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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한국영화자료원구원 홍영철 원장 편] 영화도시 부산에 영화박물관을!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편집국장 파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4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洪永喆, 63, 2019년 기준) 원장. ‘영화도시 부산’ 이전 시절부터, 부산 영화, 나아가 한국 영화의 역사를 연구해 온 실증론적 영화사가(映畵史家)다. 청년기 생활현장에서 영화보기를 즐기다, 영화자료 수집에서 출발하여 사료학(史料學)과 사료비판을 넘나드는 연구에까지 열정을 쏟아온 지 45년. <한국영화도서자료 편람>(1991)부터 <부산영화 100년>(2001), <부산근대영화사>(2009)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사를 정리한 연구서 여러 권을 출간했다. 2015년에는 부산영화의 뿌리를 살펴 그 정체성을 다진 <부산 극장사>를 발간했다.

홍영철 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 ‘한국 영화산업의 태동지’ 부산에서 태어나, '영화도시 부산’ 이전 시절부터, 한국영화의 역사를 연구해 온 실증론적 영화사가(映畵史家)다(사진: 차용범 제공).

부산은 과거 조선 최초의 극장이 들어섰던 한국 영화산업의 태동지다. 부산은 오늘 ‘아시아 영화∙영상산업 중심도시’를 자임한다. 그 부산, 영화사 연구의 깊이∙너비는 극히 천박(淺薄)하다. 비(非)전문적 생활인이 영화 포스터, 입장권, 우표를 넘어, 시나리오, 사진, 필름까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석∙정리한 열의와 저력은 어디에서 출발했나? 영화사료 탐사-수집-발간, 그 ‘돈도 안되는 일’에 평생을 쏟아온 집념∙역량의 뿌리는 무엇인가? 영화사 연구가가 보는 ‘영화도시 부산’의 현실과 과제는 어떠하며, 그의 숨은 보람과 남은 숙원은 또 무엇인가?

[약력]

1946년 함남 원산 출생. 1954년 6·25전쟁 피란 때 부산 정착. 1971년 한국영화자료연구원 출범. 1977년 아카데미영화상 자료전 및 영화상영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사 전시회, 부산영화 100년전, 우리 영화 흥행을 이끌어온 대표작 60년전 등 자료전 30여 회 개최. 2013년 부산시 문화상(대중예술 부문) 수상. 저서: <팬시네마>(1982), <한국영화도서자료 편람>(1991), <부산영화 100년>(2001), <부산영화 21 제1-4호>(2001-2004), <부산근대영화사>(2009) 등, 논문: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의 역사성 검증 보고'(2008) 등.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이 '부산 극장사'를 발간했다. 작게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부산에서 영화를 상영했던 공간을 살려내는 작업이다. 크게는 서울 중심 영화사 연구에서 변방 취급을 받고 있는 부산의 주인공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역사(役事)다. 역사연구는 무릇 사료(史料)에 따라 사실을 인식·판단하는 과정 아닌가. ‘부산 극장사’ 발간이 갖는 의미는 그래서 크다. 홍 원장은 한국영화 사료 수집∙연구에 관한 한 단연 독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Q. <부산 극장사> 발간이 왜 중요한가?

"국내에서 극장사를 발간한 사례가 거의 없다. 부산 역시 ‘영화도시’로 명성이 높지만 정작 영화사 정리작업은 부진하다. 이 책을 통해, 서울 위주 극장사에서 벗어나, 부산의 극장사를 제대로 다뤄 보고 싶었다. 부산은 그동안 자료를 잃고 전문적 고찰도 못해 한국 영화사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이제 탄탄한 자료를 바탕으로, 부산이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영화도시‘의 저력도 여기서 나온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한국 영화사 역시 원천사료의 바탕 없이 써온 만큼, 극장문화가 가장 먼저 태동한 부산을 시발점으로 다시 써 나가야 하지 않겠나."

