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자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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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의 변명
  • 편집위원 신병률
  • 승인 2014.09.2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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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겁하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누군가 "강도야 ~"라며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해 온다면, 나는 달려가 그 강도를 붙잡고 늘어질 용기가 없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용기 없음은 사실 내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붙잡지는 못해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피해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걸 돕거나, 어쩌면 순발력을 발휘해서 용의자의 사진을 찍어둘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로 큰 문제는 내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이유로 혹은 귀찮은 일들이 생길까봐 그냥 못 본 척 눈 감은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비겁함은 진드기처럼 내게 달라붙어서 매순간 나의 자존감을 갉아 먹는다. 비겁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나는 순번이 돌아와 이렇게 칼럼을 통해 세상에 무언가를 말해야만 하는 때가 되면 매번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 자신의 아파트에서 난방비가 여러 해 동안 부당하게 청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폭로한 김부선이란 여배우를 존경한다. 혹자는 좌충우돌 사회적 발언을 일삼는 그녀를 연기나 열심히 하라며 폄훼하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기 주변의 부조리에 맞서는 그녀가 비겁한 교수인 나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던 내부고발자들이 어떤 고충을 겪었고 그 고발의 대가가 어떠했는지를 알기에 더욱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소원수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군대에 가 본 사람은 다들 알 것이다. 직장인이라면 상사의 부당한 행동이나 지시를 속으로 삭여야 했던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대게들 그렇게 우리는 보복의 두려움을 품은 채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삶이 한 발짝쯤만큼이라도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화해왔다면 그것은 김부선처럼 자기 주변의 부조리에 항거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희생으로 얻어진 과실은 희생자가 아닌 주변인들이 누리게 되고, 그 주변인들은 대게 그 희생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넓은 오지랖과 싸가지 없음을 비난하는 일도 흔하다. 이래서 대게들 그냥 못 본 척하고 사는 것일 게다.

고(故)노무현 전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에서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또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한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모두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해야 했습니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라고도 했다.

사실 조선왕조 이후의 우리 역사만 이랬겠는가? 불의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다 무참히 깨져나갔던 계란들의 역사는 유사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하게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최근의 예로, 대표적인 민주 국가인 미국조차도 ‘정보기관이 상시적으로 도청을 했고 심지어 우방의 정상들까지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서른한 살 먹은 자국의 청년 에드워드 스노든을 간첩죄로 다스리겠다고 벼르고 있는 실정이고 그래서 그 청년은 수년째 소련에서 원치 않는 망명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독립운동의 과실을 친일파가, 경제성장의 과실을 재벌이, 언론 민주화 운동의 과실을 보수언론이 가장 먼저 또 가장 철저히 누리는 아이러니를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부조리에 맞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입바른 소리를 한 학생이, 노동자가, 언론인이, 선생과 교수가, 그리고 일반 시민이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나는 감히 젊은 세대에게 주변의 부조리에 맞서라고 말할 수 없다. 내 학생들에게 매사에 정의롭고 당당하라고 말할 수 없는 나는 그래서 교수의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나 같은 이는 교직을 떠나야 마땅하겠으나 역설적이게도 비겁하기 때문에 그냥 눌러앉아 살고 있다. ‘적어도 나는, 용기 있게 정의의 호루라기를 불었던 휫슬 블로어(whistle blower)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정도는 품고 살잖아’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나도 한 번 힘차게 호루라기를 불어보고 싶지만, 비겁한 나는 내부고발자와 공익신고자들이 합당한 보호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누구도 보복의 두려움 없이 휘슬을 불 수 있게 되는 그날까지 그냥 못 본 척 참고 살지 싶다. 그런 날이 쉬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보다 훌륭한 숱한 계란들의 희생 뒤에나 그런 날이 올동말동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개인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정의의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휘슬 블로어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미안하고 죄송하다. 그대들에게 감사드리는 것밖엔 해줄 게 없는 나는 구제불능의 비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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