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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 발화 시점부터 지켜보고 북돋워왔어요"늦깍이 외교관 출신 한중문화예술포럼 유재기 회장, "한류 용어 첫 사용은 1997년 중국 기자가..." / 김지언 기자

2017년에도 ‘한류(韓流)’는 여전히 지구촌에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한류란 단어는 언제, 어디서 유래된 말일까? 1997년 7월. 중국의 CCTV 1에서 한국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방송돼 큰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이 커졌다.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던 그 해 가을, 당시 외교관이었던 현 한중문화예술포럼 유재기 회장과 당시 베이징의 주요 언론사 기자들 사이에서 저녁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중국 기자 중 누군가가 한국 드라마의 유행을 ‘한류’라고 표현했다. 유재기 회장은 그때 처음 한류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1997년 한국에서 IMF가 발생했고, 1998년엔 중국에서 100년 만의 대홍수가 일어나 엄청난 인명피해를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양국간 문화 교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두 나라 모두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데 주력하느라 한류라는 단어가 사용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1999년 가수 클론이 북경에서 공연하고 이듬해인 2000년에 가수 H.O.T.가 북경에서 콘서트를 열면서 중국에 다시금 한류가 일어났다. 유 회장이 처음 한류라는 단어를 들은 지 3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한류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중국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 회장은 “우리나라 문화가 내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국에서 한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니 기분이 좋았다”며 “당시에 ‘우리나라의 위력이 정말 대단하다’라는 걸 깨달았고, 한민족의 저력을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1948년 경남 진주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유 회장은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한문에도 관심이 많아 자연스레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점을 고려하면 남들보다 수십 년 빨리 중국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점점 커져 간 이웃나라에 대한 궁금증은 마침내 그를 중국으로 이끌었다.

유 회장은 중국에 관심이 많아 40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당시 5년제이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공부했고, 1993년 7월부터 12월까지는 6개월간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한중문화비교 연수를 받았다. 그는 중국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하다 1995년, 48세에 늦깎이로 외교관의 꿈을 이루게 됐다. 외교관이 된 후에도 학업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2003년부터 2년간 중국사회과학대학원에서 문화산업을 전공하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겨있는 유재기 회장의 모습(사진: 취재기자 김지언).

중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오래 교류해왔기 때문에 문화의 유사성이 크다. 중국을 오가는 외교관을 꿈꾸게 된 가장 큰 이유로 유 회장은 중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한국인들이 중국 문화를 잘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꼽았다. 그는 “상대방의 문화를 깊이 있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이 바로 외교의 초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5년 2월부터 1999년 2월까지 4년간 1등 서기관으로 중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당시 한중교류가 막 문을 여는 단계여서 각종 MOU 체결과 양국 정부 간의 문화공동위원회 개최 등이 잇따라 시작됐다.  그중에서도 1998년 10월 초 베이징에서 개최된 ‘한국문화주간’ 행사는 외교관 유재기의 주도로 4박 5일간 중국에서 개최됐는데, 당시로선 중국에서 열린 최고의 한국문화 관련 행사라는 큰 의미가 있었다. 

이 행사는 한국 전통의상 패션쇼, 국립국악원의 종묘제례악 연주, 가수 코리아나의 특별공연 등 한국의 문화예술을 베이징 시민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 회장은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중국 시민들에게 (최초로) 올바르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여서 정말 보람찼다”고 회상했다.

유 회장(왼쪽)과 중국의 ‘천진일보’사 부사장이 악수하고 있다(사진: 유재기 회장 제공).

1999년 2월, 4년간의 중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근무하다가 유 회장은 3년 뒤인 2002년 다시 발령을 받아 중국으로 떠났다. 그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주중대사관에서 문화 참사관으로 일하는 동안 중국의 후난위성 채널에서 방영한 <대장금>이 제2의 한류 열풍을 몰고 왔다. 

중국 내에서 한류가 절정을 맞은 그 때, 유 회장은 베이징대, 어언문화대 등 주요 중국 대학에서 ‘한류(韓流)와 한풍(漢風)’과 관련된 특강도 했다. 강연은 중국 내에서 한류라는 한국 문화 열풍이 이는 동시에, 한국 내에서는 한풍이라는 중국 문화 열풍이 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또 중국의 주요 지방정부에서 개최한 문화산업 관련 세미나에 발표자로도 참석하며 왕성하게 한국 문화를 알렸다. 그는 “그때가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중교류에 대한 내용을 담은 유 회장의 저서(사진: 취재기자 김지언).

유 회장은 2006년, 58세로 외교관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장, 국제문화산업교류재단 사무처장을 역임하며 한류의 세계 확산을 계속 추진해 왔다. 그는 지금도 사단법인 한중문화예술포럼 회장, 한중미래연구원 부원장, 한중문화교류회의 운영위원 등 세 가지 직책을 맡고 있다. 한중미래연구원은 사단법인 아시아문화교류협회 내에 있는 기구로 그는 이곳에서 한중 공공외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한중 정상 간의 합의 사항으로 만들어진 한중문화교류회의에서는 운영위원회 중 한 명으로서 양국의 문화·인문 교류 강화에 힘쓰고 있다.

초창기 한류는 주로 대중문화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중국예술연구원 측에서는 중국인들이 한국의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한국문화를 접하고 싶어 한다는 요청을 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유 회장은 격조 높은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중국인에게 이해시키고, 중국의 품격 있는 문화를 한국인에게 선보임으로써 상호 문화 간의 올바른 이해를 끌어내기 위해, 2006년 10월, 사단법인 한중문화예술포럼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한중문화예술포럼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사단법인으로 한중간 문화예술 교류 및 협력에 관한 사업, 한중 양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예술 포럼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교류에 힘쓰고 있다. 그는 “직책을 세 개나 맡고 있지만 힘들지 않다. 오히려 한중 관계 발전에 더 기여하고 싶어 중국의 문화와 문화 산업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 대해 조예가 깊은 유 회장은 지금도 틈만 나면 한중 문화 교류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지언).

한국과 중국은 올해인 2017년 수교 25돌을 맞는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중 간에 긴장감이 감돌고, 사드 배치 문제로 한중간의 관계도 서먹해진 지금, 유 회장은 한중 간 문화교류 전망에 대해 “한중 양국은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고속 성장을 해왔다”며 “사회경제적으로 여러가지 어려운 점들이 있었고 또 앞으로도 생길 수 있지만, 양국 간 문화예술은 물론 스포츠와 관광 분야에서의 교류는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런 발전을 위해선 상대방 문화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국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취재기자 김지언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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