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알베르게 금곡’과 공창마을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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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알베르게 금곡’과 공창마을 막걸리
  • CIVIC뉴스
  • 승인 2023.10.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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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공간이면서 다목적 공동체 공간 '알지'
변두리 금곡동에서 벌어진 의미있는 활동
약육강식 자본세상에 맞서 협동의 가치 전파
‘공창 막걸리’ 등 마을콘텐츠 재발견 계기

간판이 새첩다. 개성이 뚝뚝 묻어나는 디자인. 알베르게 금곡. 뭐하는 곳이지? 잔뜩 궁금증이 발동한다. 알베르게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다는 여행자 숙소다. 거기에 금곡이 붙었으니 무슨 조합인가? 공간을 열고 3개월쯤 지나자 주변에서 쑥떡거리기 시작했다. 미장원이다, 책방이다, 작업실이다, 상담실이다, 꽃집이다, 카페다, 연구실이다, 수다방이다, 예약제 술집이다….

부산 북구 금곡동의 개인 문화공간인 '알베르게 금곡' 내부 모습(사진: 박창희 기자).
부산 북구 금곡동의 개인 문화공간인 '알베르게 금곡' 내부 모습(사진: 박창희 기자).

사적이면서 공적인 공간

“제 개인 공간이에요. 단, 용도를 열어놓고 다목적으로 활용하려고 해요. 뭔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동안 일에 치여 못했던 것들, 한번 해보고 싶은 것들, 사소하고 소소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

50대 초반의 이 여자, 주인장은 부산 북구 금곡동 주민 김부련 씨다. 화명동에서 20년 가까이 ‘맨발동무 도서관’을 운영해온 주역. 도서관 사서, 마을도서관 활동가, 문화기획자, 걷기꾼, 여행가…. 어떤 것을 갖다붙여도 어울릴 것 같은 여자. 스스로 “중년에 사고 한번 쳤죠 뭐”하며 깔깔대고 웃길래 따라 웃다가 문득 놀랐다. 이런 사고를 칠 수 있는 내공과 뚝심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운영은 어떻게 하는 거죠?

“사비로 꾸몄고 사비로 운영돼요. 큰 돈이 들진 않았어요. 지원이나 후원 시스템이 되면 그 만큼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죠. 그동안 숱하게 겪었어요. 이제 자유롭고 싶어요. 자본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마을 수다방같은 공간이 생기니 주변의 언니, 동생, 지인들이 놀러 와요. 모여서 떠들고 놀다보면 걸맞는 모임이 꾸려지고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네요.”

알베르게 금곡(약칭 ‘알지’)이 문을 연 것은 2023년 2월 초. 오랫동안 도서관 운동을 해온 김부련 씨는 삶의 재미와 의미를 함께 좇기 위해 일대 전환을 모색한다. 출발은 단순했다. ‘사적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남편을 설득해 전세금을 마련한 그는 금곡동 공창마을에 작은 가게를 얻었다. 좋아하는 책을 갖다놓고 그간 국내외 여행지에서 모은 소품도 전시하고 가운데에 탁자를 앉히니 그럴듯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알베르게 금곡' 운영자인 김부련 씨(사진: 박창희 기자).
'알베르게 금곡' 운영자인 김부련 씨(사진: 박창희 기자).

참신한 아이디어와 협동정신

‘알지’의 벽면 현황판에는 막 진행되었거나 진행중인 일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월말 어묵탕, 알지? 옥상 선셋 알지, 그림책 읽기 모임, 아무튼 해방 모임, 엄마의 옷장, 미경의 풀빛 옷장, 술익는 금곡…. 마치 소꿉장난 같아 보이지만, 내막을 알아보니 하나 하나가 예삿기획이 아니다.

지난 8월초 금곡도서관과 공창공원에서 열린 ‘8월의 크리스마스’ 행사는 ‘알지’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설명한다. 이 행사는 북구 문화도시 사업인 ‘북구다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역주민과 시민기획자, 예술가, 공동체 모임 등이 협력해 금곡동에 활력을 불어놓고자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한여름 크리스마스 놀이’라는 역발상으로, 물총놀이, 마을마켓, 체험부스를 마련했고, 대천마을학교 밴드와 금곡중 통기타 동아리, 초등학교 댄스팀을 불러냈다. 조용한 금곡동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월말 어묵탕, 알지’는 둘러앉아 오뎅탕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모임. 알지에 출입하는 언니 셋(어묵자매)이 자갈치 인근 부평시장에서 어묵을 사 오고, 무와 파를 가져오고, 나눠서 과일을 준비한다. 분위기 메이커로서 술도 빠질 수 없다. 지난 2월부터 매달 진행했는데 갈수록 얘깃거리가 풍성해졌다. 얼마전엔 초대받은 지인이 기타를, 또다른 이는 어코디언을 가져와 미니 음악회를 열었다. 초대 좌석은 8석. 반려동물이 끼면 사람 자리는 줄어든다. 자리는 보통 오뎅이 불어터지기 전에 끝난다. 한 참가자는 “가성비와 만족도가 매우 높은 이벤트”라고 귀띔했다.

'oo의 옷장' 이벤트를 알리는 게시판(사진: 박창희 기자).
'oo의 옷장' 이벤트를 알리는 게시판(사진: 박창희 기자).

‘OO의 옷장’은 잘 안 입는 자켓이나 드레스를 가져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 입게하는 이벤트. ‘경숙 언니’는 이 자리에 옛날에 입던 짧은 치마를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어? 언니도 옛날에 짧은 치마 입었어? 예뻤겠다아, 푸하하!” ‘OO의 옷장’이 열리는 날 알지엔 난데없이 웃음꽃이 핀다.

