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天刑)의 한이 서린 비극의 섬, 소록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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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형(天刑)의 한이 서린 비극의 섬, 소록도를 가다
  • 취재기자 김연수
  • 승인 2017.05.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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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한센인들....이젠 70대 어르신 환자 8명 뿐 / 김연수 기자
일제 탄압의 상징물로 아직도 소록도에 남아 있는 감금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소록도 한센인들은 '세 번의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한센병에 걸려 사회에서 버림받은 것이 첫 번째, 사망 후 시신을 해부당한 것이 두 번째. 마지막은 해부된 시신이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된다는 것.

이달 17일이면,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 101주년을 맞는다. 한국 한센 복지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소록도에는 한센인 519명이 살고 있다. 그 중 511명은 이미 병이 완치된 후 소록도에 정착한 주민이다. 8명만이 한센병 치료를 받고 있다. 평균 연령은 75세.

지난 4월 1일, 소록도를 향해 달리는 차창 밖은 푸르렀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안개가 내려앉은 도로는 한적했다. 아득한 길을 내달리니, 멀리 보이는 안개는 금세 가까이 다가와 부서졌다. 창문을 열면 찬바람이 펄럭이며 들어왔다. 전남 고흥 27번 국도를 지날 때는 이미 해가 밝았다. 소록도까지 1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우회전하면 소록도를 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던 녹동 항이 나온다. 직진하면 소록대교를 타고 바다 건너 소록도로 향한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이다. 소록도 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초기, 조선 총독부는 거리를 떠돌던 한센병 환자들이 '일본제국'의 위상을 추락시킨다고 판단했다. 총독부는 1917년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하고 정원 100명으로 한센인 수용을 시작하면서 강제 격리 정책을 펼쳤다. 부랑자로 떠돌다가 소록도에 붙잡혀 들어간 한센인들은 다시는 섬 밖의 세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확장 공사까지 마무리한 1939년엔 6020명의 환자가 소록도에 격리 수용되었다.

소록대교 초입(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머지않아 소록대교가 나왔다. 소록도로 곧게 뻗어있는 소록대교는 현수교였다. 우뚝 솟은 두 개의 기둥에서 케이블이 내려와 상판을 지지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바다를 바라보니 녹동항 등대가 보였다.

소록대교는 2009년 3월 3일 정식 개통되었다.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들어갔다. 배는 소록도와 녹동항을 하루 40차례 왕복했다.

소록대교 위(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 제2안내소에 차를 세웠다. 안내소에서는 관광객의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병원 직원만 차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 구역으로 방문객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소록도 박물관과 중앙공원 일대였다.

소록도 마을은 방문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미 병이 완치되었지만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주민들을 위한 배려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문둥병, 나병으로 불렸던 한센병은 나균에 의한 만성 감염병이다. 한국한센총연합회는 한센병의 증상을 피부 증상과 말초신경 증상으로 분류한다. 피부 증상은 감각을 느끼는 정도가 저하되는 것이다. 감각이 무뎌지는 탓에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생기거나 화상을 입는다. 말초신경 증상은 얼굴, 손, 발 등에 변형이 생기는 것이다.

치료약이 마땅치 않던 시절, 한센병 환자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병의 증세 탓에 비단 육체적 고통만 겪은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섬에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은 세상과 고립되었다. 강제 격리 정책은 해방 이후에도 1963년 '전염병예방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여러 의학 정보를 종합하면, 한센병은 이미 오래 전 치료법이 개발되어 조기에 진단하면 100% 완치된다. 또한 한센병에 감염되더라도 리팜피신이라는 약을 1회만 복용하면 나균은 전염력을 상실한다.

소록도는 일제가 남기고 간 시설들을 역사의 흔적으로 보존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방문객이 걸어가는 산책로는 바닷가를 따라 조성되어 있었다. 산산한 바람이 부니 미역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바다 저편으로 소록도 마을이 어슴푸레 보였다. 산책로를 따라 얼마 걷지 않아 ‘수탄장’이라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국립소록도병원까지 이어져있는 나무 데크 산책로(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녹음에 싸인 수탄장 거리. 수탄장이라는 표지판을 보지 않으면 가슴 아픈 일화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롭고 고요하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수탄장(愁嘆場)’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이곳에 얽힌 슬픈 일화가 설명되어 있었다. 이곳엔 1974년까지 한센병 환자가 생활하는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를 가르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병원은 한센병 환자가 자식을 양육할 수 없게 했다. 한센인이 낳은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직원 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에서 자랐다. 아이는 12세가 되면 육지로 보내졌다. 부모는 한 달에 단 한 번 자식을 볼 수 있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껴안을 수조차 없었고 길 양 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둬야 했다. 그래서 이름이 근심에 젖어 탄식하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산책로를 지나자 국립소록도병원이 나타났다. ‘중앙공원’이라 적힌 푯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병원 왼편으로 벽화가 보였다. 어린 사슴 그림이었다. 섬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어린 사슴 모양이어서 섬 이름이 소록(小鹿)이라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병원 뒤편까지 이어진 벽화는 정사각형의 타일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타일에는 주민, 의료진, 봉사자 등 450여 명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국립소록도병원 전경.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한센 병력자의 일상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경비는 국가에서 전액 지원한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벽화길는 ‘염원ㆍ소록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소록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벽화길을 지나 병원 뒤편으로 가니 중앙공원이 나왔다. 중앙공원 초입에는 일제가 한센인을 탄압했던 해부실과 감금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1935년에 제정된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설치된 해부실과 감금실은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부실 외관(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해부실로 들어가니 한 가운데 해부대가 있었다. 양 옆으로는 진열장이 있고, 낡아 떨어진 들것 한 개가 있었다. 해부대에 손을 올리니 냉기가 손마디 끝에 전해졌다. 소록도 역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해부실 진열장에는 포르말린을 이용하여 태아 표본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전해지며, 사망한 모든 환자는 이곳에서 해부를 거쳤다. 해부된 시체는 화장한 후 섬 안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해부실 내부(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해부실에는 또 하나의 방이 딸려 있었다. 정관 수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소록도 역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남녀 별거제로 운영되던 소록도는 1936년 4월 1일부터 정관 수술을 조건으로 부부 동거를 허용했다.

