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배우 고인범 편] 부산연극 전통 지키며 드라마·영화 넘나드는 부산 토종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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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배우 고인범 편] 부산연극 전통 지키며 드라마·영화 넘나드는 부산 토종 스타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19.03.2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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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탤런트·배우 고인범에게 연기의 길을 묻다 / 편집국장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5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산연극협회장 고인범(高仁範) 회장(60, 2019년 기준). 부산을 바탕으로 42년 연극연기 생활을 하며, 기획자∙무대감독∙총연출을 두루 경험한 부산연극의 파수꾼이다. 높아가는 주가를 바탕으로 드라마▫영화에까지 영역을 한껏 넓혀 전국구 스타덤에 오른 부산 사나이다. 부산연극협회 사무국장, 감사,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이른 현장형 문화행정가다.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장착, KNN <쇼 유랑극장>을 통해 부산∙경남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인기 진행자∙출연자다.

부산 연극배우 고인범은 부산을 바탕으로 연극연기를 하며 드라마 영화까지 종횡한 전국구 스타다. 사진은 KBS 수목 드라마 <각시탈>(2012)에서 일본계 은행가 조영근으로 출연한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그는 역량 있는 연극배우∙탤런트∙영화배우다. 지금까지 연극 86편, 드라마 40편, 영화 14편에 출연했다. 대학입학과 함께 연극에 투신, 37년여를 오직 연극 및 드라마∙영화 연기에 몰입해 온 그 집념은 어디에서 출발했나? 연기자 출신 행정가로 연극계 내부 및 연극계-지역사회의 소통에 성공한 그 저력의 뿌리는 무엇인가? 연기자의 삶 속에서 ‘부산 거주-서울 촬영’ 생활을 고수하는 부산 토박이, 그의 과제와 꿈은 또 무엇인가?

그는 오직 부산을 텃밭으로 연극을 하며 작은 역할에도 등뼈를 곧추세우고 최선을 쏟아부은 끝에 드라마 40편에, 영화 13편에까지 출연하며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다. 사진은 연극 <대양 7호>(2011)에서 갑판장으로 출연, 부산연극제 연기상을 수상했다(사진: 차용범 제공).

[약력]

1959년 부산 출생. 전포초등-주례중-부산전문대 졸, 2002년 동서대 공연예술학부(연극 전공) 졸업. 2005년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문화영상학과 수료. 1981년 연극 <444>로 데뷔, 1990년 액터스(구 처용극장) 극장장. 1991년 제11회 부산연극제 최우수연기상. 1995년 극단 액터스 대표. 2012년 제30회 부산연극제 우수연기상. 2014년 제26회 봉생문화상(공연 부문) 수상. 2007년 (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 부지회장, 현)부산국제연극제 집행위원. 2008년 현) 광대연극제 운영위원장. 2013년 현)(사)한국연극협회 부산광역시지회장, 현)한국연극협회 이사.

고인범. 2019년 기준 연극인생 42년∙방송생활 16년여를 특유의 열정으로 지속해 온 부산 대표 연극배우다. 부산의 열악한 연극제작 여건을 개선하려 진한 애착을 쏟고 있는 문화 행정가다. 영화-드라마 영역을 종횡하며 녹화(촬영)일마다 부산-서울을 오가는 부산 토박이다. 그가 제26회 봉생문화상을 수상한 이유, 부산예총이 그를 상 후보로 추천한 이유다.

Q. 2014년 12월 제26회 봉생문화상(공연부문)을 수상했다. 전국 유수의 연극무대와 드라마영화계를 누빈 연기자로, 부산연극협회를 이끌며 지역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던 점을 평가받은 것으로 안다. 수상 소감을 전한다면?

“난, 수상소식을 전하는 짧은 전화통화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한 적이 없다. 난, 봉생문화상을 정말 받고 싶었다. 다른 상과는 달리 만 55세 이하 인사에게만 주는 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받는 것보다, 지금껏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하라는 의미가 더 큰 상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 큰 원동력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는 이 상의 연령제한, 그 해에 상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재수(?) 끝에. 나름 그가 열정을 쏟아온 부분들을 두루 인정받은 결실이니 그 감격도 대단했을 터-.

