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기자는 한 달 동안 미국 LA의 친척 집에 머물렀다. LA의 베드타운 교외지역인 그 곳 어바인(Irvine)은 한국의 시골 같은 분위기였다. 주택이 들어찬 동네는 매우 조용했고 가까운 마트조차 차로 가야 할 만큼 멀어서 운전면허가 없는 내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었다. 기자는 심심한 어바인을 잠시 떠나 6박 7일 동안 미국 서부 투어를 다녀왔다.
출발 전날 설렘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참가한 투어에 기자는 혼자 끼었다. 버스는 첫 여행지인 라스베이거스를 향했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사막에 대한 신기함도 잠시일 뿐. 그래도 여행길의 가장 좋은 점은 넓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산이 많은 한국에 비해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은 산이 거의 없고 낮아서 하늘이 유독 크고 높아 보였다.
선인장만 즐비한 사막을 시야에 담은 지 네다섯 시간째. 갑자기 바뀐 바깥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높은 건물이 보였다. 도박의 천국 라스베가스 시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성 등 다양한 모습들로 한껏 멋을 부린 호텔이 줄지어 선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것이다.
라스베가스는 미국 여러 도시 중에서 이혼 수속이 가장 간단해 전국에서 이혼하려는 사람이 많이 찾아온다고도 한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다운타운에 가기 위해 TV에서만 보던 2층 버스를 탔다. 저녁이어서 매우 쌀쌀했지만, 그 버스의 묘미는 2층으로 올라가 차가운 바람에 맞서 시내 풍경을 내려다보는 데 있었다. 모든 차들이 발 밑에 있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또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다운타운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무료 전자쇼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는 해가 진 후 매시 정각에 열린다. 다운타운 모든 가게의 네온사인이 꺼지고, 프리몬트 스트리트의 아케이드 천장에선 화려한 발광 다이오드 쇼가 펼쳐진다. LG의 기술력도 전자쇼에 한몫 했다고 들었기에 기자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8시 정각이 되자 모든 상점들의 불이 일제히 꺼졌고,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자 쇼를 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 전자 쇼는 7분 동안 진행됐다. 상점 거리의 아케이드 천장을 화면 삼아 펼쳐지는 다양한 영상들은 기대만큼 흥미롭진 않았다. 구슬이 굴러다니거나 행성이 서로 부딪히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목이 조금 뻐근했다.
전자 쇼를 보고 난 후 일행들과 소감을 나눠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뉴욕에서 왔다는 교포 구희원(24) 씨는 “LG가 만들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봤다. 그런데 LG가 만들었다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고 생각보다 이목을 끌만한 영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 아케이드 천장을 화면 삼아 진행되고 있는 전자 쇼다(사진: 취재기자 김유리).
일행은 다시 화려한 호텔이 있는 라스베가스 호텔 지구를 찾아 유명한 호텔들의 내부를 구경했다. 250억 원어치의 작품이 전시돼있다는 벨라지오 호텔에선 각종 볼거리로 연신 시선을 빼았겼다. 이곳의 호텔들은 전부 카지노를 가지고 있었다. 큰 도박장을 차려 돈을 버는 이곳 라스베가스 호텔들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지만 아쉬웠던 점은 카지노 출입에 나이 제한이 있었다는 것.
만 21세가 되지 않으면 라스베가스에서는 술도 마실 수 없었고 카지노에서 게임을 할 수도 없었다. 만으로 21세에 이르지 못한 기자는 카지노 문 앞에서 사진만 찍은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웃지 못할 사연을 소개했다. 한 가족이 카지노에 게임을 하러 왔다가 부모가 화장실에 가고 아이들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카지노를 순찰하던 경찰들이 아이들 혼자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를 카지노에 방치해 뒀다며 부모에게 벌금을 물렸다는 것.
카지노를 뒤로한 채 여러 호텔들의 내부 관광과 바깥의 분수 쇼를 관람했다. 크고 화려한 호텔들을 보자 영화 <벅시>가 떠올랐다. 라스베가스 사막에 도박 도시 건설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실제 인물 벅시라는 조폭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그는 연인을 위해 모래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라스베가스의 사막 한가운데 호텔을 짓지만, 결국 연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된다. 영화는 호텔의 개막식날 그가 부하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호텔은 그가 죽고 난 후 번성해 오늘날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퇴근 시간만 되면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아 거리가 조용해지던 LA와는 달리 이곳은 불야성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볼거리 뒤에는 도시를 배회하는 어두운 인생도 있을 것이다. 알콜 중독자와 창녀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도 그런 분위기를 그렸다. 거리 곳곳에는 뉴욕의 자유여신상과 파리의 에펠탑을 모방한 거리 장식이 이색적인 느낌을 주었다. 라스베이가스의 밤을 보내면서 한국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덩치 큰 흑인들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사막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카지노 도시 라스베가스의 밤은 이렇게 저물었다. 이 도시에서는 사람도 돌고, 차도 돌고, 조명도 돌고, 카지노 노름판도 돌고, 그래서 돈도 돌고, 모든 게 혼란스럽게 돌고 있었다. 라스베가스의 시끌벅적한 추억을 뒤로 하고 그 날 밤은 피곤에 지쳐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