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정현, ‘관리’에서 승리한 자만이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썼음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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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정현, ‘관리’에서 승리한 자만이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썼음을 명심하라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8.01.26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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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정태철

정현의 발바닥은 준결승 게임 전날에 물집이 심하게 잡혀 연습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는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다닌 결과였으니, 호주 오픈 테니스 준결승에서 정현 선수가 세계 랭킹 2위 페더러에 기권패한 것은 ‘영광의 상처’였다. 누가 뭐래도 정현의 그랜드 슬램 호주 오픈 4강 진출은 축구 월드컵 4강 이후 우리 스포츠 역사가 쓴 또 다른 기적이었다.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상 꿈만 같은 승리의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일제 강점기 손기정 옹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불빛이었다. 황영조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한국인으로서 우승을 탈환하기까지 무려 56년이 걸렸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라톤 세계 제패는 신장이나 근력보다는 심폐 능력이나 지구력이 좌우하니 한국인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역주하는 손기정 선수(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60-70년대 먹고 살기 힘들었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프로 레슬링 세계 헤비급 챔피언 김일은 독보적인 영웅이었다. 그러나 프로 레슬링은 쇼 같은 측면이 있어서 스포츠의 성취적 가치는 다소 떨어진다.

그에 반에, 프로 권투 김기수 선수가 1966년 이태리의 벤베누티를 꺽고 WBA 세계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우리 권투 역사상 최초 세계 챔피언이었다. 이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그때 내 또래 꼬마들은 날마다 두 영웅 얘기 꽃을 피웠다. 꼬마들은 김일과 김기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어른들에게 묻다가 쓸 데 없는 걸 묻는다고 알밤을 한 대씩 얻어맞기도 했다. 권투는 '체급' 경기다. 체격 프리미엄 없이 우리가 대등하게 서양 선수들과 겨룰 수 있는 스포츠여서 세계 제패가 상대적으로 쉽다. 해방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급 경기인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의 양정모였다. 지금은 올림픽 금메달이 흔한 편이지만, 당시 양정모의 금메달은 국민의 숙원성취였다. 그의 이름을 딴 양정모 체육관도 그래서 건립됐다. 우리가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수확한 종목도 당연히 체급 경기들인 유도, 복싱, 역도, 레슬링, 태권도 등이었다.

체급 경기는 아니지만, 신장이나 체력의 열세를 스피드, 지구력, 기술을 '지옥 훈련'으로 장착하여 서양의 벽을 넘어 세계 정상에 선 종목들도 꽤 있다. 여자 핸드볼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연속 금메달을 땄다. 비인기 종목임에도 <우생순>이란 영화를 탄생시킬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한 선수들의 인간승리였다. 여자 하키, 여자 축구의 선전도 여기에 속한다. 

브라질 리우 올림픽 “나는 할 수 있다” 신화의 주인공 박상영의 펜싱도 그중 하나고, 체조 도마 종목의 양학선이나 여홍철의 세계 1위도 훈련의 결과다. 탁구도 여기에 속한다. 이에리사 선수가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탁구는 서양이 아니라 중국이 만리장성보다 더 높은 아성을 쌓고 타국의 도전을 불허한 종목이었다. 기술 개발과 연마 훈련에 구슬땀을 흘린 이에리사 선수를 이어 현정화 선수가 대를 이었다. 현정화 선수는 1991년 일본 자바 세계 선수권 여자 단체전에서 남북 단일팀으로 금메달을, 1993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 선수권 단식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남자도 선전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유남규 선수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유승민 선수가 각각 단식에서 금메달 획득했다. 동남아가 강세인 배드민턴 종목에서도 박주봉, 김동민, 이용대처럼 훈련을 열심히 이겨낸 우리 선수들이 여러 차례 세계 1위를 차지했다. 

1976년 서독 국제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이에리사 선수가 시민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골프와 양궁도 끈기와 집념의 훈련으로 세계 정상을 호령하고 있다. 박세리, 박인비, 박성현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골프는 단연 세계 최고다. 한국 양궁도 말이 필요 없는 난공불락 철옹성이다. 혹자는 고구려 벽화의 활 쏘는 동이족 DNA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궁 선수들이 극한 훈련으로 정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구의 월드 클래스는 좀 특이하다. 박찬호, 선동렬, 류현진, 이승엽 등 발군의 스타급 선수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각자의 개인적 기량을 뽐냈다. 이들 몇몇 스타 선수들에 의존한 한국 야구는 단체전에 강했다. 1982년 아마추어 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김재박과 한대화의 활약으로 쿠바와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한 전력도 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확했으며,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 야구가 세계 대회에서 유독 강한 이유는 야구가 단체전이면서도 소수의 명품 투수나 홈런 타자 등의 폭발적 분투로 이변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일 듯하다.

