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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맞은 그대, 게으름을 찬양하라자투리시사산문⑥ 다시 생각하는 ‘느리게 살기’ / 편집국장 강동수

1.

편집국장 강동수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에서 묵고 있다. 이곳에 있는 박경리 문학관의 한옥 한 칸을 빌린 것이다. 기실은 여기서 작가들의 창작을 돕기 위해 ‘작가 레지던스’를 하고 있는데, 나는 정식으로 신청한 것도 아니면서 평소 면이 있는 그곳 관장께 개인적으로 한 일주일만 머물게 해달라고 청을 넣었던 터였다. 혼자 쓰기엔 비교적 널찍한 방에 옛날 양반댁 사랑채처럼 대청마루를 따로 달아낸 공간을 얻었다. 장지문만 열면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는 숙소를 공짜로 빌려 혼자 뒹굴며 지내니 호사랄밖에.

노트북을 챙겨가긴 했지만 꼭이 일을 열심히 하러 간 것도 아니어서 늦은 밤이나 새벽 두세 시간,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빼면 대청마루에 앉아 주변 경관을 둘러보거나 숲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으며 혼자만의 고독(?)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신문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이 말 그대로 무위도식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런 저런 일거리와 모임들이 줄을 서겠지만 일단은 다 잊어버리기로 한다. 도시로 돌아가면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국제 관계는 또 그것대로 세상은 여전히 현기증 나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지만.

경남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어쨌거나 그 틈에 사천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 전어회를 안주 삼아 술타령을 벌이기도 했고 이곳의 박경리 문학관은 물론 인근의 이병주 문학관에도 다녀왔다.

어느 해 거름에 근처 절에서 법고와 타종예불을 지켜본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일 터. 타종예불을 지켜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가사와 장삼을 갖춘 스님 세 분이 번갈아 두드리는 그 법고 소리는 가슴 깊이 숨어있던 사는 일의 고달픔과 설움을 일깨워 콧날을 시큰하게 만든다. 규칙과 탈규칙, 균제와 파격을 넘나드는 그 리듬엔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힘이 있다. 서른 세 번의 범종소리도 마찬가지. 장중하면서도 둥근 그 원융의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의 아귀다툼에서 입은 상처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런데, 짧은 무위도식의 휴가 중에서도 일상에의 복귀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글쎄, 그 현기증 같은 느낌의 실체는 무엇일까. '경쟁으로의 복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경쟁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두려움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세상의 주류에서 탈락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자본주의를 끌고 가는 숨은 힘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십 수 년 전 '느림'과 '비움'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설파하는 책들이 많이 팔리고 신문에도 그런 기사가 자주 실렸다. 인문학 유행의 분위기를 타고 ‘탈경쟁의 삶’을 설파하는 강연도 자주 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시나브로 그런 이야기가 사라졌다. 하고 보니, ‘웰빙’이니 ‘힐링’ 같은 유행어도 비슷한 운명에 놓인 것 같다. 글쎄, 그런 단어들이 사멸돼 가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현대사회의 주류적 문명 트렌드가 되기엔 안타깝지만 너무 연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가 경쟁이며,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정글 같은 생존의 싸움터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들었던 짧은 농담 하나. 한 노인이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는 젊은 녀석을 꾸짖었다. "젊은 게 좋다는 게 뭔가. 일어나 일해야지." 그러자 젊은 녀석이 이렇게 되물었다. "일하면 어떻게 되나요?" 이후 대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일하면 돈을 벌잖아." "돈을 벌면 어떻게 되지요?" "부자가 되지." "부자가 되면요?" "부자가 되면 일 안하고 편하게 살 수 있지." "아, 난 벌써 그렇게 살고 있는데요."

2.

