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왜’ 라고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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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왜’ 라고 물어야 한다
  • 부산경찰청 총경 / 수필가 소진기
  • 승인 2019.05.2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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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경찰청 총경, 수필가 소진기
부산경찰청 총경, 수필가 소진기
부산경찰청 총경, 수필가 소진기

왜 안 됩니까?

어느 구청의 부구청장이셨던 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어떤 설명이나 주장을 펼치면서 ‘왜 안 됩니까’라는 말을 자주 구사했다.

왜와, 안 됩니까, 사이를 꽉 붙여서 무심한 듯 허공에 툭 뱉으면,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내 생각은 묘하게도 그 분의 생각을 따라가고 있었다. ‘왜 안 됩니까’란 말이 허공에 머무는 그 짧은 순간 왠지 아멘, 이라고 해야 될 것 같았으나 나는 대신 가벼운 고개 끄덕거림으로 당신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를 했다.

나중에 나는 그 분의 대화법이 자기모순을 없애기 위한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닮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반문을 흉내 내곤 했었다.

상투적인 말을 늘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들으나마나 한 말, 하나마나 한 말이다. 그게 웃기면 말은 생명력을 얻게 되지만, 대부분 진부하거나 생생함이 결여된 말이다. 거기에다 심드렁하기까지 하면 최악이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만든 한나 아렌트는 이를 ‘말의 무능함’이라 표현한다. 말의 무능함은 말의 뿌리에 있는 사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유의 무능성이 말의 무능성으로 나타났다는 거다.

개그맨들은 사람들을 한 번 웃게 하기 위해 장시간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고 한다. 생각의 노를 저어 사유의 바다로 나아가 상투어(魚)가 아닌 은빛 월척을 낚아 올리려는 노력이다. 이 때 만큼은 개그맨의 세계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스토리와 다르지 않다. 상투적이지 않다, 는 것은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닌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실을 숭배하거나 존경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지식인은 미래를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실과 불화(不和)하는 사람이라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의 말과 맥이 닿는다.

주류에 영합하지 않고 부당한 권위를 의심하는, 그 지식인이 지식인을 기르고 다시 그 지식인이 그때의 현실과 불화하며 그로부터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 이런 양심이 세상을 손톱만큼씩이라도 이동시켜왔다. 어쩌면 숭배나 존경은 아닌, 현실과의 타협은 가능한가라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헤세의 말에서 나는 넓은 운신의 공간을 발견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벽을 본다.

온통 남 탓만 하는 염량세태(炎凉勢態)의 하루를 견디다 보면 저녁쯤이면 그래, 그냥 태양이 돈다고 말해버리면 만사가 편할 거라는 유혹이 석양보다 매혹적이다. 갈릴레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지만 그에 비해서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고의적인 거짓말은 늘 일어난다. 그리고 발각되지 않는다. 거짓말은 합리성을 따라 만들어진 이야기라서 종종 현실보다 더 합리적이고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국론분열’은 나쁜 것인가?

내가 들었던 거짓말 중의 하나는 ‘국론분열’이란 말이었다. 국론분열은 아주 나쁜 것이었고 반드시 어떤 첩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차츰 국론은 무엇이며 그리고 분열은 어떤 상태인지, 국론은 분열돼서는 안 되는 것인지, 국론이 분열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인지 자문하게 되면서 이 말의 허구성과 상투성을 깨달았다.

더구나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 “의견의 정치가 작동하는 곳에는 말이 넘쳐난다. 의견은 말로 표현되고 그 말들이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견의 정치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정치는 시끄러운 정치다. 국가가 시끄럽지 않고 질서 있게 조용히 운영되는 것은 시민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관리자의 바람일 뿐이다”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됐다.

형사소송법 제 70조에는 구속의 사유가 나와 있다.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경우다.

염려, 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증거는 수사기관이 찾는 것이고 피의자에게 증거를 인멸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망의 염려라는 기준 또한 낡은 느낌이 든다.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드러나는 사이버 세상에서 생활반응 없이 숨어 살기란 불가능하다. 가족과 집이 있고 성실하게 조사를 받아왔으며 그 조사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이 됐다면 어떤 염려는 염려라 보기 어렵다 할 것이고, 더구나 그 염려 내지 걱정의 정도는 판사마다 들쭉날쭉하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판사는 모범생이었으며 우수한 두뇌를 가졌으므로 그들이 사용하는 법전 또한 완전무결하리라는 인식은 오래 전 후진 시대에 만들어진 법전이 후광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법의 영역에서 현실을 숭배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높고, 그래서 이익을 누리는 쪽은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는 의견은 힘을 얻은 지 오래다. 다툼의 여지, 라는 말도 재판을 잘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의 동의반복일 뿐이지 않은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기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럴 거 같다. 정이 많은 사람은 누명을 씌울 거 같지도 않고 편드는 속내가 빤히 보이는 유치한 글을 쓸 거 같지도 않다. 정이 많아서 약자를 위해줄 거 같고 잘못했더라도 과도하게 창을 겨눌 거 같지 않다. 그런데 이 텍스트에도 함정이 있다. 생각이 깊은 사람과 정이 많은 사람을 왜 굳이 비교해야 하는지, 정이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객관적인 검증자료는 있는지 의문이 든다. 생각이 깊고 정이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고 하면 될 일이다. 내가 이 생각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자의 권위에 짓눌려 생각의 힘을 잃은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나를 바꾸려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무모한 노력이며 갈등만 유발할 뿐이라고 짐짓 진지하게 말한다. 누구나 간섭을 싫어한다. 그러나 시소의 반대편에 아내가 앉아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담배를 끊지 않았을 테고 매일 술을 마셔왔을 공산이 크다. 나는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나마 어느 정도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관성은 견제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성을 견제하는 것은 다른 유형의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아울러 그것은 일류의 꿈이다. 현실과 상투의 산을 넘는 일이 시끄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 정치는 원래 시끄러운 거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본래 시끄러운데 시끄럽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는 거다. 그러니 문제는 시끄러운 게 아니라 견제 받지 않으려는 관성이다. 관성은 그냥 이 정도의 세상에서 살아가자고, 일류의 꿈은 우리의 꿈이 아니었지 않느냐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거다.

다시 헤르만 헤세의 말을 생각한다.

현실을 숭배하거나 존경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라는 구절에서 나는 더 큰 울림을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헌법정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왜 안 됩니까, 란 반문이 어느 노신사의 철학이었듯 어떠한 상황에서도, 는 한 치의 물샐 틈도 허용치 않는 헤세 문학의 뼈대가 되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이야기할 힘이 나에게 있을까, 를 자문하면서 그럴 수 없다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한 평생 임과 함께 살아가리라는, 필부의 소박함으로 막걸리나 마시며 살아가자고 씁쓸한 혼잣말을 해 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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