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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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②
  • 칼럼리스트 박기철
  • 승인 2017.03.28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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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女~文: Amenity, Feminism and Lifeway / 칼럼리스트 박기철

[필자주] 다음 글은 <총균쇠>처럼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정복했던 역사와 달리 생태문명 차원에서 이제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의 제안이다.

승리와 패배에 연연하지 않는 삶

포르투갈과 웨일즈와의 축구경기에서 호날두가 골을 넣어 승리하자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포르투갈 소녀(사진: 박기철 제공).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을 때, 마침 유로 2016 토너먼트 4강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웨일즈와의 경기였다. 거의 모든 음식점에는 TV로 중계방송을 틀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대형 화면으로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꼭 우리가 월드컵 보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리도 우리랑 똑같은지 너무도 신기했다. 결국 2:0으로 포르투갈이 이겼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호날두가 두 번째 골을 넣었다. 그렇게 이기고 나니 길거리 여기저기서 차량 경적이 울렸다. 청년들은 승리한 전사라도 되는 양 큰소리를 치며 활개치며 다녔다.

마침 내가 들어간 빵집에서 이마에 "PORTUGAL"이라고 쓴 소녀가 가게에 나타났다. 이쁜 포르투갈 소녀다. 이방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귀엽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정도되었을 어린 아이다. 이 소녀도 자기네 나라가 이기니 무척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일 잉글랜드 옆 웨일즈에 있었다면,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저 나이 또래 어린 소녀는 경기를 보고 무척 아쉬웠을 것이다. 승부를 가리는 경기에서 한 쪽이 승리하여 기쁘면 다른 한 쪽은 패배하여 슬프다. 20세기 전반기에 1차대전과 2차대전이 일어났던 참혹한 전쟁터인 유럽 땅에서 축구는 전쟁을 대리하는 경기처럼 치러지는 건 아닐까? 물론 축구는 승부를 정정당당하게 가리는 스포츠지만 거친 남자들의 격렬한 경기에 어린 소녀가 승리와 패배 결과에 따라 희희비비하는 것은 왠지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오늘은 이겼지만 또 앞으로 어느 경기에서는 분명히 지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맑은 소녀의 마음이 맑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삶의 문화인 美~女~文의 관점에서 오늘의 승리와 패배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는 길은 없을까? 명쾌한 답이 거의 없을 듯한 이 질문에 분명한 정답이 아닌 가능한 해답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이 궁극적 목적이다. 그렇게 하여 이 소녀도 늘 항상 언제나 크게 우울해지지 않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같이 찾는 것이 이 책이 가고자 하는 길이다. 글쎄 과연 그린 길이 있기나 한 걸까? 이 글을 쓰는 나도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1%의 가능성이라고 있다고 여기며 한 번 찾고자 한다.

남자들이 만든 경이로운 비행기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공항과 가깝기에 하늘 위로 수시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지하철을 타려고 Praςa de Espanha 지하철역을 들어 가려는데 또 비행기가 떴다. 지상에서 비행기 찍으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마구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여러 개 찍은 사진들 중에서 하나의 사진에 새가 한 마리 같이 찍혔다. 둘의 비행 방향이 엇비슷하다. 참으로 우연하게 포착한 절묘한 순간이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이 말한 ‘결정적 순간(Images ὰ la sauvette)'이다. 이를 영어로는 'decisive moment'라 하는데 마케팅 용어로 'Moment of Truth' 즉 진실의 순간이라고도 한다. 겨우 우연히 찍힌 사진 가지고 대단한 것인 양 떠든다고 할 수 있지만 비행기와 새가 나온 사진이 너무 신기해서 어린 마음으로 하는 헛소리다.

포르투갈 여행 중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찍을 때 우연히 새가 한 마리 찍혔다(사진: 박기철 제공).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만든 물건들 중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비행기다. 이미 1969년에 로켓을 타고 달에도 첫발을 내딛고 돌아오며 우주선이 목성의 궤도에 진입하는 시대에 그깟 비행기가 뭐 그리 신기하냐고 하겠지만 비행기 만큼 신기하지는 않다. 그것들은 사람이 서너명이 타며, 또는 사람이 타지 않는 무인기다. 하지만 비행기에는 사람이 탄다. 수백 명 승객과 수천 톤 화물을 실은 엄청난 무게의 금속체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는 과학적 원리가 베르누이 정리다. 유체 속력이 빠를수록 압력은 낮아지고 느릴수록 높아진다는 원리다. 비행기 날개는 그 원리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重力, weight)과 반대로 위로 뜨는 양력(揚力, lift)이 생기게끔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아무리 물리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해도 비행기가 떠오르며 날아 가는 것은 신기신비하며 신통방통하다. 늘 놀랍다.