부자는 영어로 '리치(rich)'다. 그 어원은 라틴어로 왕이란 뜻의 '렉스(rex)'다. 다시 말해 부는 곧 권력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선 권력을 이용해 주위 사람의 부를 빼앗아야 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편하고 게을러지기 위해서 부자가 되는 것, 그러려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는 것. 그럴 거면 미리 게으름뱅이가 된다 해서 나쁠 것 없지 않느냐는 젊은 녀석의 반문엔 한 가닥의 역설적 진실도 숨어 있지 않을까.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들이 떠오른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혔던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의 <느림의 미학>에 나오는 소리다.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선택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해진 시간을 앞당기지 말고 시간에 쫓겨 허둥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방에서 뭔가 재촉을 받고, 또 그런 압력에 자진해서 따르는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느리게 산다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란 소리이겠다. 인생을 살며 다른 여러 가지를 희생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란 이야기일 터다. 하루 종일 시간에 부대끼는 삶을 살면 물론 많을 것을 얻을 수 있다. 돈도 더 벌고, 상사의 인정도 더 받고, 그래서 출세도 하고……. 느리게 산다는 것은 그런 세속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포기하는 결단 끝에 비로소 주어지는 은총 같은 것.

쌍소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적은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능력이 아니다. 이 기술에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패나 실수가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진 권리는 아니지만 계획과 수단은 개개인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은 지혜로움을 의미한다."

글쎄, 적은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움을 동반해야 하는 고급 기술인지까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아무나 쉽게 고를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어쩔 수 없이 순간순간 찾아드는 성공에의 조바심과 내면의 탐욕을 이겨낼 때 그런 기술은 자연스럽게 터득될 수 있는 것.

그 중에서도 이번에 특히 내 기억의 장막을 뚫고 튀어 오른 것은 이런 구절이었다.

"세상의 어떤 사건보다 하루의 탄생이 나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24시간마다 하루가 시작되고,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밝은 햇살로 시작하는지 안개로 시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 눈에 하루의 탄생은 갓난아기의 탄생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하루가 탄생할 때는 눈물도 없고 울음소리도 없다. 하늘이 열리는 비장함에는 고통도 없고 비극적인 죽음도 없다."

이 대목이 떠오른 것은 새벽에 대청마루에 앉아 동이 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검은 어둠이 깔려있던 하늘 한 끝에서 희미한 빛살이 스며들더니 이윽고 산마루가 번하게 밝아져 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침햇살을 받은 산이 푸르르 떨 듯 잠에서 깨어나고 대기 역시 수런수런 깨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 쌍소의 말마따나 하루의 탄생이 아니겠는가. 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맞듯 그 신생의 아침을 경건하게(?) 맞았다. 도시의 잡답(雜沓) 아닌, 깊은 산중에서 하루의 탄생을 맞은 것은 색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글쎄, 비록 그게 날마다 있는 일이 아니라 선물처럼 얻은 아주 예외적 시간이긴 했지만.

하고 보면, 새벽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어떤 갠 날, 푸치니의 오페라가 듣고 싶도록 그렇게 갠 날 저녁, 나는 대청마루 나무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두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서서 원경을 오래 바라본다. 뜨거운 해가 산 너머로 내려가려는 찰나 석양은 장렬하다. 건너편 한옥 기와지붕에 부딪쳐 테니스공처럼 튀어 오르는 햇살. 그리하여 세상은 조금씩 황혼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다. 푸른 하늘에 스며드는 낙조의 선연한 빛의 마술. 푸른빛과 붉은 빛이 뒤섞여 만든 진홍의 놀이 연출하는 그 짧고 덧없는 순간을 지켜보노라면 언어라는 허술한 도구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내 일생이 부질없어진다. 석양의 산 빛도 제각기 다르다. 연초록 벼 잎이 펼쳐진 들판 위로, 가까운 산은 진초록으로 빛나고 먼데 산은 조금씩 조금씩 채도를 높여가다가 종내는 검은 빛에 가까운 암녹색을 띠는 것이다. 중고교 미술시간에 배웠던 먼셀 색상표 중에서 녹색 계열을 빼서 늘어놓은 것 같다.