정관 수술 관행은 해방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센인 피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고, 치료약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센인은 결혼하기 위해서는 정관 수술을 하는 조건으로 소록도 시설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5년 발간한 연구 용역 보고서에는 “1948년부터 정관 수술을 전제로 한 부부동거제가 부활하였다. 1958년 소록도갱생원 연보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58년까지 1,191인이 수술을 받았다. 단 수술의 명칭이 ‘정계 수술’로 변화되었다. 수술은 비단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여성 환자에게도 낙태 수술이 시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올해 2월 15일엔 한센인에 대한 단종과 낙태 조치에 국가가 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단종과 낙태를 당한 한센인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 지 5년여 만에 받은 첫 번째 확정 판결이었다.

해부실을 둘러보고 나온 방문객 권나경(50, 부산시 동래구) 씨는 이번이 두 번째 소록도 방문이라고 말했다. 권 씨는 1970년대만 해도 “문둥이들이 어린애들을 잡아 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한센병 환자에 대한 멸시와 편견이 심했다고 회상했다. 권 씨는 “소록도 주민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다. 한센병은 이제 우리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소록도의 아픈 역사는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부실을 나와 감금실로 갔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감금실의 담벼락에는 넝쿨이 휘감겨 있었다. 담벼락 가운데 뚫려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우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감금실 외관과 입구(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우물 앞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 문을 들어가니 좌우에 감금실이 복도식으로 이어져있었다. 마치 교도소를 보는 듯했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감금실 내부는 조그마한 창문으로 빛이 들어왔다. 변기가 딸려 있는 방도 있었고 창 크기는 방마다 제각각이었다. 창문엔 예외 없이 철창이 쳐져있었다.

감금실 복도(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감금실 내부(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감금실 내부. 실내에 변기가 딸려있는 모습(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감금실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는 소록도에서 탈출을 시도하거나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던 환자들이 이곳에 어떤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감금되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곳에 감금된 환자들은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많았으며, 출감 시에는 해부실로 끌려가 정관 절제를 당하였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2006년 2월 일제강점기에 강제 격리된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800만 엔씩 보상하기로 결정했다. 2006년 3월 한국 한센인 2명에게 보상을 결정한 이래, 2016년 5월12일 최종 9명에게 보상을 결정해 10년간 청구인 590명에 대한 보상을 마무리했다.

감금실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시. 참혹한 감금실 생활 중에서도 생의 의지를 놓지 않는 화자의 신앙심이 느껴진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감금실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시. 참혹한 감금실 생활 중에서도 생의 의지를 놓지 않는 화자의 신앙심이 느껴진다. 한센인 출신으로 <보리피리> 등의 시를 쓴 한하운 시인을 생각나게 한다.

침묵이 흐르던 감금실 복도에 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감금실 복도를 걷던 아이는 “여긴 집이야, 감옥이야?”라고 말했다. 부모는 집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1936년 12월 공사를 시작하여 1940년 4월 1일 완공된 중앙공원. 길을 따라 걸으면 수목원 못지않게 다양한 종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해부실과 감금실에서 긴 시간을 보낸 후 중앙공원을 걸었다.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는 푸른 잎을 피워 그늘을 만들었다. 등산복을 입고 공원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잔디밭에 앉아 쉬어가기도 했다.

중앙공원에 세워져 있는 구라탑(求癩塔) 성경에 나오는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기자가 거주하는 부산에서 소록도까지는 약 240km. 먼 거리를 달려 소록도를 가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사실 물리적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진 것은 한센인에 대한 마음의 거리였다. 직접 걸어보고 마음으로 느낀 소록도는 더 이상 비애로 가득한 섬이 아니었다. 한센병은 사라지고, 훗날 소록도는 떠나간 한센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껴안고 아기 사슴을 닮은 평화로운 섬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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