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칼럼] 뻔한 도시를 여행하는 궁색한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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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 칼럼] 뻔한 도시를 여행하는 궁색한 원칙
  • 칼럼니스트 박기철
  • 승인 2024.02.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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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에서 정확히 깨달았다. 호주는 유럽의 고색창연한 도시들처럼 도시를 중심으로 다니는 여행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럽에 가면 그 도시의 구도심이 도시의 중심부이고 그 곳을 가면 된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구도심이든 신도심이든 도시에선 관광 차원에서 볼 게 없었다. 퍼스, 아들레이드에 이어 간 멜번 역시 그냥 우리나라의 여느 도시들과 비슷했다. 기시감(旣視感)이 들 정도다. 물론 높은 아파트는 없지만 높은 오피스 건물들이 즐비하니 도시 자체는 별 매력이 없었다. 1788년부터 영국 죄수들의 유배지로 시작된 백인의 거주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죄수들 만이 아닌 이민자도 같이 왔지만 지금처럼 큰 도시를 가진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850년에 금광이 발견되면서부터다. 골드러쉬로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백인들에 의한 호주의 역사는 길어야 220여 년이고 짧으면 160여 년이다. 그러니 호주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의 로마나 파리에서처럼 고색창연한 멋진 구도심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뻔한 사실을 현지에 와서야 깨달으니 좀 허탈했다.

별 매력 없는 멜번의 뻔한 도심 풍경
별 매력 없는 멜번의 뻔한 도심 풍경

결국 호주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외곽으로 빠져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은 쉬운데 나로서는 쉽지 않다. 렌트카를 빌려서 다니면 좋으련만 호주가 영국이 세운 곳이라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차의 운행방향이 우리랑 정반대라 부담이 갔다. 렌트카를 빌릴 것에 대비해 국제면허증도 가져왔지만 운전을 하지 않은지가 15년이 넘어서 겁이 났다. 운전석과 운행방향만 우리와 같아도 하려고 했는데 결국 렌트카를 포기했다. 그러니 관광회사에서 마련한 관광tour 코스를 골라서 따라다니면 되겠지만 가지고 있는 돈의 한도 안에서 그리 다닐 수 없다. 한 달 여행비로 200만 원 남짓 가지고 왔는데 한번 투어를 따라 다니면 하루에 10~20만 원 정도를 크게 써야 한다. 그러니 빈곤한 여행자 신세에 멋진 풍광을 보러 관광 다니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그냥 도시에서만 머물며 우리네랑 똑같은 저 뻔한 현대식 건물들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서 구경 다니며 글감을 취재해야 했다.

그리 다니면서 왜 현대식 도시는 유서깊은 도시들보다 아름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현대인이 아무리 유리건물을 멋지게 올려도 로마나 파리 런던 프라하에 있는 여느 석조건물보다 멋지지 못하다. 아무리 첨단 건축물을 삐까번쩍 휘황찬란하게 지어도 굳이 그것을 보러 가지는 않는다. 반대로 오래된 고색창연한 건물을 보러 간다. 고생창연한 건물이 휘황찬란한 건물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미감이 고대인이나 중세인, 근대인보다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술은 좋아져도 미감은 떨어졌다.

특별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
특별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

그리 아름다울 것이 없는 뻔한 도시에서 나는 돈많은 관광객이 아니라 가난한 여행자다. 그러니 나는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생각꺼리를 끄집어 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여기에 힘들게 온 것이 의미있다. 사실 그리 하는 것은 나의 특기다. 나는 내 취미가 빈둥빈둥 기웃기웃, 내 특기는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이야기 끄집어 내기라고 내 소개를 공식적으로 그리 공식적으로 밝힌다. 그러니 굳이 나는 멋진 풍광을 보러 관광을 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호주를 와서 가진 여행 원칙 중에 ‘노 투어’를 넣은 것은 나의 경제적 주머니 사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자신감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이 자만심일 수 있다. 호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번도 접하지 못하고 도시에서만 빈둥빈둥 기웃기웃 대는 건 미련한 짓일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길거리를 걷다가 관광안내소가 있기에 들어가서 호주에서 딱 한번의 투어를 하기로 특별히 결심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그리도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궁금하기도 해서 다음 날 하루 종일의 투어를 예약하고 말았다. 호주 달러로 112달러다. 우리 돈 10만 원 정도다. 수많은 투어 상품들 중에서 가장 싼 축에 속했다. 그래도 나로서는 큰 돈이다. 관광을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No Tour’ 원칙을 깬 과감한 결정이기도 했다. 아울러 지갑이 얇아도 괜히 시도한 궁색한 결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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