7]고인범은 2014년말 봉생문화상(공연부문]을 수상했다. 부산대표 연극배우, 연극문화 행정가, 연극-드라마-영화를 종횡한 부산사나이의 노력을 평가받은 결과다. 사진은 봉생문화상 시상식 장면(사진: 차용범 제공).

소통·화합으로 신명나는 협회 꿈... 예산도 키워가야

Q. 2013년에 부산연극협회장을 맡았다. 부산에서 연극활동을 오래 해온 토박이지만, 연기자 출신 협회장의 어깨는 특히 무거울 것 같다.

“협회장 임기 3년에 벌써 2년이 지났다. 올해가 마지막이다(2015년 기준). 4월 있을 부산연극제가 발등의 불이다. 부산연극제는 전국의 초연(初演) 창작연극만 참가할 수 있는 연극제다. 연극제를 잘 시작해서 잘 마쳐야지. 무엇보다 협회 예산규모를 키우는데도 열을 쏟고 있다. 부산연극을 지원할 협찬 루트를 여러 곳 뚫고 있다. 협회장 업무추진비도 알뜰히 모으고 있다. 예산을 키워 연극인상과 연극인 장학금, 연극인 자녀 장학금을 잘 운영할 생각이다.“

부산 연극계에 연기자 출신 협회장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연출이나 극작가 출신이 대부분, 순수 연기자로는 전성환(9대), 권철(17대) 정도였다. 그는 지금 한창 주가가 높은 배우다. 부산연극협회 사무국장 4년, 감사 3년, 부지회장 6년. 그리고 2013년 부산연극협회장까지 짊어졌다.

‘방송활동을 하면서 회장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주위의 우려도 있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연기활동이 없을 때는 늘 부산에서 협회사업의 틀을 안정적으로 만드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2015년 2월 초순, 경기도 일원에서 새벽까지 KBS 수목 드라마 <왕의 얼굴>의 마지막 회를 촬영한 뒤, 경기 광명역에서 아침 KTX를 타고 부산연극협회 사무실에 서둘러 도착했다. 협회 일을 챙길 겸 이 인터뷰를 갖기 위해서.

Q. 협회장 취임 후 협회 내부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고 듣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소통을 이뤘으며, 그 결과 어떤 점이 좋아졌나?

“내 출마의 변이 ‘모두가 하나! 소통과 화합으로 신명나는 협회 만들기!’였다. 취임하자마자 끝장토론부터 시작해서 소극장 협의회를 구성하고, 40대 이하의 젊은 연극인과의 소통을 늘렸다. 젊은 연극인을 위한 지속사업을 강화할 생각에서다. 그 결과, ‘귀가 얇다’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선배-후배 연극인 사이의 소통의 물꼬를 트고 연극인끼리 서로의 연극을 관람하는 문화도 만들었다. 부산연극제도 보다 알차가고 있고....”

부산연극제, 연극판 넘어 ‘부산시민 축제’로

부산연극제, 부산연극 예술인의 창작의욕을 드높이고 부산연극 예술을 활성화할 경연축제다. 이 축제를 통해 부산연극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이고 국내 창작극의 저변도 넓혀가고 있다. 2015년이 33회째. 3월 27일부터 4월 12일까지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민회관과 여러 소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는 부산토박이 연극배우인 만큼 부산연극제에 대한 자부와 기대가 자뭇 크다. 부산연극협회장 임기 마지막해인 2015년 부산연극제를 ‘부산시민의 축제’로 만들려 노력했다. 사진은 고인범의 얼굴을 바탕에 넣은 2012년 연극제 포스터(사진: 차용범 제공).