홍 원장은 이 책에서 1881년 일본인 거류지 안에 들어섰던 최초의 가설극장부터 일제 강점기 부산에 있었던 23개 극장의 위치와 규모, 상영 영화 등을 살펴 봤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부산에서 명멸했던 극장들의 얘기도 연구 대상이다. 

40여 년 탐사∙수집 자료, 한국영화의 역사자산

Q. 이 중요한 작업, 언제부터 준비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왔나?

“1978년 극장의 간판미술 촬영작업을 다니면서부터 극장사 발간을 염두에 뒀다. 다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제작경비 문제 때문이다. 다행히 2014년 부산시∙부산영상위원회의 지원을 얻어 7월부터 제작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극장사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 분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부산 극장사 발간의 중요성에 공감해 준 여러 관계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Q.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그 부산의 극장사를 쓴다, 연구의 깊이에 앞서 사료의 양부터 엄청날 것 같다. 40년여 모은 자료, 어느 정도인가?

“40년간 모은 자료는 실로 엄청나다. 1971년부터 영화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33㎡ 남짓한 사무실 두 개를 가득 메울 정도다. 영화 필름과 포스터, 시나리오 뿐 아니라, 입장권, 전화카드, 우표, 광고 같은 사소한 것까지 보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소중한 자료이자 한국영화의 자산이다. 지금은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탐내는 자료도 많다.”

홍 원장의 한국영화자료연구원은 사설이다. 연구원은 부산 동구 초량1동 한 빌딩의 허름한 사무실을 쓴다. 사비로 운영한다. 사무실 바닥에서 천정까지 빼곡이 채운 영화자료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 그는 2007년 영화자료 보유현황을 조사, 정리한 적이 있다. 1차 자료로, 필름 345편, 시나리오 2090편, 영화 포스터 1만 6674장, 영화 스틸 사진 4만 5375점 등, 2차 자료는 영화관련 도서∙잡지∙논문 8792권과 영화관계법령집, 영화상영등급분류결정서, 각종 영화행사 자료 등. 특별자료로 기록사진 자료 9900여 매, 연도별 영화광고 자료에, 병풍 자료까지.

홍 원장이 지난 40여 년 탐사, 수집한 영화 자료는 실로 엄청나며, 모두 한국영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사진은 분류 자료들을 설명하며 혹 소중한 영화역사 자료가 빛도 못 본 채 계속 버려질까를 걱정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희귀한 자료도 수없이 많다. 국내 한 장뿐인 뤼미에르 감독의 <시네마 포토그라프> 영화 포스터, 박종원 감독이 <구로 아리랑>을 찍을 때 쓴 스크랩 메모, 국내 영화 초창기에 나온 평론집도 있다. 가히 ‘영화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홍 원장은 덧붙인다, “실제 자료의 량은 현황조사 때의 2배 정도 될 것”이라고. 당시 자료를 조사, 분류, 확인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리더란다. 그 뒤로 현황조사를 하지 않았으니 지금 자료량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울 뿐. 그는 소중한 영화역사 자료가 빛도 못 본 채 계속 버려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부산, 한국 처음 극장문화 꽃핀 곳... 한국 영화사 재조명 절실

Q. 부산은 과거 오래동안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감수하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영화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도시를 넘어, 영화∙영상산업의 메카로 도약하고 있다. 부산의 극장, 우리나라 영화역사에서 어떤 의미인가?

"부산, 한국에서 가장 먼저 극장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다. <부산 극장사>는 일제강점기 부산에 23개 극장이 있었고, 광복을 맞기까지 부산의 극장문화가 대중문화를 이끌었음을 증명한다. 우리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고 1924년 7월 출범한 조선키네마㈜도 부산을 근거로 생겨났다.

