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4강 만들 때, 그 공의 감각 잊을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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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4강 만들 때, 그 공의 감각 잊을수 없어요"
  • 취재기자 방민영
  • 승인 2015.12.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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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주역 부산 아이파크 수문장 이범영 선수의 축구 인생 이야기

"그렇습니다. 대 영국전이 벌어진 그날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내 손끝에 닿아 튕겨져 나간 그 공의 감각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4강 신화의 주역 이범영 선수는 그날 그 감격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그 감격은 이 선수만의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함께 했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 감격의 장면을 다시 슬로우 비디오로 감상해 보자. 

2012년 8월 5일, 대한민국과 영국의 올림픽 축구 8강전. 상대팀 영국은 홈그라운드라는 절대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홍명보 감독과 그 키즈들로 구성된 한국의 전사들이 사투를 벌인 결과, 전후반 1:1, 그리고 계속된 연장전 끝에 승부차기까지 가야하는 막다른 골목에 두 팀은 접어들고 말았다. 한국 응원단은 순간적으로 승부차기 승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골키퍼가 누구인가에 쏠렸다. 당시 골문은 주전 정성룡 골키퍼의 부상으로 후반 16분 교체 투입된 이범영 골키퍼였다. 순간, 한국 응원단은 일말의 불안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교체 골키퍼 이범영의 전략은 상대편 키커의 스텝 보폭을 유심히 살피고 빠르게 판단한 방향으로 몸을 던져 골을 막는 것. 승부차기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영국의 선축으로 시작된 승부차기 스코어는 4:4. 아슬아슬하게 승부차기는 마지막 키커만 남겨둔 상태까지 왔다. 다섯 번째 영국 키커는 리버풀에서 공격수로 뛰고 있는 다니엘 스터리지.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스터리지는 과감하게 왼발로 시원하게 공을 감아 찼다. 그의 슛은 이범영 골키퍼의 슈퍼 세이브에 막히고 만다. 이후 한국의 다섯 번째 키커 기성용 선수가 골을 성공시키며, 우리나라는 승부차기 스코어 5:4로 영국을 누르고 4강에 진출한다.

런던 올림픽 축구 종목 동메달은 바로 10년전 한국의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대형 사건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그 4강 신화의 주역은 당연히 승부차기에서 골문을 지킨 부산 아이파크의 골키퍼 이범영 선수였다. 그 순간부터 이범영은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조국에 선사한 영웅이 됐다. 이범영 선수는 사실 승부차기의 숨은 달인이었으며, 골키퍼를 후반에 정성용 선수에서 이범영 선수로 교체한 것은 승부차기를 염두에 둔 홍명보 감독의 신의 한 수였던 셈이었다. 이 선수는 “승부차기는 용인 FC 시절 김봉수 골키퍼 코치의 가르침을 받고부터 자신이 있었다”며 “중고등부 시절 약 50회 가량 승부차기를 했지만 단 한 번밖에 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범영 선수는 1989년 4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축구 인생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과 끈기로 시작된 것이라 말한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자신의 꿈을 축구선수로 정하고 그 꿈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왜 축구를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냥 축구가 좋았다. 그래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이범영 선수는 아주 단순하게 답했다.

▲ 이범영 선수의 어린시절. 왼쪽은 동생 이범수 선수(현 서울E랜드 GK), 오른쪽은 이범영 선수다(사진: 이범영 페이스북).

축구가 마냥 좋아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열한 살 소년은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축구선수로서 성공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 이범영 선수의 부모는 어린 소년 이범영에게 일주일의 생각할 시간을 줬다. 축구를 시작하게 되면 이를 악물고 누구보다 열심히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축구선수의 길을 걷겠다고 결정했다. 그런 그의 결정에 부모는 묵묵히 따라주었다.

축구선수의 길을 선택한 그는 즉시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한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 일주일에 세 번 운영하는 축구교실을 다녔고, 그는 단지 친구들 중 가장 키가 크다는 이유로 골키퍼를 맡게 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장안 중학교 축구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서울시 중랑구에 있는 장안 중학교 축구부로 진학한 그는 이곳에서는 자신이 축구선수로 성장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안중학교는 프로구단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학교 자체에서 운영하는 축구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숙사는 컨테이너였고 골키퍼 코치도 따로 없어서 이곳에서 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때 마침 허정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총감독을 맡아서 유소년 축구 인재를 발굴하는 축구학교인 ‘용인 FC’가 만들어졌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그는 용인 FC에 테스트를 받고 들어간다.

