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삶은 힘들지만 꿈을 잃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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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삶은 힘들지만 꿈을 잃진 않았습니다"
  • 취재기자 김광욱
  • 승인 2013.12.1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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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전문가를 꿈꾸는 '노가다' 고졸 청년 이야기
▲ 전체적인 천장 높이와 창문 사이즈를 재고 있는 윤지훈(가명,26) 씨. (사진: 취재기자 김광욱)

여느 가정과 달리 부모님의 불화로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지금은 혼자 독립해 인테리어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가을빛으로 물든 산이 낙옆을 날리며 옷을 벗고 있는 어느 겨울, 부산 남포동에 인테리어 내부 공사 중인 한 가게에서 윤지훈(가명, 26) 씨가 일하고 있다. 아침 7시 30분, 사람들이 하나 둘 출근길에 나서고 있을 때 가게는 이미 망치와 톱질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윤 씨는 어린 시절 남들과는 다른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그는 술을 마신 아버지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얻어 맞기 일쑤였다. 그는 "초, 중학교 시절은 친구들과 일부러 밤늦게까지 놀고 집에는 항상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셨거든요. 맞을 기회를 넘긴거죠"라고 말했다.

집안에는 아버지가 태우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먹다 남은 음식물과 나뒹구는 그릇들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난방도 안되는 방에 누워있다 보면 감기도 자주 걸렸는데, 그럴 땐,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면서 땀을 흠뻑 흘려 감기 기운을 떨치는 것이 저의 어린 시절 일상이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여러 직업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그렇게 찾게 된 것이 인테리어 일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고 합격하는 소식을 들었을 땐, 좋은 일이라 기쁘기도 했지만 내심 많이 속상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그는 20세 나이에 직접 작업 현장으로 뛰어들었다.그는 “친구들 때문에 때론 속상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인테리어 현장에 나와 조금씩 변해가는 가게 내부를 보면서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윤 씨는 시종일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그는 남들에게 불행한 것을 보이지 않으려 항상 웃고 다녔다. 그것이 버릇이 되고 이제는 습관이 되어, 그는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 

처음 일을 구한 것은 네 사람이 팀을 이루어 내부 인테리어 수리를 도맡아 하는 업체였다. 매일 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을 하는 날은 그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하는 가게에 가서 자재도 미리 정리하고 공구도 미리 세팅해 두었다. 그는 “처음 일을 배울 땐 믿을 게 힘과 성실밖에 없었다. 그땐 적어도 30분 전에 출근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 나이가 윤 씨보다 많았다. 그들은 아들처럼 운 씨를 대해주기도 했지만, 험하고 고된 일을 오래 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화가 나면 정말 무서웠다. 하루는 2m로 맞춰서 잘라야 하는 널빤지를 잘 못 재어 엄청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실수였다. 그는 어른들로부터 호되게 혼이 났다. 꾸중도 엄청 많이 들었고, 구박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성장해있었다.

▲ 윤 씨가 팀원들과 작업 중인 현장. 내부 인테리어가 거의 완성단계에 다다랐다(사진: 취재기자 김광욱).

가게나 건물 내부 인테리어 공사 일을 하는 분들은 대부분이 3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20세부터 시작한 그는 올해로 군대 생활을 제외하고 5년차 일꾼이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해서 그런지 주위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하냐고 의아해 할 때도 있지만, 그는 현장에서는 여느 아이돌 부럽지 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저희 팀 식사를 담당하는 아주머니들이나 같이 일하는 형, 아저씨들에게 인테리어계의 아이돌이라 부른다. 또래 친구들은 없지만 일하는 것이 즐겁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번 돈으로 방이 두 칸인 전셋집도 구했고, 적금도 붓고 있으며, 약간의 취미생활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큰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다른 팀을 구해서 일을 시작해야 했는데, 일자리가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복학 준비나 유학 준비로 분주했을 때, 그는 낙동강 오리 알처럼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당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 따로 나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머물 곳도 없었다. 그에게 그때의 사회는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끝없는 지원과 도전으로 지금의 팀을 구했고, 다시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을 향해 노력하게 됐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서점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인테리어 관련 책을 보고 건축에 관한 서적도 구입해서 집에서 읽고 있다. 비록 대학 진학을 하진 못했지만,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 자격증도 따서 언젠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설계하고 제작하고 싶어 한다. 그는 한때 야간대학 진학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일을 마친 후 집에서 틈틈이 인테리어, 건축 등을 독학하고 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제일은 노력과 성실입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제가 두고두고 생각하고 되새김질하는 문장입니다. 언젠가는 제 꿈을 당당히 이루고 말 것입니다”라고 항상 말한다. 실제로 그와 같이 일하는 박대성(49) 씨는 “이 아이가 지각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매일 일찍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까지 묵묵히 일을 한다. 일 마치고 술자리에도 잘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가 늦은 공부를 하는 걸 보니, 여느 또래 아이들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도 묵묵히 제자리에서 망치를 두들기고 있다. 손에 상처가 나고 굳은 살 투성이지만, 그는 그것이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남들과는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지도 못했고, 또래들과 신나게 술을 마시고 유흥을 즐길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그에게 후회는 없다. 남들보다는 조금 뒤에서 출발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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