당연히, 한국(조선) 최초의 극장이 들어선 곳도 부산이다.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와 '송정좌'는 '부산항 시가 및 부근 지도'(1903년 12월)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895년 7월 24일 부산이사청이 제정·공포한 '극장취체규칙'(극장업과 흥행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제도화한 규정)을 발굴한 결과, 행좌나 송정좌가 1895년 이미 존재했음을 알아냈다. 영화사에서 '주변부' 취급을 받아온 부산이 사실은 한국 영화산업의 태동지였다는 이야기다. 부산 극장의 역사 역시 재조명해야 마땅하다.“

홍영철 원장은 영화사료 연구를 통해 부산이 한국 영화산업의 태동지임을 밝혀냈다. 사진은 연구원 벽에 붙여둔 ‘부산항 시가 및 부근 지도’(1908)에서 한국 최초의 극장 ‘행좌’ 표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극장 ‘행좌’는 1985년 이미 존재했던 한국 최초의 극장이다. 사진은 ‘행좌’ 원경(사진: 차용범 제공).

홍 원장의 주장은 명쾌하다. 부산은 일찍부터 영화문화에 대한 자생적 움직임이 활발했다, 부산의 영화문화는 감상문화부터 꽃을 피운 뒤 기업형태의 영화제작사 탄생, 영화동호인 모임의 활성화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부산영화의 뿌리를 잘 증언한다, 이런 얘기다. 한국 영화사 안에서 부산영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 어려울수록 더 공들여 풀어나가야 하리라는 것이다.

“미디어 빅뱅시대에도 영화는 오직 극장에서 봐야”

홍 원장이 부산의 극장사를 더듬으며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을 강조하는 내심을 짐작한다. 극장은 곧 '영화로써 돈을 버는' 영화산업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얘기하지만, 그 근거는 '2억 관객' 시대. 곧 대중의 관심∙사랑에 바탕한 양적 성장이다. 2013년 개봉한 한국영화 180편을 보라, 1000만 관객을 넘은 <7번방의 선물>(1280만)을 시작으로, <설국열차>(934만), <관상>(913만), <베를린>(715만), <은밀하게 위대하게>(695만)..., 이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결실이다.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 미국도 마찬가지. 한국영화 <설국열차>(감독 봉준호), 북미지역 8개관에서 개봉, 연일 호평 속에 11일만에 356개관으로 확대했다. 미국 포털사이트 야후가 2014년 상반기 개봉한 영화 중 '톱(Top) 10'을 선정, 발표한 결과, ‘설국열차’는 세계적 흥행에 성공한 쟁쟁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엣지 오브 투모로우> 등과 나란히 ‘톱 10’ 안에 들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이건 미디어 빅뱅시대를 넘는 명확한 진리다. '영화는 집에서 편안히 즐기세요'-VOD의 장점을 한껏 강조한 카피지만, 역시 영화는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가로 세로 비율 2.35: 1의 와이드 스크린을 활용한 대형 영화상영 방식)로 봐야 한다. 청각적 효과 역시, 극장에서 듣는 생생한 원음과 VOD를 비교할 수 있으랴. 매스컴 이론 중 '미디어 변형(mediamorphosis)론’은 “일단 태어난 미디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영화 역시 오직 극장에서 봐야 하는 그 특장은 시대적으로 영원할 터.

Q. 한국의 극장산업, 현 주소는 어떠한가?

"영화계가 ‘필름시대’에 이어 ‘극장시대’로 전환하는 시기다. 부산의 극장 수 역시 50-60년대 50개를 고비로 급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23개 중 생존한 것은 ‘부산극장’ 단 하나다. 단관시대가 저물며 멀티플렉스(복합영화관) 시대를 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그저 흥행 위주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앞으로 극장 수가 늘거나 멀티플렉스의 상업적 행태가 바뀌지 않는 한 영화의 다양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다간, ‘극장시대’가 쇠퇴하고 ‘안방극장 시대’로 넘어가지나 않을까 두렵다.“

홍 원장은 걱정한다, 극장산업이 발달해야 영화산업도 발전할 터, 그러나 대기업 계열사들의 스크린 독과점이 영화의 다양성을 저해하며 아예 극장산업의 기반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 국내 극장 320개 수준, 이 중 2013년 관객동원 흥행극장 순위 Top 10은 온통 멀티플렉스 계열이다.

