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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6): 스페인 투우, 한국 소싸움은 문화 다양성 아닌 문화 온전성의 문제美~女~文 Amenity, Feminism and Lifeway / 칼럼리스트 박기철
  • 칼럼리스트 박기철
  • 승인 2017.12.1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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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총, 균, 쇠>처럼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정복했던 역사와 달리 생태문명 차원에서 이제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의 제안이다.

 

생명의 욕구를 아름답게 나타내는 춤

칼럼리스트 박기철

춤을 뜻하는 dance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 탄하(tanha)에서 왔다. 생명의 욕구인 탄하를 몸짓으로 보여주는 것이 댄스다. 춤이라는 우리말은 집안의 아궁이로부터 집 밖의 굴뚝으로 연기가 쏟아져 나오는 ‘처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이렇듯 생명의 욕구가 안에서 밖으로 분출되는 것이 바로 댄스이며 춤이다. 무용(舞踊)은 양발(舛)을 엇갈리게 발(足)을 움직이는 행위로 20세기초에 dance를 번역한 일본식 한자어다. 춤, dance, 舞踊은 인류의 원초적 예술행위였다. 원시인들이 몸집이 큰 짐승을 잡아 실컷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분이 좋아 몸을 흔들며 앞으로도 사냥을 더욱 잘 하게 해달라며 비는 행위가 춤이었다. 이런 주술행위로서의 춤은 예술행위로 승화되었다.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여인들을 보니 생명의 욕구가 진하게 느껴지며 아름다움도 느껴진다. 보고만 있어도 미적 쾌감인 미감(amenity)이 그루브(groove, 신나다)한 율동으로 진동되어 온다.

생명의 욕구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춤(사진: 박기철 제공)

 

 

 

문화의 다양성을 넘는 문화의 온전성

나는 여행을 하면서 박물관이나 유적지 입장을 웬만하면 안하는 편이다. 그런 곳보다 길거리나 골목길을 걸으며 다니는 것이 더 그 나라의 문화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별히 투우장을 들어갔다. 웬지 스페인 하면 투우장을 꼭 가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투우가 어떤 것인지 가보고 싶기도 했다. 관광객을 위한 투우로 전락했다고 해도 큰 맘 먹고 가서 보았다. 가장 윗자리 3층에 햇빛이 안들어오는 좌석에 자리잡으니 투우장에 온 것이 실감났다. 팡파레가 울리며 뭔가 저들의 의식이 끝나더니 검정 숫소 한 마리가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이 둥그런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에 24시간 동안 껌껌한 곳에 있다 갑자기 밝은 곳에 오니 눈이 부셔 앞이 잘 안보이는 상태란다. 보조 투우사들이 흔들어 대며 유인하는 붉은 망토만 보인단다. 

순진무구하게 등장한 수소(사진: 박기철 제공)

그러더니 말탄 투우사(picador)가 긴 창으로 소의 등을 두 번나 찌르고 후비며 퇴장했다. 이제 세 명의 투우사(banderillero)들이 차례대로 쌍작살을 소 등에 여섯 개나 꼽았다. 마지막으로 펜싱 칼 비슷한 것을 들고 나온 투우사(matador)가 소를 이리저리 묘기를 부리며 유인하다 결정적 순간에 소 정수리에 칼을 꼽았다. 이 걸 멋지게 잘하며 소를 쓰러트려야 스타급 투우사가 된단다. 상대를 공격하려는 검은 속셈을 숨기고 터무늬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흑색선전인 마타도어는 바로 칼을 붉은 망토 뒤에 숨기며 소를 유린(蹂躪)하는 마타도어에서 온 낱말이다. 한 번에 안되면 두 번 세 번 시도하며 결국 소는 온 몸이 피 범벅이 되고 입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 때 더 빨리 숨을 끊게 하려고 작은 칼을 소의 머리에 찔러 넣더니 소는 숨을 거두었다. 중간중간마다 스페인 사람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고 손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며 큰 소리 치며 환호했다. 도무지 뭐가 그리 좋다고 그러는지 속을 모르겠다. 이제 죽은 소를 말 세 마리가 질질 끌고 가더니 바닥에 쏟은 소의 피자국을 빗자루로 뭉그러뜨리며 없앴다. 투우장에서 도살된 소는 도축되어 고기로 팔리는데 고기로 사육되지 않은 수소이기에 고기맛이 질기니 맛은 별로 없단다.

투우 한 판이 끝날 때의 장면(사진: 박기철 제공)

투우를 한 판 보고나니 별로 더 보고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냥 가려다가 끝에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해 똑같은 식의 투우를 약 20분씩 6판이나 하는 것을 2시간이나 보고 다 끝났다고 하길래 일어섰다.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대한 좋았던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스페니쉬들은 이런 잔인함을 가지고 1500년대에 중남미 대륙의 원주민을 약탈했다 싶었다. 스페인 와서 이런 잔인한 투우를 보았다는 게 창피해지기도 했다.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려고도 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스페인에서도 투우의 인기가 사라자며 바르셀로나와 같은 몇몇 도시에서는 투우를 폐지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식용으로 길러지는 소는 더욱 잔인하게 사육되며 도살되니 이들의 투우 문화를 대놓고 욕할 수도 없는 처지다. 투우를 위해 길러지는 소는 5년 동안 좋은 시설에서 잘 먹고 건강하게 사육되고 투우로 훈련되며 길러지다 이날 결정적으로 20분 안에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먹는 소는 오로지 고기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잔혹하게 길러지다 1~2년 정도 자라다 집단 도축된다. 또 우리 코리안은 집에서 기르던 개도 잡아 먹는 주제에 이들의 투우 문화를 뭐라고 어쩔 수도 없다. 또 우리는 같은 동족인 소들끼리 격한 싸움을 시키며 돈을 걸며 환호하는 소싸움을 하니 인간이 목숨을 걸며 소와 정면으로 묘기를 부리며 싸우는 것과 비교해서 무엇이 더 소에게 잔혹한 것인지 생각하게도 되었다.

결국 투우를 실제로 보고나니 문화의 다양성을 떠나 문화의 온전성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잔인한 투우 장면을 보고 아무리 마타도어가 화려한 묘기를 선보인다고 해도 전혀 아름답다는 미감(美感)을 느끼지 못하듯이 스페니쉬들도 소들끼리 싸우는 소싸움에 별로 미감을 가지지 못하며 또한 개를 가지고 아무리 맛있게 요리해도 전혀 맛있다는 미감(味感)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소는 물론 닭, 돼지 등을 잔혹하게 사육하는 입장이니 서로 뭐라 할 말들이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뭔가 동물에 관해 전환적 관점을 가져야 할 때다. 리프킨(Rifkin, 1993)이 간파한 대로 육식의 종말이 도래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그는 동물 보호의 온정성 측면보다 식량 수급의 효율성 차원에서 그리 주장하는 것이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동물에 관한 우리의 관점과 생각과 행동을 전반적으로 온전하게 전환해야 할 때다. 이 또한 인류문명 대전환이 되는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삶의 문화를 생각하니 그렇다. 

칼럼리스트 박기철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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