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문화보국(文化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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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문화보국(文化保國)
  • 편집위원 장동범
  • 승인 2014.10.2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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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도 서울 사람들이 흔히 지방이나 간혹 시골로도 부르는 수도권이 아닌 곳에 사는 나로서 서울 사람들이 부러운 게 하나 있다. 바로 서울 사람 가까이에 있는 문화공간들이다. 같은 서울이라도 강남보다 강북의 사대문 안은 그래도 가끔 서울에 가면 낯익은 건물과 거리 모습에 소외감이 덜하고, 특히 성북동은 16년 전 마음먹고 찾은 한 공간 때문에 유난히 인상 깊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자신 앞으로 남겨진 쌀 10만 석(소출 기준, 1석은 두 가마) 재산으로 모은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수장하고 있는 문화공간이 바로 간송 미술관이다.

전형필 선생은 국문학도였던 필자가 학창시절 우리 민족 최대의 문화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을 어렵게 찾아내 광복 후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우수성을 널리 알린 인물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그가 모은 서화와 도자기, 전적(典籍), 불상, 골동품, 석물 등 수많은 수장품은 미술관 측이 1970년대 들어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여는 기획 전시를 통해 차츰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8년 10월, 한국 최초의 사설 박물관이자 간송 미술관의 다른 이름인 보화각(葆華閣) 설립 60주년에 맞춰 찾았을 때, 눈여겨 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혜원 신윤복의 화첩은 그림 속의 풍경과 인물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와 원화가 주는 감동을 나는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중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자칫 매국노 송병준의 집 아궁이에서 불쏘시개 감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한 거간꾼이 극적으로 건져내 간송의 손에 들어간 일화로 유명한데, 이는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과 보관, 관리에 그동안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보여준다. 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국보 제135호)의 그림 30점은 간송이 1936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2만 5000원에 일본인 화상으로부터 구입했다. 당시 서울의 반듯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니 요즘 시세로 치면 한옥 한 채 값을 적게 잡아 3억 원으로 쳐도 물경 75억 원의 큰돈으로 사들인 셈이다. 또 심사정의 두루마리 그림 대작 〈촉잔도(蜀棧道)〉는 5000원에 사들였고, 사들인 가격에 1000원을 더 보태 6000원을 들여 좀 등이 먹어 삭은 것을 복원하기도 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으로 당시 조선 10대 지주 중 한 명이었다지만, 이처럼 큰 돈을 들여 서화를 모으고 애써 관리하는 간송의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큰 배포를 우리가 엿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혼이 서린 귀중한 문화재들이 속수무책으로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간송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라도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명품 위주의 작품들을 주로 수집했는데, 1937년 영국인 수집가로부터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보물 제286호)을 비롯한 고려청자 20여 점을 일괄해서 사기 위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급히 처분해 모은 40만 원(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 지금 돈으로 환산해 1200여 억 원에 사들이기도 해 그의 문화보국(文化保國)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나를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모은 ‘간송 컬렉션’은 국보로 지정된 것이 12점, 보물 10점, 그리고 서울시 지정 문화재 등을 포함해 정확히 얼마나 소장되고 있는지 알려진 바 없다. 간송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이 평생 모은 귀중한 소장품들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며 피난길에 나선 와중에도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수중에 지니고 다녔으며, 잘 때도 베개 속에 넣고 잘 만큼 애지중지했다. 그 결과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사후 35년 만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한 수집가의 뜻이 나라의 품격을 매우 드높였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간송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출품된 22점의 국보와 보물을 보면서 전형필의 일대기를 쓰겠다고 결심한 재미 소설가 이충렬은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을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전형필은 밤이 새도록 〈훈민정음〉을 읽고 또 읽었다.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발굴된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전형필이 수집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성취한 대발굴이었기에, 눈물을 흘리다가는 웃었고, 웃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갈무리했다(소설 <간송 전형필〉 중)."