한국영화 세계 속 저력? ‘한국적’ 바탕 흐름 지키기

Q. 부산은 최근 단연 '영화 촬영하기 좋은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부산을 배경으로 제작했던 <해운대>에서 <도둑들>, <변호인>까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부산에서 촬영하면 흥행한다’는 공식까지 생겨날 정도다. 부산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부산촬영 영화들이 이처럼 성공한다고 생각하나?

"부산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공간적으로 산과 바다를 가진, 영화 촬영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도시다. 유현목의 <아낌없이 주련다>, 김수용의 <갯마을>,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부터 최근 영화까지, 그런 장점을 잘 활용한 것 아니겠나? 임권택 감독도 부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감독이다. 이제 부산은 투자를 활성화할 여건을 적극 갖춰가야 한다. 부산의 영화산업, 그래야 발전한다.“

Q. 과거, 우리나라는 국내 제작 영화보다 헐리우드 영화 같은 외화를 많이 상영했다. 지금, 우리나라 영화들은 해외에서 선전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처럼. 우리나라 영화의 저력, 어디 있다고 보나?

"우리만의 독창성이 중요하다. 임권택 감독의 '우리 것이 최고야' 같은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가 외국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필시 실패한다. <명량>, <해무>, <군도> 같은 영화를 보라. 조선시대 사회상을 배경으로 우리 스토리를 다뤘다. ‘한국적’이 한국영화의 대안이다. 영화계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설국영화> 역시 주제는 ‘한국’을 벗어났어도 ‘한국배우’가 활약함으로써 ‘한국영화’의 몫을 다한 것이다.“

20대 초반 영화보기 즐기다 사명감 갖고 사료수집 시작

홍 원장, 그는 부산 영화를 연구한 지 45년이 넘었다. 그렇다고 영화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어떤 인연으로, 영화 연구를 시작했나?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홍 원장의 영화연구에 영향을 미친 계기들이 있다. 고교 시절 국어선생님의 ‘一’(한 일)자 강의다. 현대사회의 고독 속에서도 꾸준히 한 길을 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는 군 제대 말년에 한 주간지의 연중 시리즈를 읽었다. 소설가 조풍연 선생의 ‘파노라마 영화 100년’(1971.9-1972.9)이다. 세계 영화사 공부를 독학으로 훑은 것이다. 이 사전학습을 바탕으로 영화자료 수집에 혼신을 쏟으면서 '영화사 박사' 반열에 올랐다고나 할까.

Q. 1991년 <한국영화도서자료 편람>부터, 2001년 <부산영화 100년>, 2009년 <부산근대영화사>에 이르기까지, 부산영화의 역사를 정리하는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그 책들이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말해 달라.

"<한국영화도서자료 편람>, 한국영상자료원 지원으로 펴낸 국내 최초의 영화 관련 도서자료 목록이다. 1925~1990년 국내의 영화 관련 서적, 기사 등을 집대성했다. 발간 20년이 지난 지금도 석∙박사 과정 연구자들이 필수목록으로 삼는 학문연구의 기초자료다. 보수동 헌책방에 복사본이 나돌아 다닐 정도다.

<부산영화 100년>, 부산 영화의 각종 기록과 사진자료를 연대별로 정리했다. 관련 기관에서도 감히 손대지 못한 일을 오로지 개인적 집념과 열정만으로 해냈다. <부산근대영화사>, 말 그대로 부산 근대 영화사를 면밀히 분석하고 조명한 역작이다.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발행된 전국판 일본어 일간신문 ‘부산일보’와 ‘조선시보’를 토대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부산 근대영화의 모든 것을 담았다.“

<부산근대영화사>는 특히 1915~1944년 보래관, 욱관, 부산좌, 행관, 중앙극장, 부산극장 등 13개 극장에서 상영한 1만 4697편의 영화를 상영일자, 상영극장, 작품명, 번역 장르, 감독, 배우 등의 정보와 함께, 72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목록으로 정리했다. 그동안 한국 영화사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던 자료 발굴을 통해 부산 영화사의 가치를 찾아낸 역사적 성과물이다.

