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와 윤봉길 기념관을 가다
상태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와 윤봉길 기념관을 가다
  • 취재기자 최정은
  • 승인 2019.10.15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윤봉길 의사의 어록 가슴에 새기며 삶 되돌아봐

가랑비가 내리던 날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았다. 지하철 10호선을 타고 신천지 역에 내려 6번 출구 왼편으로 5분가량 걸으면 임시정부 유적지에 도착한다. 한글과 한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라 적힌 황동색 간판 옆 검게 칠한 쇠창살문이 유적지의 입구다.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지 않았다면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신천지 거리를 활보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매표소에서 1인당 20위안(한화 약 3400원)에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다.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초입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초입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입구로 들어서면 전선과 덩굴식물이 얼기설기 뒤엉킨 주거 공간이 펼쳐지고, 유적지와 전시관은 그 사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어머, 어쩜….” 입구 너머로 발을 디디는 관광객들은 짧은 탄식을 뱉고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고 볼품없다. 여행 일정을 짜기 위해 참고했던 상하이 관광객들의 글에는 임시정부 유적지가 그렇게 언급돼 있다. 예상보다 더 협소하고 초라한 공간이 그 자리의 모두에게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랑비에 젖었던 터라 그런지 초라한 임시정부 청사를 보자 가슴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직원이 나눠주는 비닐 덧신을 신발 위에 씌우고서야 비로소 유적지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임시정부 건물 3개 층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부엌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무실로 쓰였는데, 다기(茶器)가 놓인 식탁과 사무용 책상, 성인 여성도 겨우 누울까 싶은 작은 침대. 그 모든 게 갖춰져 있거나 하나쯤 빠져 있거나 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각 방마다 태극기가 하나씩은 걸려 있다는 것이다. 작다란 침대에 몸을 구겨 넣을 때도, 업무를 보기 위해서라면 식탁이든 책상이든 상관없을 때도, 좁다란 방 안 어디에서든 태극기는 보였을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맨 위층에 다다르면 전시관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유적지 옆 건물에 마련된 전시관은 임시정부의 연혁과 업적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임시정부의 공식문서 등이 진열되어 있다. 국사 교과서로는 못 다 배운 역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가령 다른 나라의 조계지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기에 일제를 피해 과거 프랑스 조계지였던 이곳에 임시정부는 자리 잡았다든가 하는. 한 남성이 “처음 아는 게 많다”고 조용히 속삭이자 함께 온 여성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해와 충칭의 임시정부 건물 미니어처도 놓여 있었는데, 둘의 크기를 번갈아 비교해 보면 상해의 임시정부가 얼마나 혹독한 환경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주택가에 자리한 임시정부 유적지(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주택가에 자리한 임시정부 유적지(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출구가 있는 전시관 1층은 임시정부 유적지에 성금을 낼 수 있는 공간이다. 역대 기부자와 기부 단체의 이름이 벽면에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를 방문한 역대 대통령들의 휘호도 걸려 있다. 그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장이 가장 인상 깊었다.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여 빛나는 명예를 후세까지 오래 남기다’.

임시정부 유적지를 관람한 후 일행과 떨어져 윤봉길 기념관으로 향했다. 윤봉길 기념관은 여타 상하이 관광지와는 거리가 있어 애초부터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최소 45분이 걸리는 여정을 결심한 건 한순간의 애국심에 고취돼 저지른 변덕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라오시먼(老西門) 역에서 8호선으로 환승해 훙커우축구장(虹口足球場) 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역 이름에서 왜 이곳에 윤봉길 기념관이 세워졌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루쉰공원은 1956년 중국의 문호 루쉰의 묘를 이장하며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옛 이름은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행해진 곳이다.

윤봉길 기념관으로 향하는 관광객들(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윤봉길 기념관으로 향하는 관광객들(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공원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정표가 있었다. 한자 ‘매원(梅園)’을 찾으려 했는데 한글 ‘윤봉길 기념관’이 먼저 눈에 띈다. 그래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입장료는 1인당 15위안이다. 값을 지불하고 받은 분홍색 카드를 입구 앞 기계에 넣으면 입장할 수 있다. 오른쪽 길을 따라 걷다 계단 너머 매화나무에 둘러싸인 한국식 가옥을 발견하면 제대로 찾아간 것이다.

건물 옆에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훙커우 의거까지의 업적을 정리해놓은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안에 전시된 내용과 이어지므로 대강이라도 읽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 사람 한 명 드나들 만큼만 열린 문틈으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과 함께 조화에 둘러싸인 윤 의사의 흉상이 바로 보인다. ‘대장부가 한 번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윤 의사의 굳센 결기가 그의 흉상에서도 느껴진다. 기념관 안에는 의거의 결과와 영향, 윤 의사의 순국, 그의 유해를 발굴하고 봉환하는 과정을 설명해놓았다. 당시 촬영된 의거 영상도 확인할 수 있다.

조화가 놓인 윤봉길 의사의 흉상(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조화가 놓인 윤봉길 의사의 흉상(사진: 취재기자 최정은).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일본군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이 합동으로 열리는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거사를 일으켰다.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날 무렵 윤 의사가 던진 폭탄에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카와바다(河端) 일본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은 실명, 우에다(植田)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상해 총영사 무라이(村井)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의 쾌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상하이에 출장을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했다. 그들이 바깥에 있는 계단을 오르고서야 2층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층은 준비된 영상 자료를 시청 중인 단체 관광객들로 이미 가득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서야 2층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앞쪽에는 영상을 반복 재생 중인 TV와 윤봉길 의사의 부조(浮彫)가 있다. 입구에서 마주보이는 벽에는 윤 의사의 초상화를 가운데 두고 그가 남긴 말을 새긴 목판 두 개가 양쪽에 걸려 있다. 왼쪽 목판의 첫 구절을 가슴에 담고 돌아 나갔다. ‘사람은 왜 사느냐 理想을 이루기 爲하여 산다’.

“세계 어디를 다녀 봐도 한글로 그렇게 써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한글로 된 것을 처음 경험했는데, ‘이게 한민족이구나’라고 느꼈다”는 작년 남북정상회담 방북단 중 한 명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본 상하이는 한국과 같은 듯 달랐다. 모습은 비슷해도 말과 글에서 이질감이 물씬 든다. 익숙지 않은 간체자, 성조에 따라 뜻도 바뀌는 낯선 언어, 도통 풀리지 않는 의사소통. 이국에서 만난 우리말과 우리글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그들이 열망했던 이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동질감을 느끼는 것. 나를 소속시키는 것. 나아가 우리를 겨레로 묶이게 하는 것. 그게 당연하게 여겨지도록 내 나라가 있는 것.

그들이 이뤄낸 이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는가. 돌아오는 길에 고민은 깊어져 갔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