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5): 하몽의 섹시함, 살라망카 대학의 유구함, 그리고 피사로와 아귀레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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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5): 하몽의 섹시함, 살라망카 대학의 유구함, 그리고 피사로와 아귀레의 후예들
  • 칼럼리스트 박기철
  • 승인 2017.11.0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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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女~文 Amenity, Feminism and Lifeway / 칼럼리스트 박기철

다음 글은 <총-균-쇠>처럼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을 정복했던 역사와 달리 생태 문명 차원에서 이제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사는 문화’의 제안이다.  

하몬(하몽)을 실제로 보고 가진 생각

칼럼리스트 박기철

오래 전에 TV에서 <하몽하몽>이란 영화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2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난생 처음 본 스페인 영화라서 특이하기도 하고 또 스토리가 색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관람불가로 불륜 영화의 결정판이다. 한 때 톰 크루즈(Tom Cruise)의 아내이기도 했던 페넬로페 크루즈(Penelope Cruz)가 여자 주인공 실비아로 나온다. 남자 주인공은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스페인 출신의 이 두 영화배우는 이 작품을 발판으로 미국 헐리우드로 진출했다. 둘은 실제로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단다. 영화에서 근육질 마초 남성인 라울은 하몽 건조 공장에서 일한다. 우리나라 영화 제목에서는 하몽이라 했지만 실제 스페니쉬 발음은 하몬이다. 며칠 전 포르투갈에서 간혹 보기도 했지만 그 곳에서는 프로슈토라 부른다. 하몬(jamon)은 돼지 뒷다리를 통째 날로 소금에 절여 1~2년 이상 매달아 말린 생햄(生ham)이다. 넓적다리 살이나 삼겹살을 소금에 절여 연기로 훈제한 햄, 베이컨과 다르다. 스페인 땅에 난생 처음 발을 들이니 웬 하몬 가게들이 그리도 많은지 깜짝 놀랐다. 돼지 다리를 천장이나 벽에 매달아 통으로 팔기도 하고 즉석에서 썰어 팔기도 하고 포장해서 팔기도 한다. 그 모습이 너무도 신기했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돼지 뒷다리를 이렇게 해서 먹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한국인의 입맛으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미감(味感)일 것이다.

페넬로페 크루즈(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런데 하몬은 말린 돼지 뒷다리이면서 나중에 파생된 의미가 있다. 몸매가 아름다운 여자를 뜻하는 속어다. 왜 그런 뜻이 생겼을까? 왜 하필 돼지 뒷다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여자를 뜻하게 되었을까? 아이러니(irony)한 패러독스(paradox)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수긍이 간다. 남성은 여성의 둥글게 굴곡지며 풍만한 부드러운 하반신 몸매를 볼 때 이성적 미감(美感)인 아름다움을 느낀다. 여성이 넓고 탄탄한 상반신 어깨를 가진 남성에게 이성적 미감을 느낄 때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다. 성(性)을 뜻하는 섹스(sex)의 어원은 섹션(section)과 똑같다. 모두 둘로 가른다는 뜻의 라틴어(secare)에서 온 단어다. 명사형은 섹서스(sexus)다. 생명의 작동원리는 음양으로 갈려진 상태인 섹스를 바탕으로 한다. 음양의 원리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 요철(凹凸)은 바로 그런 모양을 형상화한 한자다. 너트(nut)는 마이너스- 성질의 요(凹)의 섹션이다. 볼트(bolt)는 플러스+ 성질의 철(凸)의 섹션이다. 서로 다른 두 섹션의 성(sex)은 서로 상대 짝이기에 한 짝이 되기 위해 이끌리며 당겨진다. 이는 천지만물의 생성원리다.

난생 처음 접하는 하몬 가게 풍경(사진: 박기철 제공)

남자인 내가 여성을 보고 미감을 느끼는 것은 내가 음흉해서라기보다 세상만물이 모두 음양의 이치로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양의 존재인 남성적 관점에서 둥글고 풍만하게 생긴 돼지 뒷다리 하몬이 하반신이 잘 빠진 아름다운 여자를 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뜻은 절대로 여성이 만들어 낼 수 없다. 남성이 하몬의 모습을 보고 아름다운 여성을 떠올리며 만들어낸 뜻이다. 특히 소설에서 ‘돈 쥬앙’이라는 바람둥이를 만들어낸 이들의 문화가 하몬을 그런 뜻으로 파생시켰을 듯하다. 더군다나 이 곳 여성들의 체형이 특히 그렇게 아름답기에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영화 제목을 왜 하몬하몬이라 했는지 실제로 하몬의 모습을 보고난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실비아는 하몬의 자태를 지닌 육감적 매력의 여성이다. 남자 주인공 라울은 하몬 공장에서 일하며 매일 돼지 뒷다리를 손질하며 육감적 여성을 연상하는 마초형 남성이다. 두 이성(異性)의 육감체들은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지극히 스페니쉬한 육감적 미감을 생생하게 표현한 색정적 영화다. 그러면서 예술성도 있는 의미있는 영화다. 두 남녀는 현실에서도 그렇게 합쳐져 함께 산다니 이 또한 스페니쉬 스타일이다.