부산 영화와 관련해 기존 영화사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과 오류, 불명확한 것들을 두루 확인, 사료비판 작업을 통해 수정한 값진 책이다. 지역성을 뛰어넘어 역사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국 영화사 연구자들이 간과했거나 놓친 부분을 실증적으로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영화사학자 겸 영화평론가 김종원 씨는 "이 책은 열악한 한국 영화사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소중한 업적"이라며 "부산국제영화제를 열고 있는 부산의 영화사적 의미와 배경도 자연스럽게 부각된다"고 평가했다.

사료비판 역저 저술... 한국 영화사 오류 수정∙공백 메워

Q. 그 동안 소장한 자료로 진행한 자료전과 전시회도 상당하다. 어느 정도 진행한 건가?

“자료를 수집하는데 그치면 수집가에 불과하다. 공익적 목적을 위해 행사를 기획, 영화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동안 1977년 미 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에서 개최한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작품 전시회'를 시작으로, ‘한국영화 60년 사진전’(1980), ‘오드리 헵번 출연작품전’(198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특별전(1989년), ‘영화탄생 100년 특별전’(1995), ‘부산영화 100년전’(2000)..., 한 30여 회 기획전시회를 가졌다.”

Q. 지금까지 부산 영화를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부산시 문화상’(대중예술 부문)을 수상했다. 소감이 어땠나?

“참 가슴 벅찼다. 부산영화의 뿌리를 보급하여 영화도시 부산의 역사성을 확고히 정립한 공로, 부산에서 그 역할을 인정해 준 것 아닌가. 한국 영화사 속에서 부산영화가 지닌 역사적 인식을 넓히기 시작, 김종원, 김수남 같은 영화역사학자들의 책에도 여러 근거를 제공했다. 여러 석∙박사 논문에도 부산영화의 역사와 존재사실을 등재하기 시작했다. 그게 부산영화의 뿌리를 확인해온 과정 아니겠나. 지난 40여 년의 헌신을 위로받은 것 같아 정말 기분 좋았다.”

부산 지역사회는 부산영화의 뿌리를 살펴 영화도시 부산의 정체성을 확립한 공로로, 홍 원장에게 부산시 문화상을 수여했다. 사진은 2013년 시상식 후 기념촬영(사진: 차용범 제공).

Q. 지금까지 출간한 책과 언론보도를 보면, 일제 강점기 부산의 영화사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연구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 부산 영화사가 곧 한국 영화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1876년 개항과 더불어 부산은 일본 침략의 전진기지로 전락했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문물이 빨리 들어왔고 거기에 극장도 들어 있었던 거다. 일본인 상가 중심지역이었던 부평정(현 부평동)에 극장들이 자리잡은 것이다. 이후 해방기를 거쳐 많은 극장이 생겼다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 극장'의 역사는 높이 살 필요가 있다. 서울 단성사보다 오래된 극장이라 할 수 있으니. 실상 나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영화를 다룬 많은 서적들은 곳곳에서 ‘엉터리’를 안고 있다. 영화사 연구에서 서울 충무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서울사람에게, 부산 영화의 오랜 역사를 밝혀가며 부산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싶다.“

역사 연구는 본질적으로 사료의 해석과 비판에 의지한다. 사료의 신뢰성을 음미하고 그 성격을 밝히는 작업, 사료의 진위 여부, 원(原)사료에 대한 타인의 첨가 여부, 필사인 경우의 오류의 문제를 따지는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홍 원장은 정통 역사학자 못지 않는 내공으로 한국 영화사의 뼈대를 가다듬어 가는 실증주의 영화사학자이다.

부산영화 새 역사 밝히고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 헌신

생각해 보라. 어느 작가의 걱정처럼 "불완전한 개인의 불완전한 기억. 삶은, 혹은 이야기는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공간에 켜켜이 쌓이다 공간의 소멸로 결국 개인의 기억 속에 불완전하게 머물기 마련"이다. 오늘 한국영화의 중심을 꿈꾸는 해운대 영화∙영상 집중지구는 과거 어떤 영화의 흔적들을 갖고 있는가. 그 해운대, 사람이 살아온 역사며 그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영화의 역사는 또 어떠한가. 한국영화는 왜 부산, 해운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새삼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우리가 부산영화의 역사를 알고 기록해야 할 이유다.

