?”라는 의문은 원인 규명과 유해 인양을 간절하게 바라는 유족들의 입장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한다.

해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면 대한민국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와 함께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현충일을 비롯한 추모 의식에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정말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억울한 죽음.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짙푸른 바다 속으로 침몰해간 꽃다운 나이의 억울한 떼죽음. 애통해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국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침몰한 배이름처럼 ‘세월이 약’이 아니라 신영복 선생의 호소처럼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는” 진정한 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나치 치하에서 함께 저항활동을 하다 체포돼 처형된 동지들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억울한 죽음을 막거나 함께 하지 못한 양심의 발로였기에 울림 또한 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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