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합강정에서 배운 낙동강의 '화합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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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합강정에서 배운 낙동강의 '화합정신'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3.08.0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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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낙동강 합수지에 세워진 함안 합강정
퇴계‧남명 아우르는 통합‧화합 메시지 던져
1607년 선유놀이 등 교육 관광 콘텐츠 활용을

주말에 함안 용화산 기슭의 합강정(合江亭)을 다녀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갔다가 묵직한 메시지를 얻어서 돌아왔다. 인적없는 정자(亭子). 활짝 열린 대문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누정을 찾다보면 대문이 잠긴 경우가 다반사라, 열린 대문은 그 자체로 객에 대한 배려가 된다.

합강정은 1633년(인조 11)에 건립한 정자로, 함안선비 간송 조임도(趙任道)가 은거, 수학한 곳이다. 여러 이름이 있었지만,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어서 합강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전국에 합강정이란 정자가 몇곳 있지만, 이곳만큼 '합강' 또는 '화합'의 의미를 진지하게 말해주는 곳은 찾기 어렵다. 

함안 합강정 들머리에서 본 낙동강 본류와 남강의 합류지(사진: 취재기자 박창희).
함안 합강정 들머리에서 본 낙동강 본류와 남강의 합류지(사진: 박창희 기자).

이번에 조임도란 인물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조임도는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1604년 향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저술에 매진했다. 1634년 남명 조식을 모신 김해 신산서원(산해정) 원장을 맡은 것은 그의 학식과 평판을 말해준다. 1638년 여헌 장현광의 언행문답 등을 모은 ‘취정록(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금라전신록은 함안의 인물과 문학 등을 담은 자료집으로, 학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다. 

조임도의 호 간송(澗松)은 ‘물가의 소나무’란 뜻. 간송은 낙동강을 끼고 살면서 강의 흐름과 이치를 궁구했다. 합강정 대문에는 얼마전까지 ‘낙원문(洛源門)’이란 현판이 달렸었다. 낙원은 ‘낙동강의 근원에 닿는다’는 뜻. 조임도의 지향점이 읽힌다. 강물이 찰랑거리는 대문 앞마당엔 간송이 직접 심었다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아직도 건재하다. 대숲 사이로 멀리 남지 구철교와 신철교가 보인다.

퇴계와 남명을 아우른 학자

회봉 하겸진이 쓴 ‘합강정 중수기’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물을 보는데도 그 방법이 있어 반드시 그 연원에서 뜻을 구하는데, 간송은 맑은 자질로 위기지학을 몸소 행했으며, 한강 선생과 여헌 선생의 정신을 본받아 그 덕을 성취했다….’

여기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한강 정구(1543~1620)와 여헌 장현광(1554~1637)은 경상 좌/우도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이들의 서로 다른 학문적 방법과 내용을 통합해 영남학파의 맥을 계승한 유학자다.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조선 유학의 물줄기를 통합과 화합으로 이끈 주역들이다.

간송 역시 한강과 여헌을 좇으며 퇴계와 남명의 사상과 정신을 통합하려 애썼다. 간송은 여헌의 수제자였다. ‘여헌 문하의 10철(十哲)’ 가운데 간송은 첫손에 꼽히는 제자였다. 원래 간송의 이름이 기도(畿道)였는데, 여헌이 이름을 바꿔주었다고 한다. “맡길 임(任) 자를 써서 임도라고 한 것은 아마도 여헌이 ‘도를 너에게 맡긴다’는 의미로 지어주지 않았을까”하고 동양학자 조용헌은 풀어낸다.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의 합강정 모습(사진: 박창희 기자).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의 합강정 모습(사진: 박창희 기자).

두 강물이 만나는 합강정이라는 이름처럼, 간송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모두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두 학파의 학풍이 합강정에서 합류되는 셈이다. 퇴계가 안동과 청량산 일대에서 흘러내리는 낙동강 본류이고, 남명은 산청 등 지리산 일대에서 흘러든 남강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간송에게 있어 ‘합강’은 경상 좌도와 우도의 만남, 퇴계와 남명의 조우, 나아가 영남학파의 통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신적 물줄기가 영남의 사상으로,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녹아든 측면도 있을 터이다. 이는 바로 낙동강의 화합정신, 낙동강 살리기의 메시지가 아닐 것인가. 

선비들의 로망, 낙동강 뱃놀이

1607년 초봄, 낙동강에서 일대 문화적 사건이 있었다. 한강, 여헌, 망우당, 조식, 조방 등 당대의 내로라는 선비들이 참가한 뱃놀이였다. 뱃놀이의 출발은 의병장으로 잘 알려진 망우당 곽재우(1552~1617)가 말년에 은거하던 창암정(滄巖亭)에서 시작되었다. 창암정은 창녕군 도천면의 낙동강변 정자. 이곳으로 한강과 여헌이 찾아왔다. 당시 한강의 나이는 64세. 연세로나 학식으로나 큰 어른이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한강과 여헌, 망우당은 배를 타고 합강정이 있는 용화산 자락으로 갔다. 용화산에서는 조임도의 부친인 입암 조식, 숙부인 두암 조방이 한강 일행을 맞았다. 조식 조방 형제는 아마 이 모임의 호스트였던 모양이다. 당시 23세이던 조임도는 부친을 도우며 기록을 담당한다. 