한 사설 박물관에 얽힌 이야기를 너무 자세히 끌고 갔다. 그러나 이처럼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 것은 한 개인의 부(富)와 우리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는 5000년 찬란한 역사의 문화유산인 각종 문화재의 훼손과 해외 유출이 심해 약탈당했거나 밀반출된 문화재가 7만점이 넘고, 그중 일본으로 흘러 간 것이 3만 3000여 건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밀반출되거나 흩어져 사라질 위기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수집 보관하고 있는 간송 컬렉션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미술사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문화재의 정수(精髓)만을 소장한 간송 미술관이 갖는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수집하기로 결심한 것은 고교 시절 미술교사였던 고희동 선생과 평생의 스승인 위창 오세창 선생의 영향이 컸다. 3·1 독립선언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은 평소 간송에게 문화보국을 강조해왔고 그 결실인 미술관이 완성되자 지석 비문에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라는 친필을 새겨 넣으며 보화각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또 정확한 감식안을 가지고 각종 미술품 거래를 성사시킨 이순황과 일본인 신보, 그리고 일제의 착취에 곤궁해진 유림과 양반집에서 헐값에 쏟아져 나오는 서적들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한남서림을 인수한 것 등이 간송 미술관이 생기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또 미술관을 짓는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근대 박물관의 아버지 혜곡 최순우 선생과 오늘날의 간송 컬렉션을 체계화시킨 최완수 등 주위 유공 인물을이 많다.

다시 글머리로 돌아가, 나는 10월 문화의 달을 맞아 그 간송 미술관이 올 가을에도 추사 김정희의 서예품을 주제로 ‘추사 정화’(秋史 精華)라는 이름의 무료 전시회를 연다고 해 오랜만에 마음먹고 서울 나들이를 하겠다며 정해진 시간에 전화 예약을 시도했으나 통화 폭주로 끝내 실패했고, 인터넷 예약도 시작되자마자 전 기간 예약이 차버려 정중히 거절당했다. 지난 봄 새로 단장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미술관 개관 이후 처음으로 바깥나들이를 한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나자 간송 미술품의 정수가 일반인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전부터 한번 쯤 가보기로 마음먹은 같은 성북동의 길상사를 택했다. 개인 일도 볼 겸 해서 2박 3일 일정으로 천리 길을 차로 달렸다.

길상사는 젊은 시절 시인 백석이 자야(子夜)라고 부른 애인 김영한(법명 길상화, 1916~1999)이 대원각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한 대규모 요정으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따라 1997년 7000여 평의 터와 40여 채의 건물을 염주 한 벌과 맞바꾸어 화제가 됐었다. 그의 법명 길상화를 따 ‘맑고 향기로운 도량’ 길상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길상화 보살은 1000억 원대의 재산을 시주하면서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며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 뒤뜰에 뿌려 달라”는 아름다운 유언을 남김에 따라, 1999년 눈 오는 날 한 줌 재로 돌아갔다. 나는 길상사를 찾아 경내를 한 바퀴 돈 뒤 그의 공덕비 앞에 서서 ‘주었다는 생각조차 없는’ 무주상 보시(無住相 布施)를 생각했고, 끝내 이룰 수 없었던 러브 스토리를 비석 설명문에 적나라하게 표현한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고 또 읽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내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내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내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서울 성북동은 서울 사람들에게도 잘 안 알려진 곳이다. 서울 성곽을 끼고 북악산을 등진 곳이다 보니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최순우 선생 옛집부터 시작해 만해 한용운 선사가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살았다는 심우장, 화가 김환기, 미술사가 김용준의 집터, 최근 한중 정상들이 찾은 한국가구박물관, 길상사, 간송미술관 등등 한국 인문학의 스토리텔링이 넘치는 문화공간이 줄지어 있다. 문화의 향기는 알고 찾을수록 더욱 짙어지는 법. 따라서 박완서의 표현대로 “얌전하게 쪽 찐 노부인처럼 적당히 품위 있고 적당히 퇴락한 조선 기와집”(소설 〈그 남자네 집〉 중)이 드문드문 있는 성북동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문화의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인문학 터전들을 시간에 쫓기지 않고 더 나이 들기 전에 찾아봐야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안복(眼福), 즉 눈이 호사하는 경험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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