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번 버스 사건과 나체사진 유포, 그리고 '도깨비 도로' 같은 SNS 무리의 천박한 착시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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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번 버스 사건과 나체사진 유포, 그리고 '도깨비 도로' 같은 SNS 무리의 천박한 착시현상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7.09.1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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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정태철
발행인 정태철

9월 13일 서울 240번 시내버스 사건은 인터넷 여론이 세상을 어떻게 뒤흔드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목격자란 사람이 처음 인터넷에 올린 글에는 5세 어린아이가 퇴근길 만원 버스 승객에 떠밀려 내린 상태에서 버스가 출발했고, 버스 기사는 차를 세워 달라고 울부짖는 아이 엄마를 무시하고 심지어 욕까지 하면서 다음 정류장에 내려줬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글은 손이 근질근질하던 인터넷 카페와 먹잇감을 찾던 언론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됐다. 버스기사가 제 정신이 아니니 어서 잡아서 천벌을 주어야 한다는 비난이 폭발했다. 그러나 다음날 공개된 CCTV와 이에 근거한 서울시의 조사, 심지어 현장에 가서 버스를 타고 실험까지 한 기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최초 글은 오류투성이였다. 아이는 5세가 아니라 7세였고, 아이는 손님들에 떠밀린 게 아니고 제 발로 버스에서 내렸으며, 버스 기사는 욕을 한 적도 없었고, 그는 거대 교차로에서 2차 사고를 무릅쓰고 도로 한 복판에다 승객을 하차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기사는 휴직하고 말았다고 한다.

제주도에 가면 ‘도깨비 도로’가 있다. 관광버스 기사들이 여기에 가면 오르막길에 차를 정차해 놓고 생수를 뿌려 물이 오르막길을 타고 위로 흐르는 신기한 현상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준다. 기어를 중립으로 놓고 엑셀에 발을 떼도 차가 슬금슬금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도대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이런 도깨비 장난 같은 현상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주변 들판과 산의 능선이 도로가 내리막이면서 오르막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물리적 착시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3개의 직선은 모두 길이가 같다. 그러나 선 끝 화살표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길이가 달리 보인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위 그림을 보자. 세 개의 선은 모두 길이가 같다. 그러나 선 끝의 화살표 방향이 안쪽으로 향한 가운데 선이 가장 길어 보인다. 멀쩡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리 망막에는 선의 길이가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심리학자 알포트와 포스트만의 고전적 실험에 이런 것도 있다. 버스 안에서 ‘칼을 쥔 백인 노동자가 양복 입은 흑인 신사와 대화하는 그림’을 한 실험 참가자에게 보여주고 옆 참가자에게 방금 본 그림 내용을 설명해주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참가자가 또 옆 사람에게 말로 전하는 식으로 몇 사람을 거치면, 그림 내용은 ‘칼을 쥔 흑인 노동자가 양복 입은 백인 신사를 협박하는 그림’으로 바뀌게 된다는 게 이 실험의 결론이다. 왜 그럴까? 사람은 사물을 자기가 갖고 있는 인종에 대한 선유경향(선입견),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인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고 한다.

사람의 선입견에 따라서 이 그림도 오리나 토끼 둘 중의 어느 하나로 보인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51년, 아이비 리그의 라이벌인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의 미식축구 경기가 열렸다. 경기가 치열해서 과도한 반칙에 의한 부상 선수가 속출했고 응원단끼리 패싸움이 벌어지는 난장판 속에서 프린스턴이 겨우 승리했다. 경기 후, 양 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각자 자기 팀은 정당하게 플레이를 했고, 상대방이 비열하게 반칙 플레이를 난발했다고 비난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선택적 지각의 결정판이었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면서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이게 바로 심리학자 하스토프와 캔트릴의 ‘편향된 인식’이다. 정치든, 영화든, 스포츠든, 물건이든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재된 성향에 따라서 소주 반 잔을 놓고 소주가 반이나 남았다고 할 수도 있고 반밖에 안 남았다고 할 수도 있다. 원효 대사는 바가지에 고인 물을 깜깜한 밤의 동굴에서 달게 마셨다가 그 다음날 그게 해골에 고인 물임을 알자마자 역겨움을 느꼈다. 사람의 인식은 때에 따라서도 변할 만큼 변덕스럽고 믿을 게 못된다. 그걸 알면 원효처럼 해탈하는데 말이다. “내려 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란 고은 시인의 <그 꽃> 시도 바쁘게 사는 젊을 때는 보이지 않는 인생의 단면을 나이 들어 천천히 관조하면 비로소 보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인생살이에도 ‘블라인드 스팟’이 있는 것이다.

위 그림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화분으로 볼 수도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요새 판친다는 '가짜뉴스(fake news)'는 아예 거짓 정보로 이뤄진 뉴스다. 이번 국정원 외곽 조직의 문성근과 김여진 두 연예인의 나체사진 조작 사건은 참 극단적인 가짜사건의 폐해를 보여준다. 더욱이 국가 조직이 온라인에서 기짜뉴스로 인격 살인의 '경지'를 높이고 있었으니 천인이 공노할 일이다.

가짜 정보로 이뤄진 가짜뉴스와는 다르게, '의사(疑似)뉴스(pseudo news 또는 false news)'는 진짜 정보로 이뤄진 뉴스다. 의사뉴스는 홍보 전문가들이 연출하고 계획하는 소위 미디어 이벤트, 혹은 언론플레이를 말한다. 문제는 그 이벤트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 가짜는 아니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걸 보고 맞다고 말하고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뒤에서 그 뉴스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걸 모르는 채, 혹은 알고도 모르는 채 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교통사고와 살인사건만이 가장 정직하고 자연스러운 뉴스고, 정치인들이 벌이는 기자회견, 국민과의 대화, 집회 데모 등은 인공적인 의사뉴스라고 했다.

인터넷과 SNS가 여론을 지배하고 있다. 원래 21세기 정보사회가 오기 전의 19세기말부터 20세기를 대중사회라 부른다. 대중사회 속에서 인류는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대중들이 유사한 음식, 의복, 영화, 음악을 ‘획일적’으로 즐기고, 이런 대중문화 속에서 사람들의 개성도 점차 침식되어 갔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컴퓨터가 선도하는 정보사회는 대중사회와는 반대로 사람의 개성이 살아나고 삶과 문화가 ‘다양하게’ 전개된다고 했다. 그런데 인터넷, SNS를 타고 떠도는 근거 없는 말과 글이 정권과 정치인의 운명을 결정하며, 스마트폰 판매, 영화 예매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을 미국의 마케팅 전문가 마크 얼스는 대중사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떼와 무리(herd)’가 몰려다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신기술로 무장했지만 정신이 천박한 다수가 인터넷과 SNS 공간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이비 뉴스를 양산하고 여론을 퍼트리고 있다. 여기에 ‘입소문’이 양념처럼 가미된다. 무책임한 다수에 동조하지 않는 주관적 판단력과 개성 있는 생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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