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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위원 신병률
  • 승인 2014.03.2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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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중 무얼 먹지?’와 같은 비교적 가벼운 선택부터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등 상당히 무거운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살면서 숱하게 많은 선택들을 하게 된다. 모르긴 해도 인간이 하는 선택 중 가장 무거운 선택은 ‘사느냐, 죽느냐?’하는 선택이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인간의 심정만큼 무거운 것이 또 있을까?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얼마 전 생활고에 시달리다 동반 자살을 선택한 세 모녀가 현금 70만원과 함께 집 주인에게 남긴 유서의 전문이다. 오랜 지병을 앓고 있던 큰 딸, 아르바이트로 간간이 생활비를 보탠 30대 작은 딸, 그리고 식당일을 하다 팔을 다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60대 어머니. 연탄불을 피워 생을 마감하려 했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고뇌의 무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나라가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이제 식상한 뉴스가 되었다. 하루에 마흔 명 정도가 자살을 하고 있다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옛말이 무색하다. 생활고, 질병, 고독, 가정불화, 교우관계, 성적, 학교폭력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삶은 살아가기에 너무 무거웠을 것임에 틀림없고, 그 무게를 나눠들어줄 누군가가 곁에 없다고 느꼈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들의 극단적 선택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아직까지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진 모르겠지만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민태원의 ‘청춘예찬’에서 청춘을 생(生)이나 삶으로 바꿔 읽어도 그 뜻이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생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뜨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확대되고, 사회안전망과 복지시스템은 재도전이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인간관계는 파편화되어 고독이 심화되고 있다. 죽고 싶다는 인간 내면의 고뇌를 포착할 수 있는 예민한 안테나가 발명된다면 그 안테나는 희망을 상실한 개인들의 소리 없는 신음과 구조요청을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포착하고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어째 점점 불행해지는 듯하다.

물론 국가가 모든 개인을 행복하게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생존 기반과 재기의 희망을 제공하고, 개인과 개인이 서로 연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닐 테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모든 국민이 천상병 시인의 시에서처럼 그렇게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기억하며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개인 각자의 몫과 함께 분명 정부 몫의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 정부는 그런 방향으로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가? 정부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 방향을 바로잡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투표권이 있지 않은가. 다가올 모든 선거에서 우리 각자 몫의 노력을 기대하면서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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