Q. 2015년 부산연극제는 어떻게 준비했나?

“2015년 부산연극제, 무엇보다 ‘우리만의 놀이’가 아닌 ‘부산시민의 축제’일 수 있도록 준비했다. in-off-시민 연극제 3부문으로 나눠 진행했다. 연극제에 대한 관심을 전국으로, 시민일반으로 넓힌 거다. in 부문은 경연이다. 대상을 받으면 전국연극제 출전자격을 얻는 거다. off 부문은 협회 소속이 아닌 극단도 참가했다. 개인상으로 관객인기상, 단체상으로 한형석 연극상(상금 500만 원), 전성환 연극상(상금500만 원)을 시상했다. 공연홍보 역시 그저 포스터 붙이기 차원을 떠나 광복로, 광안리, 부산대 등지에서 관객층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Q. ‘연극은 배고픈 직업’이라고들 한다. 부산의 연극 여건, 좋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열악하다고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허-, 내가 참 싫어하는 질문을 하네? 우선, 연극은 결코 ‘배고픈 직업’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건 아니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을 하는 만족이 크다. 연극, 취미로 즐긴다면 도중에 바꿀 수도 있지만, 재미로 열을 쏟는 것이니 배 조금 고프면 어떤가. 그동안 라면을 먹으면서도 재미있게 살아왔고, 이제 재미 속에서 밥도 먹고 살 정도에 이르렀다. 연 365일을 연극 열정 속에서 산다. 그만하면 됐지 않나?”

부산연극, 소극장 키워 연기역량·관객 늘려가야

Q. 부산 연극, 기본적으로 어떤 부분부터 나아져야 하나?

“무엇보다, 소극장이 살아나야 한다. 소극장의 활성화가 절실하다. 나는 고교 3학년 학생에게 연극을 가르치며, 책보다 극단 현장을 권한다. 연극공부의 첫걸음은 무대에 서 보는 것, 다음에 가르침을 받고, 다음 책을 읽어야 한다. 소극장 협의회를 태동시키고 소극장을 늘려가는 것, 모두 이유는 하나다. 소극장이 늘어야 연기자가 늘어나고 연기가 늘고 관객이 늘고, 부산연극이 살아난다, 이건 나의 굳건한 믿음이다.”

그가 그토록 중시하는 부산의 소극장, 2010년 6개에서 2015년에 26개로 늘어났다. 최근 서울 소극장들이 부산으로 내려오며 토박이 소극장 증가세가 약간 정체상태다. 소극장이 적으면 우선 연기자 부족현상에 직면한다. 소극장 공연의 경우 보름에서 20일까지 계속 연기하니, 고되기 짝이 없어 피하고, 그러면 지역연극은 주저앉기 마련이다.

그는 알려진 대로 ‘경상도 사투리 전문배우’다. 그는 소극장 활동을 하느라 그 사투리를 고치지 못했다. 연극마다, 그 지역사투리의 친근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그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사투리의 힘만큼 관객은 즐거울 수밖에-. 그가 HDTV시대의 드라마에 쉬이 적응하는 것도 모두 소극장 연기의 힘이다. TV 화면에서 울고 웃고 땀 흘리는 그 섬세한 연기, 관객과 직접 만나온 그 소극장 연기의 힘이다.

Q. 열악한 환경에서도 부산 연극의 맥을 이어가는 연극인에게 한 마디 한다면 ?

"사실 예전 나의 꿈은 작은 소극장을 만들어 연극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녹록치 않더라. 그러나 나처럼 부산에 집을 두고도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 내가 그 본보기가 됐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재미있는 연극을 준비하면 그 사람은 꼭 성공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나 역시 연극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고 작은 역할에도 최선을 다했으며, 누구 못잖게 많이 뛰어 다녔다.“

Q. 부산연극을 어떻게 도울 생각인가?

“난, 부산 연극이 곧 부산의 문화였으면 좋겠다. 영화의 상업적 특성을 감안하면, 부산의 문화는 과연 뭘까? 동래야류? 수영야류? 지금, ‘사람과 기술, 문화로 융성하는 부산’이라지 않나. 누가 ‘부산의 문화가 뭐냐?’고 물을 때 ‘부산에는 연극문화가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그는 그런 순간을 맞기 위해 후배 연극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고, 연극연기에도 더 열정을 쏟을 생각이다. 부산연극의 전통과 정통을 지키는 가치 있는 일, 그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각오다.