이렇게 전 한국민을 열광시킨 각종 스포츠의 성과는 서양에 뒤지는 체력적 한계를 훈련과 기술 연마 등 다른 대체재로 극복한 종목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한국 선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를 제패할 가능성이 낮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종목들도 많다.

그 중 하나가 축구였다. 한국 축구는 아시아에서는 호랑이였지만 세계무대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그때 차범근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탄생했다. 그는 고3 때부터 국가 대표가 됐고, 1978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뛰어들어 1989년까지 통산 98골의 위업을 이루고 전설이 됐다. 그 뒤를 은퇴한 박지성과 현역 손흥민이 이어가고 있다. 다들 뛰어난 개인 기량이 이들의 생존 수단이었다.

그러나 팀으로서의 한국 축구대표팀은 세계 제패와 요원했다. 그때 1984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U-20)에서 김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이 4강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멕시코 언론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동분서주하는 우리 선수를 지독하게 무서운 ‘붉은 악마’라고 불렀다. 그게 지금 한국대표팀의 닉네임이 됐다. 그후 다시 축구대표팀이 세계의 변방을 전전하고 있을 때, 2002년 한국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됐다. 그래서 월드컴 4강 신화는 ‘히딩크의 매직’이라거나 애국가 가사처럼 ‘하느님이 보우하사’ 얻은 결과로 보인다. 월드컵 4강 같은 기적은 내 생애에 재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2년 서울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 응원(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우리 스포츠 역사상 불가능이 가능이 된 스포츠 종목이 '여자 농구'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67년 체코에서 열린 세계 여자 농구 선수권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이 은메달을 땄다. 신장의 높이가 절대적인 농구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체코를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 구 소련에 석패해서 세계 2위를 차지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운데 두고 온 식구들과 중계방송을 손에 땀을 쥐며 청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유럽 선수들의 가슴선 정도였던 키 작은 우리 팀에는 박신자라는 신기(神技)를 가진 테크니션이 있었다(물론 김영자, 신항대, 김추자 같은 선수들이 같이 공을 세웠다). 그후 신장 190cm의 박찬숙이라는 대스타가 맥을 이어 1984년 동구권이 불참한 LA 반쪽 올림픽 때 은메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4강, 그리고 2002년 세계선수권 대회 4위의 성적을 거뒀다. 아무래도 1967년 박신자 팀이 이룬 여자 농구 세계 2위는 축구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경이적인 성과였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스포츠 이변 중에는 일본 여자 배구도 있다. 일본 여자 배구팀은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상상을 초월한 훈련과 속공이란 무기로 키 작은 결점을 넘어선 결과였다. 세계 언론은 이들을 '동양의 마녀'라 했고 나는 중학교 때 이들의 기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여자 배구도 신장의 열세를 지독한 훈련으로 극복하고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땄다. '나르는 작은 새' 조혜정이 대활약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과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최근 여자 배구 대표팀은 김연경이라는 월드 스타를 보유하고 있지만 70년대 전성기와 달리 세계 정상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드디어 우리도 체격이 커졌고, 과학적 훈련이 가능해졌으며, 국가와 기업의 대규모 후원이 이어지자, 동양인에게 불가능했던 영역에서 세계를 제패한 영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영은 거의 백인들의 아성이었으나, 이를 박태환 선수가 무너뜨렸다. 쇼트 트랙은 당연히 체격이 작은 동양 선수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근육질의 거구들이 힘차게 스케이트 날을 차고 나가는 스피트 스케이팅 종목에서, 북유럽 선수들을 제치고 2010년 벤쿠버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이상화의 500m 연속 금메달과 세계 신기록 보유, 벤쿠버 올림픽에서 모태범의 500m, 그리고 이승훈의 1만m 스피드 스테이팅의 금메달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과 지원이 만든 쾌거였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도 스켈레톤 등에서 비슷한 이유로 금메달이 기대된다. 

