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차분한 터키, 곳곳에 갈등의 불씨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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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차분한 터키, 곳곳에 갈등의 불씨 여전
  • 권경숙 시빅뉴스 터키 특파원
  • 승인 2014.10.27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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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오후 9시 경 탁심 부근에서 진압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하며 해산시키고 있다(사진: Levi Hahn 제공)

지난해 여름, 터키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고 세속주의를 반대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당시 총리(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로 들끓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달리 세속주의를 유지했던 터키는 음주가 허용됐고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의 히잡 착용이 금지됐었다. 이런 정부의 근본주의에 반발하여 세속주의의 유지를 주장하는 젊은이들과 일부 정치 세력의 시위가 일어난 지 1년 후, 시위 발발 현장이던 이곳 이스탄불 탁심 광장은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정부와의 갈등의 불씨가 도심 곳곳에 숨어있었다.

▲ 이른 저녁 시간, 탁심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유를 즐기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권경숙).

기자가 터키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지난 달 8일이었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메지디예쿄이·시슬리로 향하던 중, 기자는 대형 쇼핑몰 앞에 경찰과 시민들이 뒤섞여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이틀 전 그 지역의 한 건설현장에서 화물용 승강기가 추락해 10명의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근로자 및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안전대책을 강구하며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항의하는 반정부 데모는 아니었지만, 정부는 물대포 등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단다.

이 상황을 직접 본 현지 교환학생 김상국(24) 씨는 "듣던 대로 역시 터키는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시위 진압 현장을 도착하자마자 보게 돼 정말 놀랐다"고 전했다.

이후로도 종종 산발적인 시위가 몇 건 더 일어났다. 이스탄불은 평소에도 교통체증이 워낙 심한 지역이긴 하지만, 간혹 시위대가 도로를 건너기라도 하면 그날은 러시아워가 아니어도 꼼짝없이 지각을 각오해야한다.

지난 7일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IS)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시리아 쿠르드 족을 정부가 돕지 않는다는 이유로, 터키 내 쿠르드 인들이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으킨 시위가 이스탄불까지 확산됐다. 며칠간 기자가 머물고 있는 숙소 근처의 탁심과 베식탁스에서도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출신 외국인 유학생 레비 한(20, Levi Hahn) 씨는 집 근처에서 친구와 샌드위치를 먹으러 나왔다가 갑자기 인근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최루 가스가 주위를 덮치는 위험스런 상황을 경험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휴지와 물병을 꺼내 보이며 “마시던 차를 휴지에 적신 뒤 코를 막고 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 지난 7일 쿠르드 족 시위대가 터키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최루탄과 공포탄 등으로 시위대를 쫓고 있다(사진 및 동영상: Levi Hahn 제공).

이처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힘든 외국인 유학생 및 교환학생을 위해. 이날 현지 학생들은 실시간으로 SNS와 메신저를 통해 각별히 주의할 것을 알리기도 했다.

▲ 터키인 기젬(Gizem)이 자신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알린 시위 내용(사진: 취재기자 권경숙)

터키에서 11년 째 거주하고 있는 교포 설광운(24) 씨는 시위가 더 크게 확산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 씨는 “지난해 탁심 게지 공원에서 시위가 일어났을 때, 내가 다니는 학교가 다친 시위대들의 대피소로 쓰여 학교에도 최루탄이 뿌려지곤 했다”며 “때문에 학사일정도 많이 바뀌었고, 외국인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했다가 강제추방당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회상했다.

▲ 9일, 무력충돌이 있은 후 총격을 받아 깨진 30M(베식타스-메지디예쿄이·시슬리 행)버스 유리창과 여전히 도로 위를 점거하고 있는 시위대 모습(사진: 취재기자 권경숙).

크고 작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에서 정부의 강경한 입장이 눈에 띠고, 대학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스탄불의 베식탁스 지역에 있는 바흐체세히르 대학(Bahcesehir University)은 사립인데다 미국, 독일 등 외국에 캠퍼스를 두고 있는 인터내셔널 대학으로 정부의 제재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역시나 어느 정도 종교적 색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이슬람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근본주의 정책에 영향을 받고 있다.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을 환영하는 파티가 있던 날, 학교 곳곳에 경찰과 경비원들이 배치돼 가방과 신분증을 검사했다. 이는 학생들이 술을 소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최근 정부는 밤 10시 이후 술 판매를 금했고, 학교에는 아예 술을 반입할 수조차 없게 하고 있다. 터키 학생 엠레 아큰(25, Emre Akın) 씨는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예전에는 술 정도는 허용됐다”며 “학생들이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지지하지 않는다”면서“혹시 학생들 중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큰 씨 외에도 기자가 만난 터키 대학생들은 현 정부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는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면서도 선뜻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했다. 그들은 차가운 밤공기처럼 잠시 차분히 가라앉은 듯한 터키 사회의 숨어있는 또 하나의 불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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