대학입학 날 극단 가입... 42년 연극판 고수 중

그는 ‘연극인생 42년’을 말한다. 연극판에 뛰어든 것은 1979년이다. 연극과의 첫 인연도 ‘연극스럽다’. 부산의 한 전문대에 입학한 첫날 단원모집 포스터를 봤다. 극예술연구회 ‘나래성’의 창단단원을 모집하는 내용이었다. 포스터 아래쪽에 굵은 매직으로 쓴 단 한줄 ‘인생은 연극이다’는 말에 끌려 바로 입단했다. 연극에 빠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연극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하자 집에서는 ‘딴따라’라고 반대했다. 그래도 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연극에 투신했어도 공연을 할 순 없었다. 시국 때문이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고, 다음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서슬 퍼런 시절, 연극한다고 설쳤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연극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할 만큼 어려웠던 시절을 보내고 연극반 후배의 제안으로 다시 연습장을 찾았고 그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배가 소극장을 만들어 줄테니 운영해보라고 했다. 그래 처용극장(지금의 엑터스 소극장) 극장장을 맡아 운영했고. 그렇게 시작한 극장장일이 그 뒤 눌원소극장 극장장으로 월급생활을 하며 연극생활을 5년의 세월을 이어올 수 있었지.”

그는 배고픈 지방 연극무대를 악착같이 지켜냈다. 돈이 되지 않아도 나태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 혼신을 다하는 성실함이 몸에 뱄다. 농익고 곰삭은 탄탄한 연기력도 갖췄다. 세상이 눈여겨 본 그 ‘힘’의 바탕이다.

Q. 1981년 첫 작품 <444> 이후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출연한 연극만 86편, 그 열정은 어디서 오는가?

“나의 일생을 일관한 바탕은 ‘연극에의 재미’다. 난, 재미가 있어서 연극을 계속했다. 난, 길거리나 술판 싸움을 해도 연극인과는 절대 싸우지 않았다. 연극은 돈이 되든 안되든, 버리고 싶다고 버릴 수도 없는, ‘사는 재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난, ‘연극에의 재미’ 바탕 매순간 혼신 노력 다했다”

Q. 제대로 된 연기공부는 늦게 시작했다. 그동안 무대에서 쌓아온 경력을 두고 학문적으로 다시 배울 생각을 한 이유는?

“제대로 된 연극 공부를 해보겠다고 연극 공부를 시작한 건 43세였다. 동서대 연극영화과 3학년에 편입해 22, 23세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부산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다.” 사실 그는 전문대 연극반 시절 죽도록 연습을 하고도 공연 한 편 못해 봤다. 그 아쉬움은 졸업 뒤에도 컸고. 일과 연습을 병행하며, 후배들과 저녁마다 어울렸다. 이것저것 험한 일을 마다 않고 연극에 매달렸다.

대학 편입 때, 이미 부산의 중견배우였던 그, 이제 막 연극수업을 하는 다른 학생들에겐 ‘하늘같은 선배’였다. 누구도 쉽게 그에게 함께 공연하자고 할 수 없었다. 2005년 동서대 3학년 웍샵공연 때 한 후배가 찾아와 자신의 작품(<비언소>, 원제: <변소>)에 출연을 청했다. ‘자그마한 역할’이라고 해서 보니, 공연 마지막 부분에 딱 대사 두 줄 정도 맡는 역이었다. 그래도 그는 일주일에 세 번은 연습에 꼭 참석했다. 그런 열정을 바탕으로, 그는 탄탄한 연기력 없이는 소화할 수 없는 연기생활 15년 되던 해 1인극 모노드라마를 공연했다. 부산연극제에서 우수연기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작은 역할’ 최선 다한 결과 KBS 드라마 픽업

그는 연기에 관한 한, 단 한 순간도 허투루 하지 않는 열정을 체화하고 있다. 그는 오늘 연극연기자를 넘어 드라마∙영화를 종횡하는 만능 연기자다. 그 연극연기를 초월한 드라마 연기 역시 그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열정의 결실이다. 그는 2008년 KBS 드라마 <황금사과>를 통해 안방극장에 데뷔했다. 연극무대와는 또 다른 세계, 그는 어떻게 진입할 수 있었나?

