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감 맴도는 부산 구포 만세길 "볼거리 생겨 사람들 많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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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감 맴도는 부산 구포 만세길 "볼거리 생겨 사람들 많이 왔으면"
  • 취재기자 차진영
  • 승인 2017.11.27 05:0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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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방음벽에 벽화만 덩그러니...모텔촌 밤거리 걷기 무서워 / 차진영 기자

내 이름은 ‘구포동 화재의연 기념비’, 나이는 103세이다. 103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나는 불이 났던 자리에 세워졌다. 내가 세워지기 103년 전인 1914년, 구포장터는 큰 불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다고 했다. 불난 구포장터를 일으켜 세운 것은 구포지역 주민 70여 명의 의연금이었다. 이를 기념해 내가 세워졌다. 세월이 100년이나 흐른 만큼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많다.

부산 ‘구포동 화재 의연 기념비’(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내가 세워진 1914년,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수난을 겪고 있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했다. 하지만 장날만큼은 다들 시끌벅적했고,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날은 다른 날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내가 다섯 살 무렵이던 그때 당시, 이곳 구포장터에서는 큰 소동이 있었다. 그 소동은 100년 쯤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1919년 3월 29일 바로 그 날 말이다.

장날만 되면 구포장터는 왁자지껄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장이 들어서면 상인들은 저마다 팔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사람들 앞에 선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상인과 흥정하기도, 다투기도 하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어떤 물건들이 장에 나올까, 어떤 사람들이 장에 올까 하는 것은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맛나다고 소문난 술떡 앞에는 아이들이 군침을 흘리곤 했고, 아재들의 최신 유행인 갓은 장터의 인기 품목인 만큼 잘 팔리곤 했다.

1919년 3월 29인 그날은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평소에는 장날이 되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나는 무슨 특별한 날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수다를 좋아하는 지게꾼 아저씨의 말을 흘깃 들어보니,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다들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소리에 구포장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정오가 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어림잡아 1000명 정도? 무슨 일인지 몰라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던 나는 지게꾼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많았다지 아마? 하지만 내가 있는 이곳 구포장터에는 장터 상인들이 많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비장한, 그리고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임봉래, 유기호, 윤경, 김옥겸 등을 비롯한 몇 명의 주동 인물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라고 적힌 종이를 읽더니 일제히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모두가 비장한 표정을 하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무슨 의미인지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이제와 시간이 흐르고 보니 사람들이 흥분하고 감격했던 그 날이 만세운동을 벌여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1919년 3월 29일, 그날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곳에 있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부산시 구포 만세길 철길 방음벽에 그려진 만세운동을 하는 상인들의 모습(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그날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가 서른하나가 되던 해,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은 주권을 다시 찾았고, 이곳에서 생활했던 일본인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많이 남아있던 적산가옥이 차츰 사라지고, 지금은 몇 채 남아있지 않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러니까 내가 서른여섯 살 때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사람들이 남쪽으로 향해 오면서, 많은 피난민들은 이곳 부산을 찾았다. 한국전쟁 시기에 구포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저렴하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고, 이를 ‘구포국수’라고 불렀다. 구포국수는 구포 시장을 방문한 이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수 있는 음식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이곳 구포장터의 역사가 만들어졌고, 시간은 흘렀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자리에 우뚝 선 나뿐이었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인 구포국수가 인기였다. 한 식당 안 벽에 붙은 당시의 설명 그림(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쯤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구포에는 역이 생겼고, 장터도 예전과 달리 장날이 되지 않아도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되었다. 건물도 많이 들어섰고, 모든 것이 변했다. 100년 전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던 이곳을 시에서는 ‘구포 만세길’ 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조성한다고 했다. 구포역에서부터 구포시장까지를 이르는 거리를 말이다. 아마 1919년 3월 29일, 그 감격의 날을 역사적으로 기리기 위해서겠지.