지난 7월 ‘알지’ 동료들은 협동조합 ‘바이시스터즈’를 만든 뒤 ‘사뿐사뿐 느긋하리’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다. 한 솜씨 하는 주부들이 요일별 메뉴를 특화하여 맛과 정성을 파는 동네 협업 식당이다. 식당에는 가볍게 읽을 그림책, 동화책 등을 비치했고 길 고양이도 들여놓았다.

지난달엔 ‘난리부르스 5’라는 청년식당을 열었다. 지역청년 5명이 일일 식당을 꾸리고 수입금의 10%를 기부하는 식당이다. 비록 수익은 미미했다지만 마을을 이해하고 협동정신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부련 씨는 지난 2월 알지 개소 후의 사소하고 소소한 일들을 세세하게 페북에 기록해 놓았다. 그는 기록이 곧 마을공동체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알베르게 금곡에서 진행한 '옥상 선셋 알지' 행사(사진: 김부련 씨 제공).
알베르게 금곡에서 진행한 '옥상 선셋 알지' 행사(사진: 김부련 씨 제공).

공창 막걸리와 ‘술익는 금곡’

금곡동을 답사하던 중 김부련 씨는 공창마을의 마지막 주모로 알려진 주민을 만나 옛날 ‘공창 막걸리’ 이야기를 들었다. 페북에 소개된 주모 이야기를 잠깐 옮겨본다.

“우리 공창마을엔 옛날부터 아주 큰 누룩 창고가 있었어. 산성마을보다 한 100년은 더 오래된 누룩이라고 하지. 금정산 맑은 물과 낙동강의 강바람이 만나 빚어진 막걸리라 맛이 인근 동네에서 최고였어. 예전엔 집집마다 술을 빚었지.”(2023. 9. 13. 김부련 씨 페북)

‘누룩’과 ‘막걸리’에 귀가 번쩍 뜨인 김부련 씨는 마지막 주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창 막걸리’를 빚기로 했다. 이른바 ‘술 익는 금곡’ 프로젝트다. ‘알지’의 위치가 옛날 공창마을의 주막거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알지’의 제안에 ‘공창마을행복센터’가 화답했고, 산성마을에서 누룩을 구해 공창마을 감나무집에 술독을 마련했다. 감나무집은 공창행복마을센터 이수재 센터장의 주택으로, 2층에서 낙동강 물길과 금정산 고당봉이 동시에 보이는 놀라운 뷰를 자랑한다.

10월 6일 금곡동 감나무집에서 열린 공창막걸리 시음회 겸 마당전 모습(사진: 박창희 기자).
10월 6일 금곡동 감나무집에서 열린 공창막걸리 시음회 겸 마당전 모습. 가까이 낙동강이 보인다(사진: 박창희 기자).

지난 6일 오후 4시, 공창마을 감나무집에서 마침내 공창 막걸리의 술독이 열렸다. 잊혀졌던 공창 막걸리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김부련 씨와 협동조합 바이시스터즈가 파전을 굽고 두부김치를 만들었고 이수재 센터장이 손님을 맞았다. 감나무집이 졸지에 ‘금곡 이야기 마당전’이 열리는 전시장 겸 주막으로 변모했다. 판소리꾼인 송소란 선생이 초대돼 단가와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뽑자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를 향해 귀를 열고 경청하는 환대의 자리. 참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아래서 맛보는 모처럼의 정취에 기분이 푸근해졌다. 금곡의 옛 사진과 영상을 전시한 마당전에 초대된 마을 어르신들은 금곡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금곡동에는 4개의 자연부락(공창, 동원, 화정, 율리)이 있는데, 그중 공창마을이 유명하지. 공창(公昌)이 뭐냐고? 조선시대 동원진(東院津)의 역원과 수참(水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야.”

“그러쟈. 여기가 조선시대땐 일본 사신이 숙식하던 교역 거점이라잖어. 수참 자리는 금곡대로 550번길 대우이안아파트 내 놀이터 주변인데, 발굴조사에서 건물터와 유물이 확인됐지. 뼈대있는 곳이여.”

“금곡동(金谷洞)은 금정산 고당봉에서 낙동강변으로 뻗어내린 첫 골짜기(谷)라는 뜻이라고 하지. 공창마을 뒤 도덕골의 불메등에서 쇠를 달구고 남은 쇠똥이 발견된 적이 있어. 가야시대 야철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금정산 맑은 물과 누룩으로 빚은 공창막걸리(사진: 박창희 기자).
금정산 맑은 물과 누룩으로 빚은 공창막걸리(사진: 박창희 기자).

듣고 보니, 금곡동이 예삿마을이 아니다. 역사 전통이 있고 희미하나마 공동체 정신이 계승되는 곳. 이런 곳을 부산의 한갓 변두리로만 본 것은 과문한 탓이다,

‘오래되어 고정된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그 시작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난, 오래되어 고정된 '금곡동'의 낡고 편견어린 수식어를 쨍하고 환한 우리의 이야기로 조금씩 조금씩 다시 써보기로 한다.’(2023. 6.15. 김부련 씨 페북)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알지'가 금곡동을 살맛나게 바꾸고 마을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의 시작과 실천이 세상의 바꾸는 기폭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보다 개인, 연대보다 단독, 나눔보다 독식, 그리고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대. 자본에 주눅들지 않고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질경이처럼 알베르게 금곡이 ‘끝내’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발산하길 바란다.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지만, ‘술 익는 금곡’의 두 번째 마당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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