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여러분에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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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에게 미안합니다!”
  • 장동범 시빅뉴스 편집위원
  • 승인 2013.05.20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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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졸업하면서 아직도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이민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여성의 권리를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석유가 정책을 좌우하고, 환경 보호론자들이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여러분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미안합니다.”

2006년 《뉴욕 타임스》 발행인 아서 설즈버거 주니어가 뉴욕 주립대학에서 졸업생을 상대로 했다는 연설이다. 인권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석유 정책과 환경 부문에 들어가면 오늘 날 한국사회와 비교해 다소 낭만적인 멘트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갓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천둥벌거숭이 졸업생들에게 기성세대가 갖는 일말의 진정성이 느껴져 “미안하다”는 말의 울림이 크다.

나는 적어도 12년 이상 제도권 교육을 받고도 왜 대학을 가야 하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 대학생들을 볼 때마다 풋풋한 기대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 든다. 그들에게 이제 캠퍼스의 낭만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하기에는 전망이 너무 어둡고, 지금부터 취직 걱정을 하라고 조언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젊다. 이런 딜레마에서 적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과거의 경험과 내가 살아온 방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젊은이들의 책임 의식이다.

근대 역사에서 대한민국만큼 역동적인 나라도 드물다. 1950년 전쟁 전후 한국은 원조를 받는 최빈국 수준의 농경사회였고, 60~70년대 산업사회로의 진입으로 경제 부흥과 함께 단군 이래 처음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났으며, 90년대 이후 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이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생각해보라! 불과 60년 만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정보사회로 바뀌면서 이처럼 경제부흥을 이룬 역동성을…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민주화가 더뎠고 남북 분단이라는 민족 최대의 아픔이 남았지만.

나는 한국사회의 이 같은 역동성을 교육에서 찾고자 한다. 60~70년대 우리의 가난한 농촌 부모들은 논밭과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대학(당시 사학들을 소뼈로 쌓은 탑이라는 뜻으로 ‘우골탑’이라 불렀다)에 보냈으며, 도시의 어머니들은 머리카락이라도 잘라 자식을 공부시켜 ‘삭발의 모정’(母情)이란 말이 나돌기도 했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반도 남쪽에서는 사람이 유일한 자원이었으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부러워할 정도로 높은 교육열과 향학열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부(富)의 원천인 것이다. 이처럼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첨병 역할을 해온 한국의 대학들이 작금엔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보고 전전긍긍 연민에 빠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취업 걱정 때문이다. 취업률로 대학 지원의 중요한 잣대를 재는 정부의 교육 정책도 문제지만 대학이 과연 무엇 하는 곳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학 교수가 본령인 학문을 가르치고 학생은 전문지식과 지성인으로서의 그릇을 연마하는 상아탑(象牙塔) 본래의 모습은 오늘에 이르러서는 너무 비현실적인 것인가? 대학이 ‘직업인 양성소’나 ‘취업 상담소’로 전락하는 현실에 대해 정말 통렬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나는 학기 초 새내기 대학생들에게 묻는다. 대학은 무엇 하는 곳인 것 같으냐고 또 묻는다. 여러분들은 왜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대학을 다녀야 하고 또 대학에 갈려고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입시공부에 매달렸느냐고. 이 물음은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적어도 60~70년대 우리의 부모들은 대학이 무엇 하는 곳인 줄은 몰랐지만 자식은 어떡해서라도 대학에 보내 사람 대접받고 살게 하려는 다소 맹목적이긴 하지만 엄혹한 철학이 있었고,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나아가 인류의 고난에 대해서도 박애정신에 기초한 진지한 토론도 막걸리 잔을 놓고 벌였었다. 그런데 오늘 날 학부모들의 맹목적인 교육열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고, 자식들의 이기심에 바탕을 둔 높은 부모 의존도는 도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독일의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대학은 학생 개개인이 자신 앞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물론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성인이 되면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성의 전당인 대학을 나온 사람은 자신의 문제 뿐 아니라 차원이 다른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에서 지역과, 국가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까지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 방법을 고민하는 더 높은 차원의 문제 인식을 하라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대학에 들어와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다니다가 막상 졸업 때가 되면 두려워 졸업을 연기하는 학생들! 정작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교수와 학교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학사회의 고민이 깊고, 또 졸업을 앞두고서야 직장이나 진로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학생들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어쨌든 문제 해결의 출발은 바로 자신 앞에 놓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무지(無知)한 자신에 대한 지(知)를 강조했고, 공자도 제자들을 모아놓고 오죽하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논어』 위령공편)고까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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