그는 연극 일생을 오직 ‘연극에의 재미’로 일관한 연극스타다. 후배학생의 연극에서 ‘자그마한 역할’에도 단 한 순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KBS는 그의 연기정신을 높이 평가, 수목 드라마에 스타우트했다. 사진은 드라마 <황금사과>(2005)에서 신형사 역으로 출연한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그 동서대 웍샵공연에서 ‘자그마한 역할’을 연기한 지 3년 뒤의 일이다.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고인범인가? 나는 KBS 작가 김운경이다. 함 만나자’, 난 드라마에는 문외한이었다.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며칠 뒤 김 작가와 KBS PD 몇 분이 ‘아역배우 오디션을 보러 왔다’며 부산을 찾았다. 그리곤, KBS에서 출연을 알려주는 전화를 받았다.”

탤런트로 데뷔한다는 것, 참 꿈같은 일이다. 그는 그렇게 드라마 영역으로 진입했다. 동서대 학생공연에서 ‘자그마한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를, 김운경 작가가 눈여겨 봐 둔 결과였다. <황금사과>에서의 배역도 좋았다. ‘한국판 햄릿’ 비슷한 구도에, 그는 과거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신 형사’역할을 맡았다.

인터넷 전성시대, 비중 있고 연기 좋은 ‘신 형사’에게 인터넷 댓글들이 이어졌다. '신 형사 파이팅!“, 그는 드라마 인생에 그런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는 즐겁게 회상한다, ”그 뒤의 역할은 거의 악역이었기 때문“이라고.

중국인 맡아 중국어 배우기 강행군... 화교 팬까지

그의 ‘최선의 연기를 위한 최고의 열정’은 그 해(2008년)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에서도 환하게 빛난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명나라 환관이자 사신 ‘황엄’으로 출연했다. 그의 대사는 99%가 중국말. 배역이 정해지고 2개월 넘게 중국어 배우기 강행군이 이어졌다. ‘대왕세종’의 공동연출을 맡은 김원석 PD의 중국어 가르치기는 혹독했다.

KBS 드라마 <대왕 세종>(2008)은 고인범의 ‘최고의 연기를 위한 최고의 열정’을 새삼 과시한 작품이다. 그는 중국인 황엄 역을 맡아 중국어 공부에 몰입, 화교 팬 클럽이 생길 만큼 열연했다. 사진은 중국어 대사 99%의 황엄 연기 장면(사진: 차용범 제공).

“김 PD가 맨 첫날 중국어의 기본인 ‘사성’(4가지 억양)이 뭔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아는 대로만 대답하겠다고 했죠. 만리장성, 자금성…, 아무리 생각해도 2개밖에 모르겠다고 했더니, 김 감독이 뭔가 진행하려고 했던 것을 포기한듯. 진짜 4성이 뭔지 모르느냐고 답답해 하더라구요.”

그게 시작이었다. 방송국 쪽방에 틀어박혀 중국어 대사를 익히기 시작했다. 김 PD와 함께 점심, 저녁을 도시락으로 때우고, 어떤 때는 아침에 시작한 중국어 공부가 자정 무렵까지 17시간 동안 이어지고. 악착같기는 그 역시 김 PD 못잖았다. 부산 본가를 오갈 때는 어김없이 대사를 녹음한 CD를 들었다. 잠잘 때도 손에 대본을 들고 머리맡에 CD를 켰다.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신경성 위염에 걸렸다. 체중은 7㎏이나 빠졌다.

Q. 그 중국사람 ‘황엄’ 연기, 그래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던데?

“혹독한 연습으로 두 달여를 보낸 뒤 첫 촬영에 들어갔다. 20여 차례가 넘는 NG 끝에 간신히 한 장면을 마쳤다. 얼굴을 마주친 김 PD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 또 깨지는구나!’ 걱정한 순간 칭찬이 이어졌다. 힘과 자신감을 충전, <대왕세종>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나를 중국사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나에겐 서울 화교출신들이 만든 독특한 팬들이 있다. 사극을 하면서 워낙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하자 화교 선배인 줄 알고 만들었다더라.”

<대왕세종>은 그에게 참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화교 팬이 생길 정도였으니 연기자로서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었겠나.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또 누군가는 알아준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긴 것이다. 그가 명나라 사신 ‘황엄’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내자, 영화와 드라마의 러브콜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인 역할이 많았지만, 자상하고, 인자하고, 때론 강단 있는 카리스마 연기제의도 곧잘 들어왔다.

