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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흰눈과 두 개의 사모곡(思母曲)/ 부산경찰청 총경, 수필가 소진기
  • 부산경찰청 총경 / 수필가 소진기
  • 승인 2019.04.1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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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청 총경, 수필가 소진기

<4월의 흰눈> 
 
어머니의 마지막 흰 버선발 같은
눈이 내렸다
겨울은 어지간히 떠나기 싫은 모양이다
그래도 너는 돌아올 수 있는 약속을 할 수 있잖니
고사리 손 내민 마당 끝 작약은
어제 내린 눈 때문에
아리게 칭얼댄다
그래
내가 털어주마 이 어린 것
명주실 같은 온기로
바람이 인다
바람이 인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의 카스에서 본 시다. 나는 두 번 놀란다. 누나가 시를 쓰다니, 하는 생경함에 놀라고 시가 주는 의미성, 감정의 과잉이나 군더더기 없는 완결성에 놀란다. 

가슴 아픈 이별에는 항상 타자의 특징적 모습이 아른거린다. 뒷모습이라든지 웃는 모습이라든지 우는 모습이라든지 가장 많이 생각나는 모습이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된다. 누나에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흰 버선발로 각인되었으리라. 

생뚱맞게 4월에 내린 눈을 바라보다 누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해도 겨울은 마지막 힘을 다해 흰 눈으로 내려 세상에 미련을 뿌린다. 하물며 생명이란, 어머니의 미련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음은 내가 누나를 생각하며 오래 전 쓴 시다.
 
<누나> 
 
추석 날 마당을 씁니다
누님이 밟고 오시라고 
마당을 씁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고운 말만 들고 오시는 누님 
 
열다섯 즈음부터 밥을 하신 손으로
연신 웃음꽃을 만드시고는 
 
저만치 달이 뜨는 하늘로
노을을 타고 돌아갑니다 
 
시집갈 때처럼
빈손입니다
 
열다섯 즈음부터 밥을 하였으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살림을 한 셈이다. 아니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가사노동을 하셨다. 누나는 고사리 손 내민 마당 끝 작약을 바라보면서 열다섯 소녀였던 자신을 생각한다. 작약의 꽃말이 수줍음이란 건 우연이 아니어도 좋다. 열다섯 살로 돌아가면 엄마에게 어리광부리며 칭얼대고 싶다. 그때 꾹꾹 눌러 담았던 소녀의 수다도 있었으리라. 작약 위의 흰 눈은 흰 버선발로 은유되는 어머니이자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의 부재이기도 하다.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아이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어머니의 격려요 사랑의 표현방식이다. 누나는 스스로 어머니가 되어 칭얼대는 작약 위의 흰 눈을 털어 준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결혼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여자의 일생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누나에게, 아니 비슷한 상황이었을 모든 여성에게 서러움과 상처였겠지만 누나는 단지 비탄에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 치유의 집도의가 되는 것이다. 의타적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세다.

그리하여 난로의 온기가 아니라 돌잡이에 쓰이는 명주실 같은 온기로 바람이 인다. 명주실 같은 온기는 어머니의 온기다. 생명이 이어지는 우주의 온도이기도 하다. 치유와 사랑의 바람, 그 바람은 불어불어 천상의 어머니에게 가 닿으리라.  

다음은 내가 30대 때 어머니 꿈을 꾸고 쓴 시다.  
 
<어머니 꿈> 
 
어머니 꿈은 
어머니가 날 만나러 오셨다는 것이다 
 
초인종 소리도 없이 굳게 닫힌 대문을
누가 열었을까 
얼마나 머물다 가셨을까 
 
구천(九天)을 걸어 걸어
꿈결에 오시려고 
까치는 먼저 보내어 울고 
 
출근길 차 안에서 
울 어머니 입은 옷과 머리모양과 얼굴표정을 
찬찬히 떠올려 보면
말없이 떠나신 그날에도 입은 해진 털옷을
또 입고 오셨기에 
산 하늘 너머 너머 가시는 길 
여비가 떨어지면 다시 오지 않을까 
 
서른도 넘은 사내가 
어머니 꿈을 꾸고
기린처럼 목을 늘인다 
 
나는 엄마를 해진 털옷으로 기억하고 누나는 흰 버선발로 기억한다. 박경리 선생은 "어머니는 다 비우고 다 주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 엄마는 자식들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셨다. 아예 비울 것도 줄 것도 없었던 사람, 입에 넣는 것은 풀과 물뿐이지만 젖과 피를 짜내는 분이셨다.  

어머니! 너무 외로워 마세요. 이 지상에서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모곡이 두 개나 있습니다. 하나는 동틀 녘 읽으시고 하나는 해질 녘 읽으세요. 그리고 누나는 엄마가 다 누리지 못한 세월까지 좀 얹어서 길게 길게 지상의 복을 누리도록 해 주세요.

저는 초등학교 몇 학년이었나요. 그때 토마토 팔아 사 주신 청바지 하나의 추억으로 충분합니다. 엄마 거기에도 봄이 왔겠죠. 내일쯤 이 아들이 보내는 봄 편지가 당도할거에요.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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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눈#4월#누님#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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