아무리 기술이 좋다고 해도 러시아, 미국 등 8등신 몸매에서 발산되는 우아함을 자랑하는 피겨 스케이팅 종목에서 어떻게 김연아가 세계 1등을 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김연아의 만점 연기는 한국인으로서는 반복이 거의 불가능한 경지였다. 손연재 선수가 피겨와 유사한 댄스 연기가 가미된 스포츠인 리듬 체조에서 선전했지만 세계 제패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김연아의 기예는 거국적 지원에 더해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우리가 아직도 정상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는 스포츠는 단연 육상 단거리 종목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도 2004년 중국의 류샹이 110m 허들에서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고, 1960년대 말에는 이미 세계 여자 단거리 육상계를 지배했던 대만의 ‘기정(紀政)’ 선수가 있었다. 일본의 400m 계주팀이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자메이카에 이어 미국을 누르고 2위를 차지한 것도 이변이다. 그러나 육상 단거리에서 한국의 선전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기초에 무심하고 응용에 강한 한국인의 특징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연아 선수(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테니스는 어떨까? 한국은 테니스 불모지다. 국내 테니스 동호인들은 많지만, 세계적 선수는 1981년 여자 US 오픈 16강의 이덕희, 2000년, 2007년 두 차례 US 오픈 16강의 이형택이 전부였다. 체격, 지구력, 파워에서 서양의 벽을 한국 테니스가 넘을 수 없었다. 

테니스는 미국에서 야구, 미식축구, 농구, 골프에 이은 5대 메이저 스포츠 종목 중 하나다. 특히 게임 스코어가 홀수일 때마다 정확하게 쉬는 테니스는 공수 교대마다 쉬는 야구 다음으로 TV 광고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에서 축구(사커)는 도무지 중간에 광고할 시간이 없어서 메이저 공중파 방송(ABC, NBC, CBS, FOX) 화면을 탈 수 없다. 미국의 케이블 방송사인 ESPN이 가끔 축구를 중계해주는데, 경기 진행 중간에 화면이 반으로 찌그러들면서 광고가 화면 하단에 나오는 형편이다. 

테니스는 경기 시간도 길다. 5세트까지 가면, 5시간도 가능하다. 게임 시간이 기니 광고 시간도 넉넉해서 스폰서 구하기도 쉽다. 그리고 왕년의 크리스 에버트, 힝기스 등을 비롯해서 작금의 사라포바, 이바노비치, 워즈니아키 등 미남미녀들이 즐비하다. 이들이 건강한 육체미로 TV 화면을 장식하니 시청률도 높다.

사라포바(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런 테니스 세계의 정상에 동양인 접근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 창이란 대만계 미국 남자 선수는 175cm의 단신으로 1996년 호주 오픈 준우승, US 오픈 준우승, 1997년 프랑스 오픈 우승의 업적을 이뤘다. 최근에는 일본의 남자 선수인 178cm 단신 니시코리 게이가 2014년 US 오픈 준우승과 최고 세계 랭킹 4위까지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테니스 랭킹 세계 1위는 아직 동양인에게 한 번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선수가 테니스 메이저 대회에서 세계 4강 이상 달성하는 것은 지금까지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테니스 선수 육성 환경도 다른 올림픽 메달 종목에 비해 열악했다. 이번에 정현이 그런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 4강이 됐다. 가족 중심으로 선수 육성이 착착 준비되었던 듯하다. 영어도 잘하고 대답도 위트가 넘쳤다. 정현은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 미국의 지인들이 CNN에서 정현을 연거푸 보여주는 등 난리라고 소식을 보내오고 있다.

한국 최초로 메이저 테니스대회 8강에 진출한 정현이 24일 호주 멜버른에 위치한 멜버른 파크에서 테니스 샌드그렌과 ‘2018 호주 오픈’ 남자 단식 8강 경기를 펼치는 가운데, 서울시 서초구 서울고등학교 인왕관에서 테니스 동호회 회원들과 야구부가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사진: 더 팩트 남용희 기자, 더 팩트 제공).

정현은 2006년 페더러와 나달의 서울 초청 경기에서 10세의 나이로 볼키즈(볼보이)로 참여한 적이 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비록 부상으로 테니스 황제와 그의 볼키즈 출신 정현의 진검승부는 뒤로 미뤄졌지만, 사건사고 많은 요즘 정현의 승승장구는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스포츠는 정직하다. 잘 나가다가 자기 관리 안 하고 음주 운전한다든가, 연예인과 TV에서 킥킥거리며 놀면 금방 표가 난다. 테니스는 시즌 내내 4개의 메이저 대회와 크고 작은 투어대회가 지속된다. 정현 선수가 꾸준함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세계 랭킹을 높여 언젠가는 세계 1위라는 역사를 쓰기를 기원한다. 그건 동양인으로는 전인미답의 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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