한때 그는 ‘월화엔 권상우 아빠, 수목엔 김범 아빠’로 불렸다. SBS 월화드라마 <야왕>,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동시 출연할 때다. 두 드라마 시청률이 상승하고, 그의 연기가 빛을 내자, 시청자들은 두 드라마 제목을 섞어 ‘그 겨울, 야왕이 분다’고 화제로 삼기도 했다. “단역조차도 최선을 다했기에 주변에서 잘 봐준 것 같다. 역할이 작다고 대충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거다.” 그의 되새김이다.

그가 짧은 기간 출연한 드라마는 40편. 그 중 13편에서는 5회 안에 죽는 연기였다. 사극에선 100% 다 죽었다. 칼에 찔러, 돌에 맞아, 데모 진압 몽둥이에 맞아, 참 많이도 죽었다. 그래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괜찮은 연기자’란 평판을 쌓아왔다.

<응답하라, 1997>에선 15부에 딱 한 번 나온다. A4 5장 정도의 대본을 연극하듯 싹 외었다. 촬영장에서 ‘대본을 다 외었다’고 얘기했더니 주변에서 다 놀라더라. 카메라 3대로 동시 촬영이 시작되고 마지막 부분 흐르는 눈물로 마친 연기에 모든 스텝의 기립박수가 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열연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는 ‘야왕’의 차심봉 역을 얻어냈다.

드라마 인기 딛고 영화까지 영역 한껏 확장

그는 TV 드라마에서의 폭발적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로까지 연기자의 영역을 한껏 넓혀간다. 2003년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를 시작으로, <우리 형>, <밀양>, <쌍화점>, <주유소 습격사건 2>, <투혼>,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슈퍼맨 강보상>, <쓰리 썸머 나잇> 등에서 걸쭉하고 깔끔한 연기를 선보였다.

Q. 연극무대에서는 중견배우인 늦은 나이에, 드라마에 이어 영화에도 14편 출연했다. 쉽지 않은 연기인생이다.

“대본이 나오고,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 촬영장과 집 이외에는 잘 가지 않는다. 누구를 잘 만나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고, 술 한 잔 하다보면 과할 수 있지 않나. 대본을 못 외워 더듬거리거나, 본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연기에 어떤 팬이 공감을 해주겠나?” 그는 새삼 확인한다, ‘예사로 흘러가듯 대충해서 되는 역할은 하나도 없다“고.

Q. 유독 사투리 연기를 많이 했고, 사랑을 받았다. 부산사투리 때문인가?

"나는 경상도 사투리밖에 할 줄 모른다. 2011년 초 TV조선의 18부작 드라마 <한반도>에 단역 합참의장 역할로 출연했다. 그때 부산사투리 억양으로 '공격합시다' 하고 짧게 대사를 끊어치는 장면이 있었다. 그 힘으로 MBC 주말드라마 <'메이퀸>에서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강대평 회장 역할을 맡았지.

연출가나 다른 지역 연기자들이 부산말 특유의 짧음, 함축, 정감 같은 것을 좋아한다. 아주 복잡한 상황도 '니 와 이라노' 한마디면 정리해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다면서 내가 부산말 한마디 하면 다 따라 한다." 그는 <해운대 연인들>과 <메이 퀸> 등 드라마 20여 편에 출연해 부산사투리 연기로 입지를 다졌다. "현장에서 겪어보면 부산사투리가 특유의 정감을 발휘하면서 그 자리가 넓어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Q. 연극무대 연기력을 바탕으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고인범에게, 연기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공기와 같다.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 보일 듯 안보일 듯 하면서 항상 같이 해야 하는, 곧 나의 존재의미 그 자체다.”

영화 <국제시장> 가족... “난, 부산 매력 너무 좋다”

그는 ‘부산 출신’이라고 쓴다. 실제 태어난 곳은 경남 진해다. 초등 6학년 때 부산으로 옮겨왔다. 그의 집안내력은 영화 <국제시장>, 바로 그 피난민 가족이다. 1∙4 후퇴 때, 그의 아버지가 조부∙숙부와 함께 흥남철수작전의 그 철수선을 타고 거제도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진해에서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해군 문관생활을 거쳐 H해운 선원로 취업 그 뒤 외국상선으로 옮기면서 부산에 정착했다. 그 때부터 줄 곳 부산시민으로 살았다. 그의 사투리에 강한 경상도 억양과 약간의 이북 사투리 느낌이 배어 있는 것은 그런 내력 때문이다.