그는 책 출간뿐 아니라 ‘부산이야기’, ‘예술부산’ 같은 잡지에도 ’부산 영화‘를 주제로 연재를 많이 했다. 글 쓰는 일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그의 연구 지향점에 닿아있다. 직접 발굴∙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부산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밝히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Q. 그 동안 모든 자료가 양도 많지만 희귀한 자료들도 많다. 부산 최초의 영화관 ‘행좌’ 사진부터, 2010년에는 영화 ‘낙동강’ 스틸 사진을 찾기도 했다. 전문가들도 찾기 힘든 자료, 대체 어떻게 찾는가? 모든 자료가 다 중요하겠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자료가 있다면?

“그렇다. 자료를 탐사, 수집한다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과 청계천 고서점을 비롯, 전국 고서점은 안 찾은 곳이 없다. 정부 기록물보존소를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외국에 나가도 반드시 영화관련 자료를 찾았고, 해외우편을 통해 각종 자료를 요청하기도 했다. ‘영화사료 수집가’로 알려지자, 헌책방거리에서부터 나를 알아봤다. 자료 값을 10배까지 부르기도 했다.

내가 아끼는 자료 중에 프랑스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 포스터가 있다. 그 영화,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활동사진이다. 프랑스 문화원장이 1990년 프랑스영화 전시회 때 가져왔다가 가져가려는 것을 ‘부산에 남겨 달라’고 간청해 손에 넣은 것이다. 당시, 이용관 동서대 교수(현 BIFF 이사장)가 확보할 뻔했던 것을...“

홍 원장은 9년 전, 지난 1951년 8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변에서 촬영, 이듬해 2월 23일 부산 부민관에서 상영한 영화 <낙동강>의 스틸 사진 11장을 최초로 발견하기도 했다. <낙동강>(전창근 감독)은 독립운동가인 먼구름 한형석(기획, 재무), 시인 이은상(주제가 작사),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영화음악)이 참여한 영화. 사료적 가치는 높지만 자료는 거의 없던 상태에서, 그야말로 ‘선명한’ 스틸사진들을 찾아낸 것이다.

홍 원장은 1952년 부산 부민관에서 상영한 영화 <낙동강>의 스틸 사진도 발견, 소장하고 있다. 사진은 1951년 8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변에서 촬영한 <낙동강>의 제작 장면(사진: 차용범 제공).

‘돈 안되는 일’ 즐겁게 수행... 가족 이해지원 없인 불가능

Q. 자료수집, 정리, 발간 작업, 쉬운 일이 아니다. 업(業)으로 하는 것도,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힘들지는 않나? 주위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나?

“물론, 난 ‘돈도 안되는' 일에 지나치게 열정적이며 전문적으로 자료를 수집, 분석해 왔다. '쓸 데 없는 일을 한다'며 만류하는 이들도 많았다. 주말마다 극장 간판미술 촬영을 나갈 때, 아내와 아이(1남1녀)들이 왜 서운하지 않았겠나. 자료수집, 돈 없으면 못하는 일 아닌가. 가족들은 사연을 다 알면서도 알면서 속고, 이해하며 지원해 준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 뒤통수만 보느라‘ 불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소설‘이 아닌, 정밀한 사료에 바탕한 글을 쓰고 있으므로.”

그는 수출입 통관하역 일에 종사한다. 부산세관이 토요일 정오까지 일하고 나면, 그는 사료수집, 사진촬영에 바쁘고, 밤이면 사료 해석, 글쓰기에 흠뻑 빠졌으니 주변이 왜 못마땅하지 않았겠나. 그래도 그는 스스로를 격려한다, 산사나이, 강태공이 있듯 내가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자료조사의 기본인 간판미술 촬영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해 왔다고.