노을. 작가 미상(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글쎄, 화가라면 어떨까. 모든 사물을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빛을 포획하려던, 덧없는 인생을 한 오라기의 빛에 의지해 표현하려던 마네, 모네, 세잔느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빛이 도달하는 순간까지 나는 그릴 것이다’라고 되뇌던 반 고흐는 그러나 몇 개월 뒤 권총 자살하고 말았다지. 고흐가 지금 세상에 살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대신 컴퓨터의 그림판을 켜놓고 마우스를 움직여 색깔을 채워 넣을 테지. 아니, 한국의 어떤 가수 출신 화가처럼 조수에게 전화를 걸어 “야, 그 삼나무 둥치 부분은 ‘그림판’의 색상 80, 채도 58, 명도 124에 빨강 123, 노랑 125, 파랑 102번을 섞어 넣어”하고 대작을 시킬지도 모른다. 불쌍한 고흐…….

3.

선조와 광해군 시절 유명한 문인이자 비운의 혁명가, 그리고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은 일찍이 <누실명(陋室銘)>이란 한문 수필을 썼다. ‘누추한 내 방’이란 뜻이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방의 넓이는 10홀, 남으로 외짝문 두 개 열렸다. 한낮의 해 쬐어 밝고도 따사로워라. 집은 겨우 벽만 세웠지만 온갖 책 다 갖추었다. 쇠코잠방이로 넉넉하니 탁문군의 짝일세. 차 반 사발 따르고 향 한 대 피운다. 한가롭게 숨어 살며 천지와 고금을 살핀다. 사람들은 누추한 방이라고 말하면서 거처할 수 없다 하네. 내가 보기엔 신선이 사는 곳이라, 마음 안온하고 몸 편안하니 누추하다 뉘 말하는가. 내가 누추하다 여기는 건 몸과 명예 모두 썩는 것. 집이야 쑥대로 엮은 거지만 도연명도 좁은 방에서 살았지.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랴."

하고 보면,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작은 한옥 방 한 칸은 교산의 ‘누실’과 방불하다. 노트북을 얹을 수 있는 작은 앉은뱅이 책상 하나, 커피를 내려 마실 작은 전기 포트 하나, 그리고 간소한 이부자리……. 그렇지만 그 작은 공간조차도 이런저런 생의 작은 인연들이 쌓여서 내게 허락된 것. 평사리의 박경리 문학관을 꾸려가는 관장과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그 방을 잠시 빌리게 된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음덕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지금 잠시 머무르고 있는 이 작은 방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가 만들어낸 공간의 일부인 것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생전에 따로 뵐 기회는 없었지만 내가 박경리 선생에게 빚(?)을 진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나는 원주의 ‘토지문화관’이 마련한 작가 레지던스로 두 달 간 집필실을 빌려 공짜로 먹고 자고 했다. 그리고 그 때의 시간 덕분에 올해 초 장편소설 하나를 발간하기도 했다. 박 선생 자신은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시 <옛날의 그 집>)"고 글쟁이로서의 외롭고 고단한 삶을 토로하셨지만 어쨌든 당신께서는 타계하신 지금까지도 한국 문학의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나 같은 무명 소설가조차도 그분의 날개 밑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일 터이다. 하고 보면 문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눔과 베풂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고마워진다.

4.

다시 말하자. 합리성과 효율, 그리고 근면은 분명히 미덕이다. 그러나 그 미덕 속엔 삶이 숨 쉬는 공간과 시간을 갉는 파괴자의 얼굴도 숨어 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선 경쟁과 합리성, 그리고 효율이란 검증되지 않은 발전론의 신화가 숨어있지나 않을까. 우리 사회엔 속도와 경쟁을 부추기는 주장들이 너무 많다. 우리 아이가 남에게 뒤처지게 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사교육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 값이 오른다니 얼른 투기 대열에 끼지 않았다간 노후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어디 그 뿐인가. 나라 전체를 따져서도 그렇다. 우물쭈물 하다간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뒤지지 않을까. 이러다가 나라 전체가 쫄딱 망하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잘 살아야 하는가 하는 자문이 생략돼서는 곤란하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글에서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다. "근로가 미덕이란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것이다."

아! 게으르게, 한없이 게으르게, 맴 맴 맴 차르르 하는 매미 소리나 들으며 게으르게 살고 싶다. 글쎄, 그게 이순(耳順)을 삼 년 앞둔 사내의 소망이라면 너무 철딱서니 없는 소리일까.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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