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종 신작 소설 '천살의 시대' ...연좌제, 유신,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쓰디쓴 역사를 재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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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 신작 소설 '천살의 시대' ...연좌제, 유신,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쓰디쓴 역사를 재소환하다
  • 정태철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11.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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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소설가 친구가 한 명 있다. 가끔 지인들과 대화 중 은근히 나의 자랑거리가 되어준 소설가 친구는 작가 ‘김현종’이다. 그는 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분 신인상을 수상했고, 소설집 '보다, 보이다' 등을 출간했다.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에서 소질을 키우더니 국문과 학생이 됐고, 이어 대전 지역 국어 교사로 스승의 길을 걸었으며, 그 바쁜 와중에 '해방기의 북한 소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학구열을 불태웠고, 마침내 교장 선생님으로 영예롭게 정년퇴직했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고, 미국 유학을 거쳐 부산에서 32년간 대학에 봉직하다 정년퇴직했으니, 친구와 나는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친구가 60이 다 된 나이에 대전 지역 교장 일행과 연수차 부산에 들렀을 때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인 게 실로 몇 년만의 조우인지 기억조차 없었다.

10월의 어느 한가한 날, 보이스 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 말고는 하루 종일 전화 한 통도 오지 않는 은퇴 교수의 심심한 핸드폰에서 뜻밖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은 반갑게도 바로 김현종이었다. 친구는 소설 한 권을 썼다며 우송해 줄 내 집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이름으로 ‘정태철’이란 내 이름을 썼노라고 ‘통보’했다. 원래 타인 성명을 신문 기사에 함부로 사용하다가는 ‘성명권’이라는 타인의 법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언론 윤리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의했던 기억이 났다. “소설 불티나게 팔리거든 내 이름 사용료 대신 소주 한 잔 사라” 하곤 둘이 껄껄 웃었다.

김현종 작, 실천문학사 간, '천살의 시대' 표지
김현종 신작 소설 '천살의 시대' 표지(사진: 실천문학사 제공).

그렇게 받아 든 소설의 제목은 '천살의 시대.' 누구나 이 한글 제목을 보면 ‘1000살의 시대’를 연상하지만, 여기서 천살은 멋대로 할 천(擅), 죽일 살(殺)의 ‘擅殺’로 ‘함부로 사람을 죽이다’라는 끔찍한 의미의 단어다. '천살의 시대'는 한국 현대사의 고통스런 단면을 소설가 본인의 경험과 엄청난 자료 조사로 살려낸 수작이다. 소설 '천살의 시대'는 1부 ‘연좌의 시대’, 2부 ‘천살의 시대’로 구성됐으며, 1부는 가족의 좌익 사건 연루로 유신 초기에 ROTC 지원에서 탈락하고 사병으로 군에 입대한 대학생을 옭아맨 연좌제의 잔인한 종말을 그리고 있으며, 2부 ‘천살의 시대’는 유신이 끝나갈 무렵 노동운동, 대학시위, 야학, 부마사태 등에 관여한 대학생들이 공수부대에 강제 입대당했다가 광주민주화 운동에 진압부대로 차출된 끝에 어처구니없는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을 그렸다. 소설 속 1, 2부 두 개의 이야기는 별개지만, 소설 '천살의 시대'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공통 주제를 다룬 연작 장편소설이다.

소설 속 정태철은 2부 ‘천살의 시대’에 등장하는데, 부마사태 당시에 데모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몰려 강제로 군대에 끌려온 인물로 그려진다. 부산대 신방과 학생이면서 대학 방송국 아나운서 역의 등장인물 작명을 고심하다, 작가는 시대와 직분은 다르지만 부산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 생활했던 내 이름을 생각해 냈다고 차명(借名) 배경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말하자면, 등장인물과 정태철은 부산이라는 연고 말고는 아무 연관이 없는 셈인데, “정태철은...” “태철은...”이란 대목이 소설에서 여러 번 나올 때마다 묘한 감정이 생겼고, 가끔 몇 대목을 아내에게 읽어주며 소설가 친구 덕에 소설에 내 이름이 등장하는 신기함과 더불어 일종의 민망함을 공유하기도 했다.