당대의 석학명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선비들이 운집하였다. 참석자 중 기록에 언급된 선비만 35명. 실제는 휠씬 더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 배에 나눠 타고 용화산 아래의 용화암~청송사~도흥진~내내촌~경양대~시우포~평사면~창암정으로 내려갔다. 위치가 애매한 곳이 있지만 대부분은 지금도 온존한다. 청송사는 지금의 반구정, 내내촌은 남지철교 근처, 창암정은 도천 망우정이다. 

이들 일행은 낙동강 흐름에 배를 맡긴 채 중간 중간에 들러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고 경전에 대한 문답도 한다. 이른바 동범(同汎), 선유(船遊)놀이다. 선유놀이는 조선 선비들의 로망으로, 이후 하나의 문화전통으로 이어진다.

참가자 중에는 임진왜란 때 싸운 의병이 적지 않았다. 한강과 여헌, 망우당, 박충후, 조방 등이 모두 의병을 지휘했거나 직 간접으로 관여한 인물들. 뱃놀이의 좌장격인 한강은 1580~81년 창녕현감, 1586~87년 함안군수를 지낸 이력이 있다. 행사 날짜가 1607년 음력 1월 27~29일이니 임란 끝나고 8년 정도의 시점이다. 풍찬노숙의 쓰라림을 견뎌낸 의병활동을 돌아보고 영남학파의 단합을 꾀하고자 한 뜻도 있었으리라.

1607년 함안과 남지 일대의 낙동강 선유놀이를 기록한 '기락편방'(사진: 박창희 기자).
1607년 함안과 남지 일대의 낙동강 선유놀이를 기록한 '기락편방'(사진: 박창희 기자).

이때의 뱃놀이 상황은 ‘기락편방(沂洛編芳)’이란 책에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란 기록으로 고스란이 남아 있다. ‘기락’은 낙동강 물가를 말하고 ‘편방’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뜻한다. 기락편방은 한강 정구와 조임도 등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함안조씨 집안 후손인 박상절이 1758년 펴냈다.

동범의 말석에 참여했던 조임도는 1620년 ‘용화산하동범록 추서(追序)’를 쓰면서 화공을 구하여 뱃놀이를 그리고 책을 만든 과정을 적었다. “조식·조방 형제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신초 등이 술잔을 돌렸다. 술상은 간결하고 예의를 갖추었으며 화락·경건하여 시끄러운 웃음도 없고 장난스럽지도 않아 숙연하고 화목하였다.” 인물평도 곁들였는데, 한강의 영웅호걸다운 재덕(英豪才德), 장현광의 따뜻하고 두터운 기상(渾厚氣像), 곽재우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흉금(灑脫胸襟)을 보았다고 했다. 이런 명사들과 한 배를 타고 체취를 나누었으니 그 감회가 어떠했을까. 청년 조임도에겐 이보다 더 큰 공부가 없었을 것이다. 

반구정과 망우정의 밀어 

합강정 바로 위 용화산 중턱에는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학자이자 의병인 두암 조방(趙垹, 1557~1638)이 만년에 머물렀다는 곳이다. 경치가 기막히다.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장엄한 풍경과 너른 남지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반구정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가희 장관이다. 특히 칠월 백중날 달이 뜨면 월주(月柱)가 하늘과 강을 잇는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달기둥,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함안 용화산 중턱의 반구정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남지 일대(사진: 박창희 기자).
함안 용화산 중턱의 반구정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남지 일대(사진: 박창희 기자).

반구정 앞마당에는 수령 670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자태가 위풍당당하다. 수형이 멋지고 그늘이 넓고 깊다. 두암의 후손이 관리동을 지어 반구정을 지키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반구정에서 낙동강 아래를 굽어보면 멀리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忘憂亭)이 가물거린다. 망우정은 망우당 곽재우가 만년에 은거한 정자다. 정자는 3칸이며 소박한 모습으로 그저 낙동강만 바라본다. 망우당의 우국충정과 만년 은거의 삶이 떠올라 잠시 마음이 울컥해진다. 정자 주위 여기저기를 살펴보지만 전장을 호령하던 장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망우당이 잊고자 한 근심은 무엇이었던가. 두암과 망우당은 의병활동을 하며 친숙해진 사이. 만년에는 낙동강가에서 약속이나 한 듯 은둔의 삶을 택했다. 아마 생사와 시대를 초월해 서로 나누고픈 이야기가 많았을 것 같다. 세월을 뛰어넘어 반구정과 망우정이 낮게 조응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의병장 곽재우가 만년에 은거한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의 망우정(사진: 박창희 기자).
의병장 곽재우가 만년에 은거한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의 망우정(사진: 박창희 기자).

합강정에서 자연의 통합과 인심의 화합정신을 배울 수 있다면, 반구정과 망우정에서는 의리와 은거의 도를 엿본다. 잠자는 정자를 깨우니, 이야기거리가 많아진다. 정자가 퇴색한 선비문화의 산실이 아니라, 훌륭한 교육의 장, 지역의 문화관광 콘텐츠가 되고 있음이다. 합강정-반구정-망우정-광심정-소우정-곡강정-오우정.... 낙동강 따라 세월 따라 이야기를 감춘 정자들이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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