Q. 서울 부산을 오가며 스케줄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부산에 사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처음 배우며 탤런트 생활을 시작했을 땐 돈이 없어 서울에 거처를 찾지 못했다. 지금은 바다와 산이 있는, 내 자란 곳 부산 외에는 그냥 싫다. 부산의 바다는 파도가 치든, 안개가 끼든, 조용하든, 매일 새로운 것을 보여 줘서 좋다. 나는 부산에서 황령산 기슭 전포동에서 살았고 금련산 자락의 광안리, 남천동을 옮겨가며 살았다. 가만히 있으면서 우리를 품어주는, 그러면서 부산사람은 어디서나 갈 수 있는 산, 그 부산의 산도 너무 좋다. 문화, 음식, 친구, 환경, 도로..., 그 부산의 매력들이 너무 좋다.”

Q. 부산, 참 많이 변했을 터, 옛 부산과 지금의 부산, 어떻게 달라졌나?

“부산, 이제 현대도시로 우뚝 성장했지. 그 좁고 어지럽던 산복도로도 나름 가다듬어가며 어엿한 생활공간으로 자리잡고 있고. 연극쟁이로서 한 가지 덧붙이면, 그 많던 육교가 싹 없어졌다. 한창 육교가 많을 땐 연극 플래카드를 붙이느라 자리 쟁탈전을 벌이곤 했다. 이제 부산진시장 앞, 벡스코 뒤편 등 몇 군데 빼곤 육교가 사라졌다. 그 역시 도시의 주인이 ‘차’에서 ‘사람’으로 바뀐 변화겠다.”

부산사람 특질? 변하지 않는 거친 성격...

Q. 부산의 강점, 부산사람의 특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한 마디로, 변하지 않는 거친 성격 아닐까? 요즘 식당에 가면 모르는 분도 나를 툭 치며 묻는다, ‘여기 어찌 왔소?’ 난, 바로 대답한다, “밥 묵으로요!‘ 부산은 사람 만나기도 참 좋은 도시다.”

Q. ‘부산판 연극대작’의 가능성은 어떤가?

"솔직하게 얘기하자. 지금은 부산에서 대작을 제작할 자금을 펀딩하기가 쉽지 않다. 연기자 수를 늘리고 연기수준을 높여가며 역량을 축적하는 단계를 차근차근 거쳐야만 한다. 그 전에, 다시 부산의 도시비전 ‘사람과 기술, 문화로 융성하는 부산’을 생각한다. 부산에 문화가 있어야 하는 건 누구나 원하는 사실이다. 나는 한 장르의 축제에 거액을 쏟는 방식보다, 언제나 공연을 보여 줄 수 있는 연극환경 만들기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부산연극이 부산의 문화였으면 참 좋겠다.“

Q. 연극무대와 드라마∙영화 현장을 종횡무진 하려면 체력이 필수 일 것 같다. 평소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난 원래 튼튼한 체질이다. 우리 집안은 두루 기골이 장대했다. 내가 사극에서 자주 장군 배역을 맡아온 것을 보라. 그러나 작업환경이 주는 악영향을 어쩔수 없더라. KTX 개통 전엔 고속버스를 5시간여씩 타고 서울엘 갔다. 세월이 쌓이니 허리가 안좋아지더라. 매월 주사를 맞고 그랬다. 그럴 땐 허리 운동만 집중적으로 한다. 난 부족하다 싶을 땐 무섭게 집중하는 성격이다. 2014년 5월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을 끝내고 아내와 여행을 좀 다녀온 뒤 11월 <왕의 얼굴>을 시작할 때 몸이 좀 무겁더라. 식이요법으로 체중을 조절, 9Kg을 줄였다. 별다른 건강관리는 아직 필요 없다.”