이런 모든 경이로운 물건들을 만든 사람들은 대개 거의 남자들이다. 비행기나 배는 물론 거대한 다리를 만들고 초고층 건물을 지으며 중후장대한 기계장비들을 만드는 남자들의 의지와 능력은 정말로 대단하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가 올 데까지 온 것같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정도다. 이제 남자들이 이루어온 문명세계를 기반으로 여자들의 섬세하고 유연한 의지와 능력이 더욱 발휘될 때다. 남자들이 중후장대하며 강하고 단단한 것을 이루어 왔던 역사(歷史)는 이제 그만 쉬며 여자들이 부드럽고 따뜻한 역사(役事)를 이루어 갈 때가 도래했다.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삶의 문화인 美~女~文의 시대가 왔다. 남자들이 이루어온 마초적 힘이 관성력에 의하여 아직까지는 끊기지는 않고 있으나 이제 서서히 그 기운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페미니즘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남자들의 야망과 여자들의 소망

마르코 폴로(1254~1324)는 17세 때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이탈리아를 떠나 동쪽으로 여행했다. 원나라였던 중국에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가 되어 16년간 머물렀다. 왕복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 당시에 마르코 폴로 말고도 여러 유럽인들이 그렇게 중국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는 다녀온 24년간의 기록을 남김으로서 역사에 남았다. 바로 <The Description of the World>다. 제목으로 보아 마르코폴로는 동쪽 세계 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관한 서술을 하려 했던 것같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동방견문록>이라 번역했다. 이 책은 유럽의 서양인들로 하여금 야망을 일깨웠다.

이제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그 이전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바이킹들도 콜럼버스가 갔던 곳을 배로 왔다가긴 했다지만 그들은 그냥 왔다가 그냥 갔기에 후세에 영향을 준 족적이 없었다. 명나라 때 정화(鄭和, 1371~1433)가 수백 척의 배와 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남해 원정을 몇 번이나 갔다지만 그냥 왔다 간 것으로 끝났기에 역사적 영향력이 미비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출생과 사망연도가 거의 엇비슷하게 겹치는 네 명의 인물이 갔던 탐험은 역사에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동쪽 세상에 관한 환상을 꿈꾸며 배를 타고 대서양(The Atlantic)을 통해 서쪽으로 건넜다. 이탈리아 사람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1492년 첫 항해를 시작으로 미국 플로리다 아래 바하마 지역의 섬들을 세 번이나 다녀오며 바닷길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탈리아 사람인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1512)는 콜럼버스가 한 번도 내딛지 못한 미대륙에 발을 디디며 아메리카라는 미국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포르투갈 사람인 바스코다 가마(1469~1524)는 인도로의 바닷길 무역항로를 열었다. 포르투갈 사람인 훼르디난드 마젤란(1480~1522)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며 괌에서 원주민과 전투를 하다 죽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포르투갈로 돌아오며 지구를 360도 돌았다.

대서양을 바라보면 해변을 걷고 있는 포르투갈 소녀들(사진: 박기철 제공)

유럽인들 관점에서는 신대륙의 발견이며 신항로의 개척이었지만 그들이 바다를 건너며 밟았던 지역의 원주민들에게는 참혹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인근의 카르카벨로스(Carcavelos) 해변을 거니는 저 세 소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저 바다는 이들 네 명의 야심가들이 건넜던 바닷길과 가까운 대서양이다. 15세기 남자들의 야망이 배를 타고 금과 향신료 등 진귀한 물건을 얻으러 가는 것이었다면 그 당시 여자들의 야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여자에게 야망이라는 단어는 어울리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들의 욕망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하다. 물론 여자에게도 욕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야망, 욕망, 욕심과는 비교가 안될 것이다. 물론 측천무후, 서태후 등 엄청난 야망을 가진 여인들이 역사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개 여자들이 가진 것은 야망이나 욕망, 욕심보다 소망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이제 야망의 시대는 저물고 소망의 시대가 밝아올 때다. 야망(野望)이 가지지 말아야 할 커다란 욕심이라면 소망(素望)은 늘 마음 속에 지니고 있으면 좋은 기운을 주는 소박한 바램이다. 우리 인류는 이제 여성적(feministic) 소망을 지니며 살아야 할 때가 왔다. 콜럼버스 등과 같은 엄청난 남자들의 야망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의 소망에 따라 인생이 움직일 때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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