홍 원장의 숙제 중에는 한국 개봉영화 간판미술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도 있다. 사진은 1972년부터 직접 촬영, 분류해 온 간판미술 자료집 16권 중 일부(사진: 차용범 제공).

Q. ‘내 사랑 부산, 바로 알자’ 이야기 강좌에서 ‘부산영화 이야기’를 강의했다. 어떤 내용을 얘기하며 어떤 효과가 있었나?

“나는 부산민학회, 부산박물관, 한국해양대, 그 어디든 요청을 받는 대로 강의를 하고 있다. 자료 연구∙답사 결과 확인한 부산의 역사∙문화를 시민의 삶 속에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부산의 영화문화를 발굴, 연구한 그대로, 그 실체를 전달해 부산문화를 건강하게 살찌우며 시민의 자긍심을 높여가고 싶다.”

“사료 많은들 활용 못하면 뭐하나?” ‘박물관’ 건립론 제기

홍영철 원장, 함남 원산에서 태어났다. 6∙25전쟁통 피난길에 부산에 정착했다. 그 때 나이 4세이니 부산토박이와 다름없을 터. 그는 당당하다, “부산은 나에게 제2의 고향 아닌 그냥 고향”이라고. 부산영화사 연구 역시 부산시민의 당연한 책무로 여긴다고.

Q. 부산의 강점, 부산사람의 특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많은 이들이 부산사람들의 드넓은 포용력을 얘기한다. 난 특히 ‘다정다감’을 강조하고 싶다. 부산의 단관시대를 꽃피웠던 그 극장주들, 겉보기와는 다르게 참 인정이 많았다. 나의 사료수집 작업을 잘 이해하고, 사료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슬그머니 넘겨주고. 오늘까지 나를 이해하며 남모르게 등을 두드려 준 부산극장 연제민 대표 같은 분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Q. 과거 부산과 비교한다면 지금의 부산은 얼마나 달라졌나?

“품격 있는 선진도시의 틀을 갖췄다. 쾌적한 도시환경에 광안대교∙부산항대교 같은 명물다리까지, 도시의 얼굴이 자신만만해졌다. 앞으로 부산시가 도시의 실속을 더 채워갈 것이니 부산은 날로 업그레이드를 거듭할 것이다. 영화촬영하기 좋은 도시, 영화∙영상산업의 중심..., 명성에 걸맞는 영화도시로 쑥쑥 커나갈 것이다.”

Q. 부산 영화계와 주변에 바라고 싶은 바, 주고 싶은 고언이 있다면?

“’역사 없이 미래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 영화계도 세계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 역사를 살피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 영화계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자료를 모으고 평가하는데 참 소홀하다. 부산시도 마찬가지다. 10년 전부터 부산영화박물관을 만들어 자료를 전시하고 연구하며 ‘영화도시 부산’의 역사성을 보다 확고히 정립하자고 제안했다. 그때마다 현안에 밀려 성사를 시키지 못하고 있다. 부산이 ‘아시아 영화∙영상산업 메카’를 꿈꾼다면 영화의 역사를 찾고 기록하고 평가하는데 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작심한 듯 ‘묵직한 아젠다’ 하나를 제기한다. 영화(자료)박물관 건립론이다. 부산이 아무리 영화사료를 많이 가진들 활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담론이 그저 맹랑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 안상영 부산시장 시절, 문화담당 부서에서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 담론에 관한 부산지역 언론의 기자칼럼이 있다. ‘영화도시 부산에 던지는 제언… 영화자료박물관 만들자’는 제목이다.

“부산시에 제안한다. 부산 영화자료박물관을 만들자. 독립건물을 세울 예산이 부족하다면, 영화의 전당은 어떤가? 그 공간을 창조적으로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색다른 영화 관련 기획이 넘쳐나야 영화의 전당에 관객이 모인다. 옛날 영화자료가 충분히 한몫을 담당할 수 있다. (...) 자료 자체가 바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부산이 진정한 영화의 도시가 되려면 성공적인 영화제 개최나 작품 제작은 필수다. 영화를 기억하고 추억할 역사를 저장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하다.”