1부 ‘연좌의 시대’ 속에는 박철하라는 소설가가 6.25 당시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형을 소재로 '피의 다리'란 불온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15년 형을 선고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 문제의 단편 소설 '피의 다리'가 소설 속 소설, 즉 액자형 구성으로 삽입된다. 나는 실존했던 소설을 옮겨 온 것으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나중에 작가로부터 본인의 창작품이란 설명을 들었다. 단편 '피의 다리'는 모(母) 소설 '천살의 시대' 못지않은 구성, 문장, 드라마를 가진 명품 단편이었다.

무엇보다도, 1부 ‘연좌의 시대’가 작가 자신의 개인사를 기반으로 했다는 얘기를 책을 받을 때 무심코 흘려 들었지만,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나는 한동안 멍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친구에게도 그런 얘기를 하기 힘들었을 작가 마음이 오래오래 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머물렀다.

나는 언론학자였으며, 교수 말년에 ‘시빅뉴스’라는 인터넷신문을 창간했고, 학생들과 같이 뉴스를 찾아 보도했으며, 세상사에 대해 다수의 칼럼으로 논평했다. 학생들에게 언론 기능을 처음 설명할 때마다, 나는 미국 워싱턴DC 방문 당시 찾았던 뉴스박물관, ‘뉴지움(Newsium)’ 입구에 게시되어 있던 명구(名句)를 먼저 소개하곤 했다. “뉴스는 인류 역사의 초고(草稿)다.” 이 말은 워싱턴포스트 지의 발행인 필립 그레이엄(그의 사후, 발행인을 이어받은 이가 부인인 캐서린 그레이엄으로 영화 '포스트'의 주인공이다)이 했다. 뉴스는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최초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문이나 방송에 기록을 남긴다. 마치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가 됐던 사초(史草)처럼, 뉴스는 유장(悠長)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천살의 시대' 속에 나오는 6.25, 보도연맹, 유신, 광주민주화,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등 한국의 현대사들 모두 언론에 보도되거나, 보도되지 못하거나, 또는 잘못 보도된 자초지종을 나는 ‘한국 언론사’라는 과목을 통해 학생들에게 30년간 가르쳤다. 언론은 뉴스란 역사의 초고를 쓰는 과정에서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얽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해야 했고, '한국의 미디어, 사회갈등, 사회변화'라는 박사 논문도 썼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언론사 교재도 저술한 바 있다. 그리고 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탄압했는지를 학생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사회과학은 곧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이 그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네덜란드 소설가 ‘세스 노터돔’이 쓴 스페인 여행기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었다. 좀 지루한 책이었는데, 그 속에서 세르반데스의 소설 '돈키호테' 무대가 된 지역을 지나는 대목에서 작가는 “중세의 엉뚱한 가공의 인물을 극화한 소설의 상상력이 중세의 모순이란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말해 준다”고 적었다. 현실보다 현실의 모순을 더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소설의 힘은 ‘설명’을 앞세운 사회과학보다도 더 현실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데 있다. 남북 이데올로기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번민을 최인훈의 '광장'보다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할 정치학 논문은 없을 것이다. 70년대 고도 경제성장 시대에 서민들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조세희의 '난쏘공'보다 더 절실하게 보여줄 경제학 논문 역시 없을 것이다. 소설 '천살의 시대'는 6.25, 연좌제, 유신, 광주민주화 등의 현대사를 몸으로 겪었던 세대가 왜 아직도 우리, 특히 젊은 세대가 그 전모를 촘촘하게 기억하고 진정으로 ‘이해’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독일군의 유대인 대학살 등 만행을 고발한 영화 '피아니스트'나 '쉰들러 리스트'가 추억의 명화 속으로 사라지고 있을 때,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보는 시각 차이가 또 다른 대립을 불렀다. 그래서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연구 학술 활동은 물론 문학과 영화 같은 예술로 역사는 재소환되어야 한다.

소설가 한강이 제주 4.3사건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천살의 시대'처럼 역사는 끝없이 반추되고 있고 그래야 한다. 다만 역사를 되살리는 게 증오를 키우기보다는 미래를 모색하는 계기로 승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건 독자의 몫이리라.

김현종은 차기작으로 동학을 주제로 한국 근현대사의 연작소설을 이어 간다고 내게 귀띔해 주었다. '천살의 시대'보다 더 화려한 문체, 더 치밀한 구성, 더 숨막히는 전개, 더 강한 울림, 더 진한 역사와의 만남을 맘 설레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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