Q. 부산광역시 미디어센터에서 운영하는 부산시 SNS '톡톡부산 1일 자키‘ 이벤트에 ’트윗 자키’로도 활약했다. 그런, ‘돈 안되고 번거롭기만 한’ 봉사활동, 평소 즐기는 편인가?

"난, 평생 보증 한 번 안서 봤다. 워낙 가진 게 없기 때문이다. 워낙 ‘없이’ 살아와서인지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무조건 달려간다. 딸아이가 중학교 입학할 때의 일이다. 학교에 별 도와 줄 거리가 없었다. 담임선생님께 그랬다, ‘저 연극 하는데 혹 도와 드릴 일이라도?’ 선생님이 그러더라, ‘연극반을 운영해 달라’고. 그 연극반, 딸아이 졸업 뒤에도 5년여 더 운영했다. ‘돈’으로 갚기는 어려워도 ‘몸’으로 때우기는 잘 한다. 누구든 부르면 난 달려간다. 특히, 약자를 위한 일에는“

부산 연극쟁이 모여 ‘함께 놀기’ 꿈꾼다

Q. 언제까지 현역으로 활동할 생각인가?

"드라마 촬영, 딱 65세까지만! 매니저와 약속했다. 그 때까지 튼튼하게 살며 연기를 계속한 뒤, 나머지는 부산에서 연기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부산연극제는 빠지고 싶지않다.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하고 싶고, 연극제 심사를 한다든지, 소통자리를 마련한다든지, 뭐든 후배들이 맡기는 쉬운 일을 할 작정이다.“

고인범은 부산사람의 특질을 ‘변하지 않는 거친 성격’으로 표현했지만, 당연히 그에게도 그런 특질은 진하다. 현역으로 활동할 기간을 ‘드라마 65세’로 딱 잘라 말하는 부분도 ‘할 말을 못 참는’, 그런 성격이 제대로 드러난다. 우리 드라마 현장에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노년의 열정을 불태우는 원로들이 있긴 하지만, 그거, 여러모로 그리 오래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산판 연극대작의 가능성을 물을 때도 그는 나름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한 장르의 축제에 거액을 쏟는 방식’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는 이런 얘기들을 하며 구체적 사례를 ‘고유명사’를 들어가며 꼬집어내듯 지적한다. 다만 인터뷰어는 그의 ‘경상도적 기질’에 공감할 뿐 그 ‘고유명사’들을 굳이 열거하지는 않기로 했다.

Q. 앞으로, 개인적 포부가 있다면?

“연극, 드라마, 영화, 모든 일을 열심히 할 생각이다. 부산말의 묘미를 안방극장을 통해 전국에 전하며, 그 성과를 바탕으로 부산연극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최악의 결과란 없는 법이겠지. 열심히 하겠다!”

그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신구 세대의 조화에도 계속 앞장 설 생각이다. 중앙무대에 진출해 성공한 부산 출신 선배들이 후배들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갈 작정. 선배는 후배의 참신함을, 후배는 선배의 연륜을 익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매달 회원들과 함께 연극 한 편을 볼 생각이다. 공연팀도 격려해 가며....

고인범은 중앙무대에 진출해 성공한 부산 출신 선배들이 후배들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갈 작정이다. 선배는 후배의 참신함을, 후배는 선배의 연륜을 익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사진: 차용범 제공).

“난, 일생, 재미있게 연극판 누빈 부산 연극배우”

연극∙드라마∙영화를 예사로이 넘나든 만능연기자’ 고인범, 그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랄까. 영화배우? 탤런트? 그는 연극배우로 불리기를 바란다. 연극연기로 잔뼈가 굵었고, 연기의 바탕이 연극이기 때문에, 연극을 빼고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극쟁이들이 함께 모여 ‘나눠갖기’ 보다 ‘함께 놀기’를 늘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타고난 연극쟁이가 얘기한 연기의 길은? ‘대충대충 비슬비슬하게 하기’를 미워하며 ‘늘 등뼈를 곧추세워 최선을 다하기’를 체화하는 것이다. 그것도 먹고살기에 눌리기보다 재미를 느껴가며-. 그는 결국 ‘일생동안, 재미있게 연극판을 누빈 부산 연극배우’를 꿈꾸고 있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연극판의 재미, 그 진화는 어디까지이며 그 끝은 과연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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