부산시 구포 만세길 벽화.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부산시 구포 만세길의 벽화. 일본 경찰들이 강제 진압하는 모습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2014년 이곳은 전과는 점차 바뀌었다. 사람들은 ‘구포 만세길’을 꾸미기 위해서 구포역 철길방음벽에다 당시 만세운동의 모습을 그려 넣고, 태극기를 달아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임을 알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가보다. 3월 1일에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적막감만이 맴돈다. 예전에는 시끌벅적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도 없고 볼 것이라고는 철길 방음벽에 그려놓은 벽화뿐이다. 구포시장에서 조금 더 걸어와야 하는 구포 만세길은 보통 구포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구포역을 이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이곳을 찾진 않는 듯하다. 때문에 기껏 조성해놓은 만세길의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구포 철길 방음벽을 따라 일제강점기 주재소를 재현해놓은 모습(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철길 방음벽을 따라 그려진 벽화는 만세운동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철길 방음벽 전체를 덮는 벽화의 사람들을 실제 사람만큼이나 크게 그날의 생동감을 전해주고자 했다. 또한 벽화를 따라서 재현한 당시 건물의 모습도 그 때를 떠올리게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려놓은 벽화 말고는 볼거리가 없다. 역사적인 의미를 기리기에는, 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나도 오래 보고 있으니, 흥미가 사라질 것만 같다. 벽을 따라서는 듬성듬성 태극기가 꽂혀 있다. 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들고 있었던 태극기였는데, 이렇게 조용한 거리에 몇 없이 걸려 있으니, 쓸쓸하고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태극기는 사람 없는 한적한 거리, 바람에 나부끼며 조용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산시 구포 만세길 지하도에 전시된 벽화와 만세운동 참여자 명단(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이렇게 벽화를 그려놓아도, 구조물을 설치해도 일부러 이곳을 찾는 이는 흔치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홍보도 잘 되지 않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았다. 오전에는 주변 상인들과 지역 주민들만이 거리를 거닌다. 조용해서 좋긴 한데, 너무 심심해서 쓸쓸하다. 이번 달만해도 벽화를 감상하거나 관광객인 듯한 사람은 손에 꼽힌다.

조용한 구포 만세거리 옆은 숙박업소가 자리 잡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철길 맞은편에 숙박업소가 늘어서 있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겠지. 언제부턴가 큰 숙박업소가 생겨났고, 이제 내가 있는 이곳은 숙박업소가 둘러싸고 있다. 밤이 되면 간판만이 반짝거리고, 밤이 되면 주위가 어두워져, 사람들이 무서워하기도 한다. 지난 달에는 지현이라는 여대생이 전화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호기심에 엿들었는데, 그녀는 친구와 통화하면서 “여긴 낮에는 괜찮은데, 밤엔 너무 깜깜해서 지나가는 것조차 무서워”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곳을 밤에 다니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때문에 만세길은 밤낮가리지 않고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부산 북구 근대 역사관 내부에는 구포의 역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구포 만세길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차진영).

만세길을 따라 가면, 북구 근대 역사관도 있다. 그곳에 내가 있는데, 여기는 구포의 역사도 자세히 찾아 볼 수 있고 문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곳 북구 근대 역사관의 대표는 “사람들이 찾기에는 시설물이나 주위가 환경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 아직 다양한 측면에서 보완이 필요하고 젊은 층의 발길을 돌릴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안타까워한다. 당시에는 감격과 환희로 가득 찼던 곳인데. 좀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나 또한 안타깝다. 그때의 감동을 사람들이 많이 알고 찾아와 줬으면 좋으련만. 이곳이 역사공원으로 개발 추진 중이라고 하던데, 과연 가능할까. 볼거리가 생겨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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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길 체험자 2017-11-27 23:22:08
르뽀든 뭐든 기사의 기본은 팩트아닌가요.
구포만세길이 시내 중심 번화가에 위치한 게 아니라 사람들로 붐비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적막감이 감돌 정도도 아니던데..
근대역사관 옆 구포국수체험관에 아이와 체험하러 갔는데 다들 만세거리도 둘러보고, 초등학생들도 만세길 현장학습 가기도 하고..
그리고 태극기가 '듬성듬성' 걸려있다? 만세길에 있는 구포1파출소 앞 태극기는 적어도 1m 간격으로 걸려있고, 다른곳도 알맞은 곳에 알맞게 걸려있던데 보는 사람 시각에 따라 다른듯. 구포역은 1903년에개통됐습니다, 만세운동일어난지 100년뒤

만세길 체험자 2017-11-27 23:11:54
에 구포에 역이 생겼다는 것도 사실과 다른 듯.

chokobo 2017-11-27 09:58:43
북구가 구포만세길을 좀 더 신경써서 정비하고
조명시설도 추가로 확보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세길 어둡다고 민원 넣으니
어디 전구가 나간 곳이 있냐고
회신이 왔더군요

솔직히 구포개시장 건도 그렇고
능력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