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세월호
상태바
월드컵과 세월호
  • 편집위원 신병률
  • 승인 2014.07.07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 월드컵의 열기는 예년만 못했다. 대표 팀의 객관적 전력이 16강에 진출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을 테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민의 상처가 더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백 명의 생떼 같은 어린 목숨을 실은 배가 어처구니없이 수몰되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그저 무기력하게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으니, 제아무리 4년만에 돌아온 지구촌 축제라지만 그걸 맘껏 즐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지 80여 일이 지났지만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가 11명이나 되고, 5억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유병언의 행방조차 못 찾고 있는 마당에 누군들 편하게 월드컵을 즐길 수 있었겠는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보고도 공포를 떠올려야 하고, 안내 방송이 나오면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갈지 모릅니다. 제주도 땅은 평생 밟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살아남은 급우들끼리도 서로를 피할 겁니다. 만나면 생각나거든요.” ... “저는, 사고를 당했으니 아픈 게 당연하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괜찮아 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피가 나고 아물고 딱지가 되어 떨어져 나갔는데 그 흉터가 그대로 남아, 볼 때마다 열일곱 살 어린 내가 그리고 이젠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내 친구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납니다. 치솟는 불길의 잔상이 망막에 맺히고, 검은 연기가 친구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여전히 어제 일처럼 식은땀이 납니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구급차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나는 내 나이의 앞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그 누구 하나 지켜줄 수 없는 지금의 나에게도 화가 납니다.”

길게 인용한 이 글은 2000년 7월 14일 수학여행 길에서 버스 추돌 사고를 당해 13명의 친구를 잃어야 했던 당시 부산 부일외국어 고등학교 1학년이던 김은진(30) 씨가 세월호 참사 직후 한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얼마는 끈질기게 피해자의 삶을 갉아 먹는지 볼 수 있다. TV 앞에서 제발 한 명만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하고 기원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번 참사로 인해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으로 선명한 이미지를 동반하는 정신적 충격의 경우에는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잘 사라지지 않고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은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괴롭힐 것이라고 하니 그들의 앞으로의 삶이 걱정스럽다.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잊혀질까봐 가장 두렵다’고 ‘기억해 달라’고 누차 말해왔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도 했다. 그날의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우리들의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을 태운 배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단순히 기억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잘잘못의 경중을 가려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위해 지혜를 모아 대책을 수립하고, 그리하여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하라는 것일 테다. 그런 뒤라야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의 상처가 다소나마 치유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고가 발생한 직간접적 원인, 선장과 선원의 대응, 해경의 초동대처와 사고수습의 적절성 여부, 정부의 재난 대응 시스템 등에 대한 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관피아로 대변되는 민관유착, 정부와 여당이 추진해온 규제완화 정책, 언론의 보도 태도 등과 같은 배후 원인들도 다시 점검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다. 현재 검찰의 수사와 국회의 국정조사가 진행 중에 있지만 얼마나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제대로 된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벌써 검찰 수사와 국정조사의 부실 징후가 언론을 통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전례에 비추어 보면 결국 이전투구만 벌이다 끝나버리기 십상이겠지만, 이번만이라도 제발 눈앞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연연해말고 우리 사회의 먼 미래를 먼저 생각해 줄 것을 사태의 수습에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당부한다. 그리고 우리 시민들도 이들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지 끝까지 지켜보고 혹 그들이 이번 참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 책임을 철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생존자와 유가족과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들의 책무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책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여러 과오를 이번에는 되풀이하지 않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번 일을 잘 수습하고, 4년 뒤에 있을 다음 번 월드컵을 편안하고 즐겁게 응원하게 되길 바라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