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사 자살 이제 없어야"...지하철노조, 농성 9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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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 자살 이제 없어야"...지하철노조, 농성 9일째
  • 취재기자 이원영
  • 승인 2016.04.2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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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공황장애로 목숨 끊은 기관사의 비극 계기...2인 승무제 등 요구
▲ 부산도시철도 시청역 대합실에 차려진 기관사 곽 씨의 분향소(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최근 부산도시철도 기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고가 발생하자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이 부산교통공사 측에 “제2의 죽음을 막기 위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기관사들이 마음 놓고 심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한편,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현재 시행하고 있는 '1인 승무제'에서 '2인 승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교통공사는 이에 난색을 보이고 있어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 7일 부산도시철도 호포승무사업소 소속 기관사 곽모(51) 씨가 자택에서 목을 맨 채 가족에게 발견됐다. 곽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엿새 뒤 끝내 숨을 거뒀다. 곽 씨는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불면증, 우울증을 겪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부산에서 지하철 기관사의 자살 사고가 발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지하철노조는 기관사 유족에 대한 보상과 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 20일 시청역 대합실에 고인의 분향소를 차리고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이어 27일 오전 10시 30분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2016년 투쟁 전진대회'를 열고 부산교통공사에 유가족 보상과 재발 방지를 위한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노조 측은 “1인 승무제와 지하구간이 대부분인 2호선의 근무 환경이 곽 씨의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며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관사들이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숨겨야 하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부산지하철노조가 ‘기관사 자살 사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내건 플래카드(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노조는 제2의 죽음을 방지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면 흠이 잡히는 풍토부터 없애야 한다. 공황 장애, 우울증, 불면증 등 기관사 업무 특성 상 발생할 수 있는 정신 질환을 기관사 스스로 회사와 동료에 당당히 공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 씨는 22년차 베테랑 기관사였다. 작년 사내 베스트 기관사에 선정된 그는 주변 동료와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은 동시에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승진은 어렵겠다”는 부담감도 떠안게 됐다. 지난 2월 중순 곽 씨는 병원에서 심리안정 테스트 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러던 중 2월 27일 자신이 일하던 근무지에서 다른 열차의 탈선사고가 발생하자 곽 씨도 “내가 몰던 열차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됐다. 곽 씨는 퇴근 후에도 사고 방지를 위해 열차 고장 대처 매뉴얼 책자를 달달 외우며 하루 평균 2시간 쪽잠을 잤다. 결국 곽 씨는 병원에서 불면증으로 인한 수면 부족으로 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3월 초 불면증으로 병가를 냈다.

의학계에서 기관사는 스트레스 고위험군 직종으로 분류된다. 이미 2006년 부산대 산업의학과 교수진이 부산도시철도 기관사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가 불면증, 불안증상, 우울증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지하철노조 최무덕 수석부위원장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공황장애, 우울증 등을 겪고 있는 동료 기관사들이 많다. 다들 숨기고 있을 뿐이다. 회사에 정신과 진단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길 꺼려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약을 타서 복용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 2006년 부산 기관사 건강실태 조사 결과, 상당 수가 불면증과 불안, 우울증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무환경 개선, 2인 승무제를 요구한 부산지하철노조의 전단(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열차 운행이 3분 이상 지연될 경우 기관사에게 경위서 작성을 요구하는 것도 기관사들에겐 엄청난 부담이다. 이들은 행여 운전 중 열차 고장이나 사상 사고는 물론 경미한 출입문 사고라고 날까 심적 중압감을 안고 근무하고 있다.

2006년 철도안전법 개정으로 기관사들은 10년마다 적성검사를 받아야 한다. 50점 이상 합격인 이 검사에서 베테랑 기관사들도 60~80점을 받기 어렵다. 정확한 판단력과 순발력을 요하는 검사인 만큼 기관사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기관사는 승객 안전을 위해 운행에서 배제된다. 노조 관계자에 따르면, 곽 씨도 이달 22일 적성검사를 앞두고 우울증, 불면증 등 정신질환 때문에 면허증 갱신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족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부산지하철노조 박양수 비정규부장은 “적성 검사를 통해 사무직 등으로 전직 발령이 내려지면 사실상 부적격자 낙인이 찍히게 돼 기관사에겐 사형선고와도 같다”고 말했다.

노조는 공사의 무책임한 태도에 반발하고 있다. 곽 씨는 지난해 동료에게 운전할 때 불안하고 가슴이 뛰고 숨이 가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박양수 비정규부장은 “당시 곽 씨의 심리 상태는 소속 승무소를 통해 본사로 전달됐지만, 공사 측은 고인이 병가를 낼 때까지 심리 치료 등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리 면담 없이 본사에선 전화 두 통만 하고 끝이었다”고 전했다.

박양수 비정규본부장은 부산교통공사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기관사들에게 열차 운행이 끝나면 본선으로 열차를 대기시켜 놓는 구내기관사 업무를 보게 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업무 부담이 적어 주로 고참들이 자기 밥그릇이라 생각하고 꿰차고 있는 구내기관사 자리에 그들을 배정해 업무를 보게 하고 치료가 끝나면 본래 업무에 복귀할 수 있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 부산지하철노조가 유가족 보상과 처우 개선을 위한 철야 농성을 9일째 이어가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노조는 2인 승무제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500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이날 대회에서 "고인은 오래 전부터 기관사 업무의 중압감과 가중되는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었다"며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1인 승무제를 고집하고 있는 공사의 책임이 크다"고 밝혔다. 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에선 2003년 이후 9명의 기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가 잇따른 반면, 서울메트로 1~4호선은 2인 승무제를 운영해 자살 사고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부산교통공사는 20일 노컷뉴스 보도에서 “2인 승무제를 도입하려면 당장 기관사 700여 명이 추가로 필요한데 매년 수백억 원씩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공사의 형편 상 현실성이 없다”고 밝혔다.

한편 노조는 “공사 측이 고인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 개인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고인의 분향소마저 강제 철거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반발했다. 18일 공사가 경찰을 동원해 본사 현관에 차려진 분향소를 강제 철거한 것을 겨냥한 것.

앞서 공사 측은 기관사 적성검사에 대해 “부산지하철 기관사 중 적성검사에서 떨어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적성검사는 상반기에 월별로 나뉘어 진행되기 때문에 기관사가 원할 경우 조정이 가능하다. 1998년 1인 승무제 실시 이후 정신적 고통 때문에 전환배치를 요구한 기관사는 없었다”고 경향신문 12일 보도에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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