용인 FC는 전국 유소년 축구 인재를 발굴해 선진 축구 기술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국가대표 등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눠져 있고, 각각 두 개씩, 총 네 개의 학교가 용인FC와 연결돼 있다. 이범영 선수는 그때 용인FC로 들어갔던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그곳에 모인 친구들은 현재 J리그 마츠모토 야마가 FC에서 뛰고 있는 김보경 선수,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전북 현대 모터스의 이승렬 선수 등이다. 이범영 선수는 김보경, 이승렬과 같은 또래 친구들이 상당한 기량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선수는 “그 친구들을 쫓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내 실력도 많이 늘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갈고등학교 2학년 때, 중고등부 리그에서 팀을 수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던 그는 연세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시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김승규(울산 현대), 하강진(부천 FC), 정산(성남 FC), 김다솔(대전 시티즌) 등의 골키퍼들이 그의 라이벌이었다. 네 명의 선수 모두 대학생이었고, 그는 다른 골키퍼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하기보다는 프로 데뷔를 먼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내가 연세대에 들어갔다면 그 선수들과 같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 부산 아이파크 클럽하우스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범영 선수(사진: 취재기자 방민영).

고등학생 신분으로 수차례 프로 구단에 테스트를 보러 다닌 끝에, 그는 2007년 부산 아이파크 골키퍼로 입단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는 부산 아이파크의 골대를 지키고 있다. 이범영 선수는 “물론 다른 구단에서 수많은 콜을 해왔지만 부산은 나에게 의미있는 팀”이라며 “어린 나이로 처음 입단한 팀이기도 했고, 또 제가 부산이란 도시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할 만큼 좋아하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흔히들 골키퍼를 축구팀의 리더라고 부른다. 그는 한 팀에서 무려 8년 간 골키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는 골키퍼는 맨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선수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훈련할 때부터 경기 직전까지 수비진들과 전략적인 부분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경기 도중에 선수들이 집중을 못하거나 해이해진 모습을 보이면 따끔하게 혼을 낼 때도 있다”고 말했다.

▲ 2015년 3월 15일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공을 차는 이범영 선수(사진: 부산 아이파크 홈페이지).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그는 주저 없이 “2012년 런던올림픽”이라 말한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듯 가만히 생각하다 미소를 띠었다. 런던올림픽 이후 그에게는 급격히 많은 팬이 생겨났고 부산아이파크의 클럽하우스는 개방시간 때마다 이범영 선수의 팬들로 가득 찼다. 부산아이파크는 매주 목요일 7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한 시간 동안 팬들에게 클럽하우스를 개방한다. 이범영 골키퍼는 “런던 올림픽 직후에는 매일 클럽하우스를 개방했었다”며 “선수들의 자유시간은 한정되어있는데, 나는 밀려오는 펜들로 인해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해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2013년 12월 결혼한 후 팬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범영 선수는 “결혼을 하면 클럽하우스를 출퇴근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팬이 줄어들게 된다”고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그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직후 팀으로 복귀했을 때 소위 말하는 ‘슬럼프’를 겪었을 때라고 말한다. 그는 “그 때 당시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리 국가대표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도 못했을뿐더러, 48시간이 넘는 비행시간과 11시간 이상의 시차 때문에 몸이 너무 지쳐있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복귀한 팀은 2부리그인 K리그 찰랜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강등권에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그는 일주일에 두 번 경기를 치루고 매일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슬럼프 극복 방법은 “스트레스를 푸는데 집중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게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슬럼프 겪은 그는 이내 말끔히 제 컨디션을 되찾았고, 막바지 10경기 무패를 기록하면서 팀은 8위를 유지했고, 그는 2014년 시즌 가까스로 강등권에서 팀을 구해냈다.

2015년 이번 시즌에 이범영 선수는 총 29경기에 출장했고 실점은 40점을 기록했다. 경기당 평균 실점이 1.38점인 셈이다. 이는 과거 화려했던 그의 전적에 비하면 부진한 성적이다. 부산 아이파크는 창단 이래 처음 1부 리그인 K리그 클래식 12위 꼴찌가 되어 2부 리그로 강등됐다. 부산 아이파크는 5일 수원FC와 가진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패하며 강등이 확정됐다. 1983년 대우로열즈로 팀이 출범한 이래, 부산은 안정환 같은 스타를 보유하면서 4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할 정도의 명문 구단이었다. 그 화려한 나날을 뒤로 하고 부산 아이파크는 2016년에는 2부 리그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할 처지가 됐다. 이범영 선수는 “구단에서 투자를 많이 해준다면 아무래도 선수의 질도 높아질 것이고 그에 따라 팀 성적도 좋아질 것”이라 말했다.

요즘 잘 나가는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는 다시 국가대표 선수로 뛰는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일본과 같은 다른 나라 리그로도 진출하고 싶은 포부도 키우고 있다. 런던 올림픽 영웅 이범영은 아직도 젊다. 그는 팀의 부활과 개인의 부활을 가슴에 새기며 2016년을 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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