많은 사료∙연구 결실 데이터베이스 묶어내기 과제

Q. 앞으로 언제까지 부산 영화를 연구할 계획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모은 자료들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나는 자료(사료)를 탐사∙수집∙연구했을 뿐 그 결과는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 우선 ‘영화도시 부산’의 뿌리를 정립할 부산영화 연표(年表)(1881년-현재) 와 ‘부산 로케이션사’를 정리하고 제작해야 한다.“

Q. 영화사 연구에 일생을 바쳐 나름 큰 공헌을 했다. 남은 숙제가 있다면?

“휴-. 내가 한 일, 영화도시 부산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큰 몫을 했을 터다. 이제 이 많은 사료와 연구작업을 데이터 베이스에 묶으면 얼마나 좋겠나. 한국 개봉영화 간판미술 자료도 정리해야 할 텐데.

(그는 ‘한국개봉영화간판미술자료집’ 제목을 붙인 대형앨범 16권을 보여주며)이 자료, 서울 영화연구가들이 빼앗아가려 골몰하고 있는 귀중한 실증자료다. 이 자료로 한국영화의 PR기법 발전사를 확인할 수 있다. 초기 신문광고 시대에서 전단-간판미술-포스터를 거쳐 버스 랩핑광고까지.”

그는 총각 때나 지금이나 체중 불변의, 잠만 잘 자면 건강한 체질이다. 그 튼튼한 몸으로 필생을 현장에서, 쉴 새 없이 뛰고 있는 마라토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역량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로 자주 탄식한다. 우선은 후진 양성. 한국영화자료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그 방대한 자료를 분류∙정리하는 일, 이미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부산 영화사 연구, 누가 맡아도 대를 이어야 하리라는 절실함이다.

“난, 나대로 헌신했다, ‘영화도시 부산’ 몫은 무엇인가?”

그래서,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아직 ‘할 말이 정말 많다’는 표정이다. 그가 부산 영화계에 주고 싶은 고언, ‘부산 영화(자료)박물관’을 만드는 일, 그가 숙제로 삼고 있는 <부산영화연표>와 <부산로케이션사>를 제작하는 일, 나아가 한국 개봉영화 간판미술자료를 정리하는 일, 모두 개인의 걱정을 넘어, 부산시(영상위원회) 등의 적극적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부산, 오늘 아시아 영화영상 산업의 중심이다. '문화의 불모지’란 꼬리표를 달고 있던 부산이 예술문화산업의 결정체, 그 국제영화제를 국내에선 제일 먼저 시작했다. 부산, ‘한국의 문화 중심지=서울’, ‘영화의 중심=충무로’라는 묵은 인식을 극복했다. 그 바탕에는 당연히 한국 영화산업의 태동지 부산의 저력이 큰 몫을 했으리. 부산영화의 역사가 그만큼 깊고 탄탄한 만큼, 그럴수록, 오늘의 우리는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천착하며 미래를 기약할 수 있어야 하리.

홍 원장은 할 말과 남은 걱정이 많다. 그는 나름 “당대의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하지만, 실상 부산이 ‘아시아 영화영상 산업 중심’으로 가기 위한 역사정리 작업은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사진은 글쓴이 차용범에게 희귀한 영화 사료들을 보여주며 남은 걱정을 털어놓는 홍 원장(사진: 차용범 제공).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가?”, 마지막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이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으로, 당대의 기록을 정리하기 위한 소명을 다했을 뿐”이라고. 그 대답에서 그의 외로움과 남은 걱정을 짐작한다. 그는 나름 항변하는 듯하다, “나는 다만 한 개인으로 이 정도까지 각고의 세월을 헌신했다. ‘영화도시 부산’을 즐기는 그대들이 지금 맡아야 할 몫은 과연 무엇인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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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시 부산#영화박물관#한국영화사#부산극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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