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보험의 기틀을 마련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힘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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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의료보험의 기틀을 마련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힘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 취재기자 이창현
  • 승인 2023.07.2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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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를 기념하는 장기려 기념관
평생을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의술을 베푼 참 의사
장기려 박사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의료보험 기틀 다져

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시기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이인국은 실력 있는 의사이지만 나라가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의술과 처세술로 인생의 승리자 자리에 오르는 기회주의자다. 이 소설은 그 당시 한국 사회의 기회주의자를 비판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에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처럼 기회주의자도 있었지만, 그 당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의술을 베푼 장기려 박사가 있다.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장기려 박사의 업적을 기린 장기려 기념관이 있다. 장기려 기념관은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기념관으로 장기려 박사의 소탈함과 봉사 정신을 나타내듯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 기념관은 사진과 일화, 전시물을 통해 장기려 박사의 업적과 그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장기려 박사는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로서 이곳에서는 그가 직접 사용한 수술대가 있다. 장기려 박사는 평안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초기 간암 환자를 대량 간 절제술로 완치시켜 한국 간 외과학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장기려 박사의 수술법은 외과의들에게 수술의 기본이자 교과서로 통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장기려 박사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선행을 베푼 많은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의술 실력을 돈이나 명예 같은 성공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장기려 박사는 6.25 전쟁 때 남한으로 피난 해 1951년 영도에 천막으로 복음병원을 세워 이곳에서 피난민을 무료로 진료했다. 한 가지 일화로 가난 때문에 잘 먹지 못해 병이 난 환자를 위해 장기려 박사는 환자의 처방전에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라고 적었고 자신의 월급을 털어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의 값을 주었다. 장기려 박사의 이런 면모가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로 만든 것이다.

또한 장기려 박사는 의료보험의 모태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다.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사람이 진료비를 걱정하지 않기를 원했다. 장기려 박사는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채규철로부터 덴마크의 의료보험제도를 통해 무료로 치료받은 것을 듣고 뜻을 함께한 동료들과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68년 5월 13일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립해 이후 가입자 23만 명에 달하는 조합으로 발전했다. 이후 의료보험제도 시행으로 조합이 해산했다.

이 기념관에서는 장기려 박사가 받은 동양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메달이 전시되어 있다.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세운 공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장기려 박사는 이때 받은 상금 2만 달러를 전액 기부했다.

장기려 기념관은 그가 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대학생 백상훈(22, 경남 김해시) 씨는 “장기려 박사의 업적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장기려 박사는 생전에는 바보 의사라 불렸지만, 지금은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창현).
장기려 박사는 생전에는 바보 의사라 불렸지만, 지금은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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