 

 

 

문(文)의 기본을 창조하는 대학의 역할

나는 해외 여행 전에 관광 가이드북을 보지 않는다. 그 정도 수준의 안내 책자를 읽으면 그 책을 통해 아는 만큼 보이기보다 아는 만큼 매이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일정(schedule)을 세우지 않고 그냥 가고싶은 곳을 발닿는 대로 간다. 뜻 밖의 우연한 발견인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맘껏 즐기기 위해서다. 살라망카는 그런 내 여행 스타일에 충분히 부응한 곳이다. 살라망카라는 도시는 전혀 잘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곳이다.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스페인의 마드리드까지 가면서 적당히 중간에 머문 곳이다. 이름이 멋지기에 낙점하기도 했다. 그런데 살라망카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구도심은 관광객으로 넘치면서 현지인들이 사는 삶터였다. 특히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면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었다는 살라망카 대학(VNiVERSiDAD De SALAMANCA)은 참으로 고풍스런 대학이었다. 우리나라 대학들처럼 캠퍼스와 마을이 따로가 아니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콜럼부스가 이 대학 어딘가에서 자신의 항해계 획을 설파했다고 하며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와 중미 아즈텍 제국 정복자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1547)가 이 대학 졸업생이라고 한다. 1218년 설립되었으니 2018년에는 800주년을 기념한다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살라망카 대학 도서관임을 벽에 표시한 연한 사인(사진: 박기철 제공)

살라망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건물을 알리는 사인이었다. 간판이 아니라 벽에 글씨를 썼는데 어디서나 글씨체와 색깔이 똑같았다. 그것은 획일성에서 오는 지루함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오는 미적 기분, 즉 미감(amenity)을 불러 일으켰다. 살라망카 대학의 미감은 바로 삶의 공동체였던 마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만일 어느 집에서 식당을 했다면 살라망카 대학이 하는 식을 본뜨며 연한 글자로 벽에 써서 식당임을 알렸을 것이다. 그렇게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바로 어느 식당이 살라망카 대학이 하는 식대로 벽에 글씨를 써서 식당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글자는 좀더 두껍고 선명해졌지만 기본적으로 하는 방식은 똑같다.

대학이 하는 방식을 따라하며 벽에 식당의 상호 글씨를 붙인 식당(사진: 박기철 제공)

그렇게 살라망카 대학을 따라하는 식당을 보면서 대학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은 학교다. 영어로 스쿨(school)은 여유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의 희랍어 ‘스콜라’에서 왔다. 그렇다면 학교인 대학은 여유로운 생각을 하는 곳이다.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바탕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현업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기본적이며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곳이 대학이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실무, 실용, 실전 등을 이유로 현업을 따라하고 있다. 현업이 대학을 따라가야 하는데 거꾸로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실무, 실용, 실전에서 절대로 기업을 능가할 수 없다. 대학은 그런 현실적인 것들보다 현업이 할 수 없는 여유로운 생각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무늬인 문(文)의 바탕을 창조하는 곳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변했어도 대학은 그런 지향점을 지니고 움직여야 대학의 존재 의미, 존재 가치,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취업 준비 기관이 되어 버린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더래도 오히려 졸업 후에 오히려 취업도 창업도 잘 되고 아울러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길(吉)하게 열어 가게 될 것이다.

 

 

 

남자들의 허망한 탐욕을 보여주는 영화

한민족, 중국 한족, 일본족, 몽골족 등 동양인은 모습은 비슷하다. 라틴족, 게르만족, 앵글로색슨족, 슬라브족 등 서양인의 모습도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한국인을 다른 동양인들과 겉모습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듯이 스페인 사람들도 자기네 스페니쉬들을 다른 서양인들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지하철에서 본 젊은 세 남자들은 전형적인 스페니쉬다. 기품있게 잘 생겼다. 에스파니아 왕을 해도 될 인물이다.

피사로의 후예답게 건장하고 잘 생긴 스페니쉬 남자들이 길거리에서 담소하고 있다(사진: 박기철 제공).

딱 그렇게 잘 생긴 라틴족 스페니쉬 남자들이 1500년대에 남미를 쳐들어 갔을 것이다. 그 장본인은 피사로(Francisco Pisaro, 1475~1541)다. 그는 지금의 페루 땅에 있었던 잉카 제국과 문명을 초토화시켰다. 180여 명의 병사만 가지고 원주민 수만 명 병사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잉카 병사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총, 원주민들에게 면연력이 없었던 천연두, 그리고 강력한 철기 문명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에서 밝힌 바다.

그 당시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다. <신의 분노, 아귀레>라는 영화다. 1972년에 나온 독일 영화로 원 제목은 <Aguirre, Der Zorn Gottes>다. 독일 영화지만 스페인 사람인 피사로 장군의 병사들이 잉카제국을 쳐들어 갔을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피사로가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발견하라고 파견한 아귀레다. 영화 <테스>의 주인공인 나타샤 킨스키의 아버지인 클라우스 킨스키가 분한 아귀레는 관객으로 하여금 도대체 이 영화가 영화인지 현실인지 분간 못하게 할 미친듯한 연기를 한다. 주인공인 자신이 정말로 아귀레가 된 것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광기에 사로잡힌 연기아닌 연기를 한다. 감독도 연기자도 모두 미쳐서 이 놀라운 작품을 만들었다. 이 영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허망한 탐욕이다. 아귀레는 그런 탐욕의 분신이다.

클라우스 킨스키의 캐리커처(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영화에서 아귀레는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땅에서 혼자 살아남아 스스로 미친 신이 되며 파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피사로의 후예들인 스페니쉬들은 그들이 밟은 땅들을 정복하며 라틴 아메리카로 만들어 간다. 결국 남미 대륙은 라틴족의 이름대로 라틴 아메리카가 된다. 과연 탐욕이 성공으로 이어진 것일까? 영화 <신의 분노, 아귀레>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극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정복한 땅에 혼혈, 언어, 종교, 건축물을 남겼지만 엘도라도는 없었다. 잔혹한 약탈 수탈의 역사가 이어졌을 뿐이다. 피사로와 아귀레의 후예들인 저 스페니쉬 남자들은 이제 그런 허망한 탐욕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마초적 탐역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삶의 문화를 수용하며 살아가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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