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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런치 모드’에서 '저녁 있는 삶'으로/ 논설주간 강성보
논설주간 강성보

정치인 손학규 씨가 지난 201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저녁있는 삶’을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적지않은 국민들이 호응했다. 정치적 구호답지 않게 편안하고 신선한 캐치프레이즈였다. 진영논리가 우선되는 대선판에서 결과는 손 후보의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저녁있는 삶’ 구호는 한동안 정치권 안팎에서 긴 여운을 남겼다. 5년 뒤 올해 대선에서 본선을 뛴 한 후보는 이 구호의 메시지를 일부 빌려쓰기도 했다.

‘저녁있는 삶’은 평범하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음미해보면 상당히 진보적인 구호다. 사회주의 냄새도 난다. 노동자들이 낮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 시간을 즐기는 삶은 공산주의가 완성된 단계의 이상 사회로 칼 마르크스가 그린 적 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요 요소들를 흡수한 북유럽의 사회적 자본주의는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을 표방하고 있다.

저녁에 가족이 모여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삶은 전 세계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손학규 씨의 ‘저녁있는 삶’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각박하다는 반증이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모드 속에서 대부분 노동자와 국민들은 저녁 시간을 갖지 못할 정도로 힘겹고 빡빡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휴식과 휴가를 찾아먹으면서 직장 생활을 해온 이 땅의 노동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 직장 분위기상, 사회 풍토상 저녁을 반납하고 야근을 밥먹듯 하며, 법정 휴가까지 못가고 일해 왔을 것이다.

‘크런치 모드’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가 최근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게임업계에서 새로운 게임 출시 및 업데이트를 앞두고 회사에서 숙식하며 장시간 일하는 행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지난 3일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2016년 넷마블 소속 자회사 넷마블 네오에서 일하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한 A 씨 유족이 낸 유족급여 청구를 근로복지 공단이 업무상 재해로 받아들여 승인한 사실을 공개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A 씨는 발병 4주전 1주일에 78시간 근무, 발병 7주전엔 1주에 89시간 일했다고 한다. 휴일도 없이 하루 평균 11~ 13시간씩 노동했다는 것이다. 극초장시간 노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흥행가도를 달리는 영화 <군함도>에서의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연상케 한다.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나는 과자는 '크런치'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게 많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크런치(crunch)’란 본래 땅콩이나 호두 같이 딱딱한 게 으스러질 때 나는 소리를 말한다. “오독오독”, “아삭아삭” 정도로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크런치 쵸컬릿’, ‘크런치 바’, ‘크런치 캔디’ 등 과자류에 자주 쓰인다. 그런데 이 단어가 경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데 인용되면 “몸이 부서질 만큼 강도 높게 일하는 상황”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새 게임 출시 등 크리티컬 포인트에서 전 직원이 몸이 부셔져라 일하는 ‘크런치 모드’는 게임업계의 관행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임업체들이 몰려있는 구로 디지털단지나 판교 디지털 센터 등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 많다고 한다. ‘구로의 등대’, ‘판교의 등대’라는 말도 있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선 후보가 TV 토론에서 “구로 디지털단지에 오징어 배가 떠있다”고 한 것도 게임업계의 이 비상식적인 노동 환경을 비판한 말이었다.

몸이 부셔져라 일하는 직역이 어디 게임업계 뿐일까? 지난 6월 거제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과장 고 이모 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동경대 석사라는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로 30대 초반에 과장으로 승진한 전도양양한 젊은 직장인이었으나 생후 두 달 된 딸을 남겨두고 자살을 택했다. 이유는 과로와 스트레스였다.

또 지난해 2월 중소기업에 입사한 뒤 1년반 만에 베트남 지사로 파견된 27세 새내기 직장인 신모 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소 시간이 없어 시리얼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며 “귀국하든 귀천(歸天)하든 뭔가 수를 내야겠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해왔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귀국이 아니라 귀천을 택했다.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로 젊은이들의 ‘헬조선’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지만 막상 어렵사리 취업해도 또 이런 ‘크런치 모드’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졸음 운전으로 대형 사고를 잇달아 낸 버스 운전사들, 올해만 12명이 과로사했다는 집배원도 대표적인 ‘크런치 모드’ 직역이다. 집배원의 경우 하루 평균 11시간 근무하며 10명 중 4명은 14시간 근무하기도 한다. 지난해 연차휴가를 사용한 날은 평균 3.4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특히 설, 추석 등 명절을 전후해선 우편물이 폭증해 한 달 85시간 초과 근무도 예사라고 한국 노동연구원은 밝히고 있다.

