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왜 아타튀르크 같은 지도자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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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왜 아타튀르크 같은 지도자가 없는가
  • 편집인 강성보
  • 승인 2015.03.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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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사진출처: 위키백과)

몇 년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역사 재평가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뜨거웠을 때였다. 모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선배 한 분과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이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그 선배는 “미국의 조지 워싱턴을 제외하고 나라를 처음 세운 지도자가 독재를 하지 않은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인권탄압, 부패 등의 오명도 마찬가지”라면서 중국의 모택동, 대만의 장개석 및 이디 아민 등 아프리카 지도자 몇 명을 거론했다. 이승만 역시 독재를 했고, 그가 저지른 과오로 4.19 혁명을 불러 해외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설명이었다.

이 때 나는 즉각 “케말 파샤는요?”라면서 반박했다. 이승만의 재평가 문제에 관해 그다지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고 또 평소 케말 파샤에 대해 생각해둔 바도 없었는데, 나도 놀랄 정도로 순발력 있게 그 말이 튀어 나왔다. 학창 시절 터키 역사에 관해 배우면서 나의 뇌리 깊숙히 담아뒀던 케말 파샤의 위대한 지도자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선배는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아, 그렇구나. 예외없는 규칙은 없지”라면서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지난달 방학을 이용해 터키를 8박 9일 동안 ‘주(走)버스간산(看山)’했다. 말대신 버스를 타고 대충대충 훑고 지나가며 구경했다는 뜻이다. 자연이 마술 같은 솜씨로 빚은 카파도키아의 기기묘묘한 지형에 감탄사를 연발했고 이스탄불과 에페소 등에 남겨진 그리스, 로마,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찬란한 문화 유적 앞에선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에 대한 터키인들의 깊은 존경심이었다(아타튀르크란 말 자체가 터키의 아버지, 즉 국부란 뜻으로 터키 국민들이 그에게 이런 이름을 선사했다.

어딜 가나 아타튀르크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스쳐간 모든 도시엔 아타튀르크 동상이 서 있었으며 ‘아타튀르크’란 도로명이 존재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도착하고 다시 출발한 이스탄불의 허브 공항이름도 ‘아타튀르크 에어포트’였다. 공공기관, 학교는 물론이고 기업체들도 그의 초상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있으며 큰 도로에 접한 벽에는 대통령으로서 그가 벌인 활동상 사진이나 초상화를 걸어둔 곳이 적지 않았다. 일반 국민 중에도 지갑에 아타튀르크 사진을 넣어 다니는 경우도 흔히 발견했다. 그 뿐인가. 터키의 모든 화폐(지폐와 동전을 막론하고)에도 아타튀르크의 초상이 실려있었다. 터키 국민들은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아타튀르크를 곁에 두고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탄불에는 오스만 튀르크 제정의 말기에 세운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다. 프랑스 루브르 궁전을 벤치마킹하여 지었다 하지만 내부 곳곳이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세계에서 최고로 화려한 궁전이라 일컬어진다. 이 돌마바흐체 궁전에는 대형 시계들이 여러 개 비치되어 있는데 이 모든 시계의 바늘은 9시 5분에 정지되어 있다. 1938년 11월 29일 아타튀르크의 서거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매년 11월 29일 오전 9시 5분에는 전 국토에 싸이렌이 울리며 이 싸이렌 소리에 모든 차량이 주행을 멈춘다고 한다. 전 국민이 아타튀르크를 위한 1분간 묵념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 가이드는 “아버지 제삿날도 잘 기억 못하는데 터키에서 생활하다 보니 아타튀르크 서거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됐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왜 아타튀르크는 터키 국민들로부터 이처럼 깊고 넓고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가. 유럽의 늙은 호랑이 오스만 튀르크의 제정을 뒤엎고 터키 공화국을 세운 뒤 터키를 근대국가의 반석에 올려놓은 찬란한 업적 때문이다. 1881년 살로니카(현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난 무스타파 케말은 1893년 군사고등학교에 입학, 군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다다넬스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는 이듬해 35세의 나이에 장군이 된다. 케말 파샤(케말 장군)란 호칭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군인으로서의 무용담은 끝이 없을 정도다. 1차대전 후 유럽열강에 의해 패전국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가 찢어발겨지고 튀르크의 정치적 군사적 활동영역이 극도로 제한됐을 때 케말 파샤는 조국의 자존심 회복을 내걸고 독립전쟁을 벌인다. 점령군으로 터키에 진주하던 프랑스, 영국군, 그리스 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한 케말 파샤는 오스만 제정을 무너뜨리고 1923년 공화정을 선포,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후 1938년 사망할 때까지 유럽의 병자였던 터키를 광범위한 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시켰다. 술탄(이슬람식 황제)제와 칼리프(이슬람 최고 종교지도자)제를 폐지하고 종교의 정치간섭을 금하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터키 문자를 라틴어식 알파벳으로 바꿨다. 일부다처제를 없애 남녀평등을 실현하고, 종래 이름만 가졌던 모든 국민에게 성(姓)을 가지도록 의무화했다. 자신이 ‘아타튀르크’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긴 것도 그의 임기 초기에 이뤄졌다. 그가 취한 정치, 경제, 법률, 사회, 문화 개혁은 하나같이 모두 혁신적이었다. 웬만한 지도력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이런 방대한 개혁을 그는 일사천리로 이뤄낸 것이다.

케말 파샤가 터키인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모든 개혁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투명하게 처리하고 측근 관리를 철저하게 했으며 사생활이 깨끗했다는 것이다. 그의 4선 임기 내내 이슈가 될만한 스캔들은 단 한 건도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을 한 번 했으나 금방 이혼했고 자식은 남겨두지 않았다. 특히 장기 독재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부정축재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가 죽은 뒤 남긴 그의 재산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만큼의 푼돈 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치고 빈손으로 떠났다.

여기서 우리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으로 시선을 다시 옮겨보자. 그가 나라의 초석을 마련하고 외교력을 발휘해 북한의 침입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공적은 제대로 평가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집권 과정에서 정적들을 음모적 수단으로 몰아내고 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폐적은 그 공적을 뒤덮을 만큼 심대한 것이다. 더욱이 친일파 인사들을 초대정부 권력층에 대거 투입시키면서 민족정기를 훼손한 점,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한 점은 이해의 폭을 아무리 넓게 잡아도 용납하기 어렵다. 그런 이승만의 동상을 전국 곳곳에 세우고 건국대통령으로서 추앙하자는 보수 인사들의 주장은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국민적 컨센서스를 얻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8박 9일 터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귀국길에 우리에게는 왜 국민적 추앙을 받을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는지 안타까운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훌륭한 건국 영웅을 둔 당신들 터키인이 참으로 부럽다”는 나의 말에 오스만이란 이름의 터키인 가이드가 “테세퀴르 에데림(Thank you very much)”이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소득수준으로는 한국보다 좀 못할지 몰라도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대제국 오스만 튀르크의 후손이며 아타튀르크라는 큰 인물을 가진 터키인들의 자존심은 우리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저 높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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