때로는 사회의 목탁이라며 존경을 받기도, 때로는 권력자들의 눈치보기 바쁜 ‘기레기’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기자직도 매우 고달픈 직업 중 하나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길 전용기 기내에서 휴가와 휴식 문화의 정착을 공약하면서 “나부터 대체 휴가를 반드시 가겠다”고 공언하는 장면이 TV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때 일순 상당히 높은 데시빌로 “와” 하고 터진 환호성을 대부분 예사롭게 보고 넘겼을 것이다. 환호성을 지른 사람들이 문 대통령의 비서관 등 수행원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환호성의 주인공이 TV 카메라에 비쳐지지 않은 사람들, 즉 기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평소 휴가를 제대로 가지 못하는 기자들로서는 대통령의 대체 휴가 절대 시행 공약이 그렇게 반가웠고 그 문화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면 자신들도 제대로 된 휴가를 찾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밀려왔을 것이다. 30년 기자 생활로 얻은 경험칙상 그런 판단이 들었다.

사실 기자는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노동 시간이나 노동 강도 면에서 최악의 ‘극한 직업’중 하나다. 새벽이 일어나 출입처를 전전하며 하루 종일 기삿거리를 찾아 뛰다가 회사에 들어가 회의, 기사 작성, 야밤 술회식을 거친 뒤 밤늦게 귀가해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다음날 새벽부터 다시 똑같은 일과를 되풀이 하는 게 기자들이다. 휴일도 제대로 없다. 신문 기자의 경우 신문 발행이 안되는 일요일 전날, 즉 토요일은 휴일이지만 자신의 출입처에 기삿거리가 생기면 언제든지 튀쳐나가야 한다. 군화를 신은 채 잠자리에 드는 5분 대기조 군인들과 마찬가지다.

한 분쟁 지역에서 사망한 기자들의 사진 모음. '국경 없는 기자회' 홈페이지에는 2017년 현재 전 세계에서 취재 중 순직한 기자수가 19명이라고 밝히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기자는 하루 25시간, 월화수목금금금 긴장해야 한다고 한다. ‘서면 취재하고, 앉으면 기사쓰고, 누우면 기획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저녁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지사고, 법으로 보장된 대체 휴가, 심지어 정기 휴가조차 반납하고 일하는 기자들도 부지기수다. 또 노련한 기자가 될 때까지는 기사 작성 시 온몸을 쥐어짜듯 조여드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 오래 살 생각은 애초 버려야 한다. 기자들의 기대 수명이 하도 짧아 생명보험회사에서 기자들은 보험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얘기도 한때 회자됐다.

이런 기자들에게 문 대통령의 대체 휴가 절대 시행 공언은 복음이었을 듯 싶다. 이 뉴스를 보도한 TV 앵커들 역시 이례적으로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며 실제 몇몇 앵커들과 고정 출연 기자들이 솔선하여 여름 휴가를 떠나는 장면이 시청자들에게 소개됐다. 지난 주 북한이 ICBM을 발사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긴박한 가운데 강행한 문 대통령의 여름 휴가에 대해 일부 야당이 ‘코리아 패싱’ 운운하며 힐난했지만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각 언론사들의 논평이 그 힐난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데는 그런 속사정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얼마전 김석동 전 금감위원장이 특강을 펼친 조찬회에 참석한 적 있다. 김 전 위원장은 “한국 경제 발전상과 한국인의 노마드 DNA”라는 제목의 특강에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과 한국의 예를 비교하면서 “16~20세기 일정 시기에 다들 급격한 경제 성장(1.6배~14배)을 이뤘지만 1960년부터 2015년까지 불과 55년만에 38배의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세계 유례없고 앞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그런 초고속성장의 배경으로는 한국인의 끈질긴 생존 본능, 승부사 기질, 개척자 근성 등을 들 수 있지만 근면하고 우수한 산업전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위원장이 상찬한 이 땅의 산업전사들, 바로 우리 노동자들이 다들 몸이 부셔져라(크런치모드) 일한 덕분에 지금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무수하게 많은 희생이 따랐고 또 아직도 희생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 이제 이 지옥같은 크런치 모드에서 벗어날 때가 됐지 않나 싶다.

어느 카드회사 광고 카피처럼 열심히 일한 우리들, 제대로 휴가를 찾아 떠나자. 가족들과 오순도순 지내는 저녁있는 삶도 이제 되찾자.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 막 물꼬를 틔웠다.

논설주간 강성보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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